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작은 불행이 찾아오는데2021.06.27.
세 사람이 광장에서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에녹은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내용인즉슨 지금 지닌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을 접는 게 어떻겠냐는 관리인의 조심스러운 의견이었다.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
에녹의 아버지인 선대 공작이 무리하게 매입해 사업을 벌였던 광산이었다. 아킬리즈 가문이 막대한 빚을 지게 된 원흉 중 하나였다.
[이제 여기서 핑크 다이아몬드가 나오면 된단다!]
어릴 적 에녹을 데리고 광산에 방문한 선대 공작은 언젠가 핑크 다이아몬드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라 노래를 불렀다. 사실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을 매입한 건 그다지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아름답고 영롱한 핑크 다이아몬드는 보석 중 제일 희귀하여 헬리오스 제국에서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소원을 이루어준다’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으니. 하지만 광산을 매입한 이후로 한 번도 핑크 다이아몬드가 나오지 않아 문제였다. 아니, 나오긴 했다. 불순물만 잔뜩 껴 땅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값어치가 낮았을 뿐. 결국 선대 공작 부부가 세상을 떠나고 빚만 떠맡게 된 지금으로선 가장 쓸모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정리하는 게 맞겠지.’
심지어 리로이 후작이 핑크 다이아몬드를 대체할 만한 분홍빛 도는 광석이 나오는 광산을 매입했다고 했으니.
‘하루라도 빨리 팔아버리는 게 나을지도.’
투명한 광석이 안 나온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광산이었다. 에녹은 짧은 탄식을 흘리며 광산 관리인에게 답장을 썼다. 핑크 다이아몬드 광산을 매각하기로. 그리고 편지 봉투에 넣으려는 찰나 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누구지?’
에녹은 답장으로 쓴 서신을 서랍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저택 문을 열자 바로 앞에 서 있는 리비온과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쳤다.
“지금 없습니다.”
정중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난번 방문 때도 무례하게 찾아오더니 예의라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비온은 물러서지 않고 에녹에게 말했다.
“오늘은 아킬리즈 경께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말에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에녹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왜 저를 찾아왔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오시죠.”
에녹은 무심하게 말하며 리비온과 함께 집무실로 갔다. 가는 길에 리비온은 저택을 힐끗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공작 저라고 하기엔 사용인을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리비온도 지나가듯이 아킬리즈 공작 가의 소문을 들어본 적 있었다.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한 모양인지 형편이 썩 좋지 않은 듯 보였다.
‘어째서 이런 곳에 남겠다고 하는 건지.’
수십 번 수백 번을 생각해도 레티샤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아무것도 없는 저택에서 뭘 하겠다는 건지.
‘식사는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입 밖으로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아 리비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곧 집무실에 도착해 들어가자마자 에녹은 리비온의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리비온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킬리즈 경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에녹의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리비온은 그에 주저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레티샤를 설득해주시죠.”
“무슨 설득을 말하는 겁니까?”
“여기는 레티샤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제명당했을지 몰라도 레티샤는 한평생 귀족 집안에서 자랐다. 그런 레티샤가 이렇게 사용인 한 명 없는 저택에서 지내다니. 분명 불편하고 불쾌할 것이 틀림없었다.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지내게 할 수 없어.’
레티샤가 이 저택에서 지내겠다고 말한 그날, 리비온은 홀로 돌아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가문에서 파문당해 갈 곳 없던 중 우연히 아킬리즈 공작과 만나 도움을 받은 듯 보였다. 도움을 받았으니 당연히 은혜를 갚기 위해 이곳에 남겠다고 한 모양이다. 그 마음은 이해한다만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보이는 가문에서 레티샤가 지내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레티샤를 데리고 가야 했다. 하지만 동조할 생각이 전혀 없는 에녹은 여전히 건조한 표정으로 리비온을 쳐다볼 뿐이었다.
‘허물없이 지냈나 보군.’
이상하게도 리비온이 레티샤를 리로이 영애가 아닌 레티샤라고 부를 때마다 어쩐지 신경이 거슬렸다. 애써 그 마음을 뒤로 보내고 현실을 보았을 때는 조금씩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챙길 사이면서 도대체 왜.’
왜 그 밤에 레티샤 혼자 길거리에 남겨졌는지. 아니, 애초에 가문에서 파문당할 때까지 뭘 하고 있던 건지. 이런 사람에게 가라고 레티샤에게 말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설득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가 아니라 영애를 설득하셔야죠.”
“아킬리즈 경.”
“저한테 말해봤자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할 생각도 없고. 그 말을 끝으로 에녹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따라 차 맛도 별로인 것 같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에녹을 향해 리비온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그 아이를 억지로 붙잡고 있습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나오는 말에 에녹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특히 ‘억지로’라는 말을 들은 순간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제가 정말 그분을 억지로 붙잡고 있다 생각합니까?”
“아킬리즈 경.”
“여기 있겠다 결정한 건 오로지 영애의 뜻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에녹은 레티샤가 이곳에 머물기를,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가 조금이나마 나아지길 바랐다. 하지만 제 바람보다 레티샤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레티샤가 오래 있을지도 모른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을 땐 기껍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의 뜻이라는 말에도 인정하기 싫은 건지, 아니면 부정하는 건지 리비온은 에녹에게 비난하는 것처럼 말했다.
“심성이 착해 마음이 쓰이는 건 두고 가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이곳에 있겠다 한들 동정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에녹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마주했다.
“그것 또한 영애의 뜻이니 강요하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그게 무슨…….”
“‘억지로’.”
