111. 겨우 1%
“여기네.”
소속사 앞에 도착한 윤호가 로비로 걸어가며 희연에게 전화했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제때 왔구나. 나 내려가고 있어! 출입증 없으면 엘리베이터 못 타니까 잠시만 기다려.”
“응. 들어와서 기다릴게.”
배우 양성을 전문으로 하는 K엔터 사옥의 내부 답게, 많은 소속 배우들의 액자와 포스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윤호는 그 중 희연의 포스터에 시선을 두었다.
‘대문짝만하네.’
하긴, 요즘 최고로 잘 나가니 당연한 것이 아닌가. 희연을 내세우지 않는다면 소속사에서도 상당히 아쉬울테니까.
“윤호야!”
“!”
저 멀리서 편한 옷을 입은 희연이 윤호를 향해 인사했다. 소속사 내부라 모자도 마스크도 쓰지 않고 있는 모습이 자유로워보였다.
“오랜만이야.”
“응. 이 위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위로 올라갈까? 2층은 소속 배우들 전용 공간이거든.”
1층에선 보는 눈이 많으니 뒷말이 나오지 않게 빨리 올라가자는 말이었다. 윤호는 희연을 따라 올라갔다.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마주앉아 인사를 건네는 건 2년만이었다.
“예라랑은 운동하느라 계속 만났다고 들었어.”
“예라도 그렇고··· 글 쓰는 사람들도 체력이 중요하니까. 나도 쓰다가 코피 몇번쏟고 나니까 느꼈지.”
“지금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피곤한 거랑은 거리가 멀어보여.”
그때, 희연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작은 수첩 같은 겉이 슬슬 튀어나오더니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툭-!
“앗.”
“주워줄게.”
윤호 쪽으로 떨어진 수첩은 바닥에 펼쳐져 있는 상태였다. 희연이 수첩을 받아들며 싱긋 웃었다.
“내 소설 수첩이야.”
“소설 수첩?”
“응. 대본에 더 빨리 집중하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낸 방법.”
희연이 안을 펼쳐 보여주었다.
“대본에 나올법한 다양한 상황을 짜서 직접 문장으로 써보고 있어. 그렇게 이런 상황 속에서의 인물의 감정에 먼저 이입해두면, 대본을 받았을 때 비슷한 장면은 훨씬 빨리 처리되더라고.”
하긴, 옛날에는 조연이었기에 장면이 별로 없었을테지만 지금은 주연급을 훨씬 많이 맡으니 대본의 양도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다.
“방법을 터득해서 다행이네.”
“다 네 덕분이야.”
꽤 두꺼운 수첩에 빼곡하게 희연이 만들어내고 상상한 상황이 적혀 있었다.
“아. 이거 주려고 왔어.”
“이게 뭐··· 어어?”
희연이 <빛글> 12월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즘 없어서 못구한다는 그거 아냐?”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뭘 줄까 생각해봤는데 이만한게 없더라고.”
“매니저 오빠가 이거 찾으려고 서점을 몇번이나 갔는데 다 없···”
희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이상한 뜻이 아니고. 나도 네 인터뷰 읽고 싶었거든. 사실 네가 먼저 연락 주지 않았더라면 만날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상한 뜻 아닌거 알아.”
고개를 저은 윤호가 물었다.
“나도 너한테 오랜만에 부탁하려고 온거니까.”
“부탁···?”
“바쁜거 알지만, 오랜만에 시간 낼 수 있나 해서 말이야.”
“시간? 무슨 시간?”
“스케줄 비는 날 알려줘.”
“스케줄?”
“매니지먼트 창립식에 와줄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희연이 손뼉을 쳤다.
“아아, 그 매니지먼트 말하는거구나. 당연히 가지! 늦게라도 가거나 일찍 들를 수 있어. 그런데 내 스케줄은 왜?”
“그럴 필요 없어. 너한테 맞출거거든. 우리 중에 제일 바쁜 사람이라서 물어보러 온거야.”
희연이 괜스레 머리카락을 앞으로 해 귀를 가렸다.
‘지금 저렇게 물어보는 건, 나를 꼭 초대하고 싶다는 뜻인가···?’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소중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다.’
2년 동안 연락이 없기에, 내심 이대로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많이 했다. 오늘도 혼자 쓸데없는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많이 타박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사실, 거의 포기하려고 했다. 과거도 지금도 윤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희연 스스로만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윤호의 머릿속에 내가 없진 않구나.’
그건 누가 봐도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에 가깝지는 않았다. 그러나 희연에게는, 지금의 이러한 것도 충분한 발전이었다.
***
12월 중순. 창립식 날짜가 정해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입장권을 비롯한 초대장을 보내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와. 이게 초대장이에요?”
“네. 여기에 초대할 분 이름 써서 주소로 보내면 돼요. 인쇄 잘 됐죠?”
