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전원 기부
경매가 끝나고 홀로 걸어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출판사의 관계자들까지 무호와 케네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예상외로 평온한 얼굴을 한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케이든이었다. 은세이가 케이든을 향해 물었다.
“케이든 씨, 알고 있으셨어요?”
“정확히는 몰랐어요.”
케이든은 할아버지의 결단력이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곧 그의 얼굴이 약간은 시무룩하게 물들었다.
“물론... 저 때문이 크긴 한 것 같지만요.”
“케이든 씨 때문이라뇨?”
“예전에 제가 무호 작가님에게 한번 무례하게 굴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벌을 받긴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음식물을 뒤집어쓰고 넘어졌던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시뻘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케이든이 손부채질을 하면서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그때 일을 많이 신경 쓰시거든요.”
“아...”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그런 미안함만으로 무호 작가님과 공 매니지먼트에게 투자하신 것은 아닐거에요.”
케이든이 씩 웃으며 저편을 보았다. 조금 뒤로 물러나있는 케이든과 은세이와 달리, 기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케네스와 무호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케네스 대표님! 무호 작가가 대표로 소속된 공 매니지먼트에 15억 상당에 낙찰받은 출판 독점권을 넘긴 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케네스의 말에, 경매장 안에 있던 이들 말고 바깥에서 상황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한 차례 크게 웅성거렸다.
“무호 작가와의 인연은 미국 투어 때부터인가요?”
“그렇습니다. 당시 미국을 강타했던 무호 작가의 작품 <머러미쿠>에 반해서, 그를 작가의 밤 행사에 초대했죠. 나는 무호 작가에게 아주 큰 빚을 졌고, 무호 작가는 그럼에도 내 명예를 지켜줬죠. 이제 와서 갚는 것 뿐입니다.”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녹음을 했다. 누군가 또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통 큰 투자는, 무호 작가와의 연을 생각해서 결정하신 일인가요?”
“흠.”
케이든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지금 그 질문은, 제 결정이 상당히 감정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단 말이군요.”
“아, 아닙니다...!”
기자는 당황해 손사래쳤지만, 어찌되었건 의도한 바는 맞았다. 그건 케네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으니까.
“이 일은 의 대표로서 결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
기자들이 아우성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무호 작가와의 정 때문에 15억을 쓴 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일이 의 위상을 더 끌어올릴 것이라 생각하고, 끝내 회사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힘을 제공할 것이라 믿습니다.”
옆에서 케네스의 질문을 간파한 무호가 미소지었다.
‘그 말은 즉, 15억을 1년치 마케팅 비용이라 생각했다는 말이군.’
의 자회사는 출판사 말고도 몇 개의 라인이 있다고 했었지. 그들에게도 상당한 이득이 될 것이며, 어쩌면 이 15억이라는 돈은 배의 수익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에 나와의 우정을 합쳐, 15억을 걸었다는 거네.’
어찌되었건 참 통이 큰 사람이었다. 무호에게도 여러 가지 질문이 주어졌다. 그중 가장 중복이 많이 되었던 질문은, 단언컨대 이런 상황을 예상했느냐는 질문들이었다.
“심정이 어떠십니까?”
“아까 경매장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는 못했죠.”
기자들이 그건 당연한 말 아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다음 말을 준비해달라는 건가.
“그리고...”
무호는 케네스를 바라보았다. 무호의 시선을 읽은 것일까. 케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케네스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겠지.
“이제 그 15억은 제가 대표로 있는 공 매니지먼트의 자본이니, 좋은 마음으로 온 만큼 좋은 일에 써야겠죠.”
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독증 센터와 전국 도서관, 보육원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 케네스 대표님과 공 매니지먼트의 이름으로 전원 기부하겠습니다.”
“!”
아까 케네스가 했던 말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웅성거림이 일었다. 기자들의 눈에 특종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지나갔다.
“그럼...”
무호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케네스가 경매에 참석한 모든 관계자들을 위해 준비한 저녁 만찬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
[무호의 인맥은 어디까지?]
[출판사 의 대표 케네스, 선뜻 15억 투자...]
[공 매니지먼트, 와 손잡고 세계진출의 가능성은?]
[무호 작품 독점, 얼마만큼의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인가?]
[작품 독점을 위해 모인 10개국 21개의 출판사! 출판업계가 들썩...]
“기사들 좀 보세요, 작가님.”
저녁 만찬 중, 무호와 나란히 테이블 사이를 거닐던 은세이가 벅차올라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원하던대로 되었다. 공 매니지먼트는 세계로 한발 뻗어나갈 수 있도록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거기에 더해 무호라는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치에 대해서도 논하게 될 정도였다.