일부러 ‘억지’에 힘을 주어 말했다는 걸 알아챈 리비온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킬리즈 경.”
“그런 이야기라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돌아가시죠.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니.”
에녹은 보란 듯이 리비온의 찻잔까지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음부턴 이렇게 연락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오는 일 자제하시죠.”
“그건……!”
“…….”
에녹이 잠깐 말을 멈춘 리비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친 순간 잿빛 눈동자가 겨울 하늘처럼 건조하면서도 서늘하게 빛났다.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아킬리즈 경.”
리비온은 입안을 잘게 씹으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감상하던 에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채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 에밀은 첫째 누나인 레티샤에게 항상 고마웠었다.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가끔 몸이 성치 않은 어머니를 돌보면서 동생들을 챙긴 사람은 다름 아닌 레티샤였으니까. 그럼에도 힘든 내색 한번 한 적 없는 제 첫째 누님이 대단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래, 한때는 그랬었다.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둘째 누나인 디아나, 그리고 저를 비롯한 동생들이 각성하기 시작하자 아직도 능력을 각성 못 한 레티샤가 부끄러워졌다. 도대체 각성이 뭐 그리 어렵다고. 무능한 레티샤가 리로이 가문의 수준을 낮추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후에 머리가 굵어지자 부끄럽다기보단 답답했다. 다들 능력을 각성해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데 레티샤 홀로 각성하지 못한 걸 보면 개인 의지가 없거나 구제불능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도 예전처럼 평범하게만 지내려는 모습이 참 한심했다. 첫째답게 오래전 어머니를 보살피던 것처럼 능력도 제일 먼저 갖추어서 동생들을 챙겨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내 아이린보다도 뒤처지다니. 이제는 불행을 불러온다는 능력으로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도 모자라 반성도 없이 재수 없는 아킬리즈 공작 가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가슴 속이 차게 내려앉았다.
‘수준 낮은 가문과 어울리더니 똑같이 수준이 낮아졌나. 아니면 똑같이 수준이 낮아서 어울리는 건가.’
한때 가족으로 얽혔었다는 사실조차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아킬리즈 저택에서 지낸다길래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던 모양입니다.”
에밀은 레티샤와 다정하게 서 있는 이엘과 이안을 보며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레티샤는 담담하게 에밀과 마주했다.
“그래. 나 이분들과 지내고 있어.”
“아버지가 저 가문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면서!”
에밀이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엘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아니, 저게 면전에 대고!”
금방이라도 끼어들려고 하자 이안이 가까스로 이엘을 말렸다. 곧이어 레티샤도 이엘의 앞을 막으며 에밀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에밀.”
“누님.”
“우리가 더 이상…….”
잠깐 말을 멈춘 레티샤가 에밀을 똑바로 마주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서로를 걱정할 사이는 아니잖니.”
“…….”
언젠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들은 적 있다. 그만큼 혈육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을 불러오는 능력이 있다는 헛소문 하나로, 재수 없다는 가문과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로 파문당한 지금, 저와 가족만큼 얄팍한 관계가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면서도 착잡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레티샤와 달리 에밀의 표정은 어딘가 삐딱해 보였다.
“그러게요. 제가 괜한 참견을 했군요.”
그 말을 끝으로 에밀은 차갑게 레티샤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끝까지 돌아보지 않는 매정함을 보였다. 그 뒷모습을 조용히 쳐다보는 순간 레티샤는 누군가의 품에 폭 안겼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입술을 꽉 깨물며 저를 끌어안은 이엘과 눈이 마주쳤다.
“아킬리즈 영애.”
“우리가 더 잘해줄 테니까 상처받지 말아요.”
“상처 안 받았어요.”
정말이었다. 상처라고 말하기엔 지금까지 받은 상처가 너무 많아서 이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 다만…….
“조금 허망해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이렇게 단번에 끊어질 수 있는 관계였다는 사실을 저만 몰라서 조금 서글픈 것뿐이었다. *** 그 날은 참 이상했다. 오랜만에 리로이 가문의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였다. 시녀가 차를 따라주는데 갑자기 찻잔이 절반으로 깨졌다. 그 순간 뜨거운 차가 테이블에 흘러 후작 부인의 드레스 자락으로 떨어졌다.
“앗, 뜨거워!”
“어머니, 괜찮으세요?”
그 바람에 후작 부인은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이게 무슨 일이람?”
“이거 어디 찻잔이지?”
“샹메리뇽에서 산 거예요. 나름 고급품인데.”
“고급품 좋아하네!”
다들 쯧쯧 한 소리하며 당장 샹메리뇽 찻잔을 다 갖다 버리고 다음부턴 다른 찻잔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이번엔 발을 헛디딘 디아나가 넘어져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어쩌다 넘어진 거냐? 크게 다치진 않았고?”
“분명 제대로 걸었는데…….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에요.”
걱정스럽게 타박하는 리로이 후작을 보며 디아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앞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마치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넘어지고 말았다. 놀라서 바닥에 손을 짚다가 그만 손목이 제대로 삐었다. 리로이 후작은 디아나에게 다음부턴 꼭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자리를 떠났다. 리로이 후작이 가자마자 자비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누님?”
“좀 욱신거리긴 해.”
“조심하시지. 다친 데를 또 다치면 어떡해요.”
“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디아나가 올려다보자 오히려 자비에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번에 첫째 누님 때문에 다쳤다고 했잖아요.”
“…….”
그 말에 디아나는 굳은 표정으로 다친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자비에의 말대로 레티샤 때문에 다친 척 붕대를 묶었던 그 손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