하나부터 열까지 착착 진행되는 준비에, 모든 사람들이 신이 나 더욱 속도를 내 열심히 창립식을 준비했다. 초대장을 부치고 뷔페를 부르고 식순을 준비하고.
‘동아리 부원들에게 줄 후원 증명서도 수여해야하니까. 수여증 양식도 준비해야겠어.’
매니지먼트로부터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서.
‘원동력을 끊임없이 심어줘야지 더욱더 노력해 나갈거고, 해당 동아리 부원들도 후원 받는 부원들을 보고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도록···’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일거리들이 끝나가고 있었다. 무언가 대본을 열심히 적던 윤호가 시계를 흘긋 보더니 모두를 향해 말했다.
“아. 그럼 우리 모두 퇴근하도록 할까요?”
“좋습니다.”
“좋아요!”
“아, 완성된 초대장들은 수집한 주소로 우체국 전송 부탁드려요.”
윤호의 말에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긴 직원이 힘차게 말했다.
“여기 작가님 친구분들 것도 다같이 부칠까요?”
“아. 아뇨. 그건 제가 따로 건네주려고 빼놨어요.”
은세이도 퇴근 준비를 위해 주변의 짐들을 차차 정리하고 모니터를 끄는데, 이미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전부 다 퇴근 준비를 마친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다들 미리 퇴근 준비했어? 왜 이리 급하게들 일어나?”
마치 짐을 싸놓고 엉덩이만 뗀 듯, 빠른 속도였다.
“아. 끝나고 약속이 있어서요···!”
“저도요. 헤헤.”
“저도 오늘 여자친구 만납니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직원들을 향해 은세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칼퇴는 좋은데, 다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 처럼.”
“아니요? 꿍꿍이라뇨.”
“저희 다 따로 약속간다니까요.”
“···”
편집자들을 향해 눈썹을 까딱인 은세이가 이내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뭐. 아니라는데 내가 더 뭐라고 해?”
그러나 눈치빠른 은세이가 이 순간 보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윤호와 편집자들이 눈을 마주치며 신호를 주고 받는 그런 장면이었다.
잠시 후, 사무실 앞.
“오늘 다들 수고하셨어요.”
“작가님이랑 이사님이 제일 수고하셨죠.”
“날이 추워요. 약속 잘 가시고, 집으로 향하시는 분들도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다음주에 봅시다!”
“안녕히 계세요~”
제각기 인사를 하고 떠나는 직원들 사이에서, 무호와 은세이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트렁크를 열고 괜히 미적대는 윤호를 본 은세이가 인사를 건넸다.
“작가님, 트렁크에 뭐가 있나봐요?”
“아아. 트렁크가 너무 더러워서, 정리 좀 하고 갈까 해서요.”
“그러시군요. 도와드릴까요?”
“아, 아뇨! 어서 퇴근하세요.”
삐걱대는 윤호를 본 은세이가 별 생각 없이 차창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뭐, 나름의 사정이 있으시겠지.
“그럼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네, 주말 잘 보내세요.”
은세이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윤호는 잠시 기다리다 트렁크 문을 닫았다.
“···”
곧 조용한 주차장에 전화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편집 1팀 부편집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작가님! 차 도로 쪽으로 빠져나갔어요.
“그래요? 바로 올라갈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이 있는 층에 내리자, 편집 1팀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가신 것 맞죠?”
“네. 뭐 두고 간 것도 없으니 다시 오시진 않을거에요.”
사무실은 그 누구의 물건도 없이 깨끗했다. 윤호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다같이 볼 수 있겠네요.”
“작가님도 아직 못보신 거에요?”
“네. 출근하자마자 배달이 와서, 제 사무실 서랍에 얼른 숨겼죠.”
윤호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벨벳으로 된 상자를 열자, 크리스탈로 된 감사패가 등장했다.
“짠!”
“우와아아-!”
“진짜 멋지게 나왔네요.”
“여러분, 이 디자인 제가 했습니다!”
직원들이 감사패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렇다. 은세이 편집장을 위한 감사패가 오늘 배송왔고, 그녀 몰래 다같이 감사패를 확인하기 위해서 헤어지는 척 다시 올라온 것이었다.
그 중 은세이와 가장 많이 일한 편집자가 이제야 마음이 편안하다는 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젠 대표님이지만, 편집장님께서 예전에 정말 큰 힘이 되주셨거든요.”
“그러셨을 것 같아요.”
“일도 물론 잘 하셨지만 직원들 하나하나 신경써주시고, 많이 가르쳐주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공로도 인정받지 못하시고 퇴사하셨고요. 내내 마음에 걸린 일이었는데, 같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무호도 빛을 받아 반짝이는 감사패를 바라보았다. 이건 은세이를 향한 출판 1팀의 마음이었다. 물론 자신도 돕기는 했지만 이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 바로 출판 1팀이니까.
“지금은 충분히 행복하시겠어요. 이렇게 생각해주는 분들이 계시니까요.”