‘이젠 정말 고지가 보이는구나.’
무호라는 작가는, 분명 몇 세기가 지나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책 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하겠지.
“작가님!”
“아니, 이사님...”
은세이의 눈꼬리가 촉촉했다. 혼자 또 무슨 웅장한 목표를 세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호는 옆의 티슈를 두장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좋은 날인데, 울지 마세요.”
“네. 네, 그래야죠.”
그녀가 눈물을 콕콕 찍어내는데, 엉으로 말을 걸며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편집장 이네스였다.
“이, 이네스 편집장...?”
“전화로만 뵙고, 지금은 처음 뵙네요. 반가워요, 무호 작가님 그리고 은세이 이사님.”
이네스가 들고 있던 잔을 무호와 은세이와 가볍게 부딪혔다. 둘은 얼결에 와인을 들이켰다. 이네스가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아쉬워요.”
“?”
“공 매니지먼트를 뺏긴 기분이라서요.”
아쉬울만도 했다. 이런 계약을 먼저 제안한 것은 <유로스>인데, 경쟁에서 빠르게 밀려나가 버렸으니까. 이네스는 씁쓸한 표정이다.
“...공 매니지먼트는 이제 시작이고, 기회는 많으니까요. 저도 프랑스에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라, 자주 가게 될 것 같은데요.”
무호의 말에 이네스가 즉각 반응했다.
“날짜라도 알려주시면 유로스에서 성심을 다해 작가님을 모시죠. 출판사 구경도 하시고, 유로스의 많은 책들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와 삽화가도 만나보세요.”
“그러면 좋을 것 같네요.”
“무호 작가님은 심플한 책을 좋아하시지 않나요?”
옆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은세이와 무호의 눈이 커진다. 아주 반가운 사람이다.
“조이! 스티븐!”
구면이라 서로 반가워하는 그들을 본 이네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네스가 조이와 스티븐을 향해 물었다.
“두 분들은... 머러미쿠를 같이 작업하신 분들이죠?”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워커스>의 부사장 조이, 대표이사 스티븐입니다.”
명함을 주고받은 그들이 정중히 인사를 나눴다. 스티븐이 이네스에게 아까의 말을 덧붙여 설명했다.
“끼어든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작가님께서 저희와 머러미쿠를 작업하실 땐 전권 모두 삽화를 안쪽에만 넣었거든요.”
이네스가 와인을 홀짝였다.
“같이 작업해서 좋겠네요. 제 희망사항을 이미 이루신 분들이라니. 무호 작가님이 심플한 표지를 좋아하신단 건 참고할게요.”
그때, 무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감지한 윤민수가 다가와 무호를 불렀다.
“무호 작가님. 여기서 아주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윤민수는 몇 년 전 무호와 함께 미국을 투어 했던 자이기에, 조이와 스티븐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북앤컬쳐스 자본으로 어느 정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다른 곳들도 그 정도 자본을 무호 작가님을 위해 쏟아부을 줄 아는 곳이란 걸 간과했네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조이가 귀걸이를 딸랑이며 속닥였다.
“솔직히 저랑 스티븐도 기대는 안했어요. 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출판재벌이거든요.”
무호가 윤민수에게 물었다.
“북앤 컬쳐스 다른 편집자 분들도 잘 지내고 계세요?”
“네. 다들 잘 지내세요. 내년엔 이 질문에 대답 못해드리지만요.”
“네?”
윤민수가 씩 웃었다.
“저 퇴사하거든요.”
“퇴사요?”
조이, 스티븐, 은세이와 무호가 그를 쳐다본다. 와중에 이네스도 귀가 솔깃한지 시선이 돌아갔다. 윤민수가 뭔가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새로운 잡지사를 만들어보려고요.”
“저, 정말요?!”
“네. 잊고 살았던 꿈이었지만, 외국에 한국의 책을 소개하는 잡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정말 좋은 생각 같은데요.”
무호도 윤민수의 생각에 감탄한 상태였다. 그는 좋은 편집장이었지만, 잡지사를 이끌어가기에도 부족함 없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딱 맞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으셨구나.’
가만히 듣던 무호가 모두를 향해 말한 건 그때였다.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유로스도 공 매니지먼트와 함께 프로젝트 진행하고 싶다고 하셨으니, 저희 다 같이 일 하나 해보는 거 어때요?”
“일이요?”
“네. 오디오 북이나 점자책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오디오북과 점자책. 난독증 환자와 시각 장애인의 독서를 도울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점자책도 그렇고, 오디오북도 각 나라 출판사들의 협력이 간절하겠네요.”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멀리서 케이든과 함께 다가온 케네스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유로스, 그리고 워커스와 북앤컬쳐스 관계자분들이군요. 만찬은 즐거우십니까?”
“덕분에요.”
가장 치열하게 경매를 이끌어갔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곳에, 무려 15억을 지불하고 독점권을 가져간 가 등장했다. 다른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몰렸지만, 그들 사이에서 아까 경매장에서와 같은 견제는 보이지 않았다. 케네스가 잔을 들어올렸다.
이네스도, 조이와 스티븐도, 은세이와 윤민수도 모두 웃고 있었다.
“자, 그럼. 무호 작가와 출판 업계의 영광을 위해.”
무호도 미소지었다. 그들이 모두 웃는 이유는 간단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보다도 무호의 관심은 항상 저 너머 진정으로 독자들을 위하는 것에 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15억 경매에서 진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점자책이라던가 혹은 오디오북이라던가. 유로스가 무호 작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은 차고 넘치게 남아있으니까.
***
한달 후, 7월 중순. 달마당 도서관에서는 무호 <초단편집> 북 콘서트가 한창이었다. 무커상 까지 탄 이후로는 그 인파가 더욱 상상초월하게 몰려, 따로 경호원을 고용해야 할 정도였다.
“작가님, 저 정말 힘들게 왔어요.”
바글바글하게 건물 밖까지 몰려 있는 사람들의 안쪽. 그보다 더 안쪽. 의자와 넓은 책상이 놓인 곳에는 무호 작가가 앉아 팬과 마주보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제주도요.”
“제, 제주도요?”
너무 반갑게 행동했나. 무호가 입을 다물었지만, 팬은 무호가 자신의 노고를 알아준 것 같아 되려 기분이 좋았다.
“작가님 콘서트가 미국에서 열린다고 해도 날아갈래요.”
“걱정 마세요. 한국에서 제일 많이 할게요.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다른 라도 많이 가는거죠.”
무호는 사인한 책을 팬에게 건넸다. 그 다음 차례.
“아, 안녕하세요.”
“무호 작가님! 안녕하세요.”
또 다른 사람이 활짝 웃으며 무호에게 인사를 했다. <초단편집>의 북 콘서트와 사인회가 약 5번 정도 예정되어 있었는지라, 무호는 손목 보호대를 단단히 차고 사인회에 임했다. 컨디션 관리도 물론 잊지 않았다.
“어, 저 사람...!”
그때,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꽃다발을 든 세린이었다.
“오세린 소설가 맞지?”
“무호 작가님이랑 친한 그 사람!”
“예쁘다...!”
“공 매니지먼트 소속이라 그런가, 엄청 친한가봐.”
그리고, 세린의 뒤에서 같이 따라오는 한 남자. 강준이었다. 아직 강준은 소설가로 활동이 전무해서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무호가 손을 흔들었다. 진행요원이 잠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독자 여러분들, 작가님 휴식을 위해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세린이 다가가며 무호를 살폈다.
‘윤호 오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다.’
성큼성큼 다가간 세린이 테이블엔 꽃다발을 놓고 인사를 건넸다.
“콘서트 축하해요. 오늘이 마지막이죠?”
세린이 윤호의 손목에 있는 보호대를 힐끔거렸다. 오늘로 다섯 번째 북 콘서트. 콘서트 당 500명의 사람들을 받겠다고 한 건 오로지 무호의 의지였다.
‘그것만으로도 턱 없이 부족하다는 건 알아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받고 싶던 마음이랄까.’
윤호가 손목을 숨기며 웃었다.
“온 김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 대기실에서 기다릴래?”
세린이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글 쓰는 사람한테는 손목 관절이 생명인데.
“살살 해요.”
“그래, 살살 해라.”
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다다음주부턴 제주 프로젝트 책 나오고, 또 북콘 시작하겠죠.”
“그렇겠지?”
그러나, 바쁜 만큼 행복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북 콘서트와 각종 강연 그리고 출판 준비로 여름이 빠르게 흘렀다. 프로젝트 소설 <제주도의 여름>은 무호가 참여했다는 소식 때문에 날개를 달고 팔렸고 무려 5000만부라는, 프로젝트 소설집 치고는 엄청난 화제성을 불러왔다.
한편, 노벨재단에선 202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을 위해 세계의 문학부문 전문가들에게 초대장을 발송했다. 여름의 녹음이 하나 둘 붉게 변하기 시작한 9월 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