“맞아요. 누구보다 출판 하는 일에 진심이셨고, 지금은 작가님과 함께 하고 계시잖아요?”
이사 승격 말고도 감사패 증정이 있다는 것은, 은세이빼고 나머지가 다 아는 사실. 그러니까 출판 1팀 동료들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가 될 것이었다.
***
12월 중순. 약속된 창립식이 다가왔다. 와중 아침부터 지호가 옷걸이 여러개를 들고 와 윤호를 향해 패션쇼를 시작했다.
“오빠. 뭐 입을까? 이거? 이거?”
“으음···”
아주 예전, 연기발표회 갈 때 자신의 옷을 능숙하게 고르는 것을 보고 예상하긴 했건만 이렇게 옷이 많은 줄은 몰랐다.
“다 예쁜데.”
“대충 말하지 말고! 자··· 이입해봐. 오빠가 기념행사에 갔어.”
“응.”
“너무 멋진 옷을 입은 여자가 있어.”
“응.”
“1번. 이거 2번. 이거. 그 여자는 둘 중 무슨 옷을 입었을까?”
“음···”
“무슨 옷을 입었을 때 그런 자리에서 센스있다고 생각하게 될지 이입해봐.”
윤호가 보기에, 1번은 단정하면서 사랑스러운 느낌의 옷이었고 2번은 도도하고 시크한 멋이 있는 옷이었다. 윤호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1번.”
“역시 3번이 나은 것 같지? 귀여운 스타일로.”
“···앞으로 물어보지 마.”
“히히. 골라줘서 고마워~!”
옷걸이를 챙겨 방을 떠난 지호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윤호였다.
***
사무실이 있는 빌딩 고층에 기업 전용 연회장이 있기에, 그곳이 창립식 장소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물론이고 한빛 문학지원팀원들과 북앤 컬쳐스, 꼬마 북스 직원들, 출판 1팀도 도착했다.
“무호(muho)!”
“케네스 대표님!”
“윤호. 나도 따라 왔어!”
거기에 ···무려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케네스 대표와 케이든 그리고 조이와 스티븐까지. 거기에, 후원을 계속하던 한선그룹 예술지원팀 팀장도 초대를 받고 방문했다.
“오후 미팅 때문에 본식만 참가하게 되었지만, 제 마음을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당연하죠. 오늘 한선그룹 지원을 받던 동아리원들도 오니 인사 한번 나누고 가세요.”
“차세대 예술 인재들이 아닙니까. 기대되는군요.”
여러 사람들을 맞이하면서 안과 밖이 차차 붐비기 시작했다. 화환들이 쌓여갔고, 밖의 기자들 중 절반이 철수하기 시작할 무렵. 한숨 돌리던 윤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직 안 온 사람들이 누구야?”
“오, 형!”
백영권은 상당히 어색해보였다. 평소 커다랗고 편안한 옷만 입고 다니던 그가 처음, 아니 두 번째로 딱 맞는 옷을 입었으니까.
“옛날에 했던 인터뷰 이후로 이렇게 입은 건 처음보지?”
“어. 딱 봐도 누나가 골라줬네. 이따 나가서 할 인삿말은 외웠어?”
“외우긴 했는데··· 저 마이크 앞에 서면 무조건 까먹는다에 한표 걸게.”
“그럼 그냥 읽어. 또박또박 읽기만 하면 괜찮으니까.”
이곳을 대표하는 소속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젊은 비평가’ 백영권이었다. 소속 대표인 무호가, 그리고 소속 작가의 대표인 백영권이 두번의 인삿말을 할 예정이었다.
“지금 안 온 사람이··· 희연이랑 세린이지?”
옆에서 듣고 있던 은근슬쩍 강준이 키득거리며 말을 얹었다.
“오세린은 절대 늦을 애가 아닌데 오늘 따라 늦은 걸 보면, 대충 예상이 가는구만.”
그런 강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아···”
겨우 빌딩 앞에 도착한 세린이 헉헉거리며 구두를 고쳐신었다.
‘아, 맞아. 초대장.’
핸드백을 뒤지던 세린의 얼굴이 이내 새하얗게 변했다. 초대장이 없었다. 원래 이런 실수 따위 하지 않는 빠릿한 성격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집에서 너무 급히 출발했어...!’
평소에는 아무거나 입고 다니는데, 오늘 아침은 거의 옷장을 뒤집어 엎었으니까. 옷이 다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부담스럽거나, 너무 후줄근해보였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건 셔츠에 정장바지, 그리고 검은 구두. 발을 동동 구른 세린이 한숨을 쉬었다.
‘다른 선배들이나 윤호 선배한테 문자라도 보내놔야 하려나.’
휴대폰을 찾아 화면을 켠 세린의 얼굴이 2차로 새하얗게 질렸다.
‘···!’
휴대폰의 남은 배터리가 겨우 1%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