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제는 놓아야 할 때2021.07.15.
“그딴 거로 무슨 성공을 하겠다고.”
디아나는 제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레티샤는 방금 한 말이 진심인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이제는 안쓰럽고 불쌍할 지경이라 디아나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네가 각성하는 게 더 빠르겠다. 아니, 저거로 성공하는 게 더 빠르려나?”
어느 쪽이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어쩌면 어느 것 하나도 이루지 못하거나.
‘꼴을 보아하니 개고생만 하겠네.’
디아나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나 지금이나 주제 파악 못 하는 건 여전했다.
‘웃기지도 않아서 정말.’
그렇게 한참 레티샤를 못마땅하게 쳐다볼 때였다.
“누님, 가시죠.”
“하지만…….”
같이 서임식에 온 에밀이 디아나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괜히 누님까지 수준 떨어질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힐끗 쳐다보는 경멸 어린 시선과 멸시에 찬 어조에 레티샤는 손을 꽉 쥐었다. 옆에 서 있던 이엘이 눈을 치켜뜨고 에밀의 앞으로 다가섰다.
“뭐? 수준이 떨어져?”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서 이엘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그쪽이 더 수준 떨어진다는 생각은 못 하나 봐?”
“이엘.”
“저 새……. 아니, 저 사람이 말하는 것 봐.”
저 말을 듣고 어떻게 화를 안 낼 수가 있어. 이엘이 저를 말리는 이안을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안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소란피웠다간 좋을 거 없어.”
“하지만……!”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이를 가는 이엘을 부드럽게 저지하며 레티샤가 말했다.
“사과해.”
“뭐?”
“네가 말한 그 유치하고 조잡한 팔찌로 성공하면 아킬리즈 영애한테 사과하라고.”
“…….”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한 거잖아. 그리고 에밀.”
디아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던 레티샤의 시선이 느릿하게 에밀에게 돌아갔다.
“네가 더 수준 떨어지니까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있어.”
레티샤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말에 에밀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에밀이 레티샤의 말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디아나가 한발 빨랐다.
“좋아. 사과할게.”
흔쾌히 사과하겠다는 말에 놀란 것도 잠시, 바로 뒤이어 나온 말에 레티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근데 쫄딱 망하면?”
“뭐?”
“개망신당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마치 실패를 기정사실로 두고 하는 말에 레티샤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의기양양한 모습이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듯 보였다.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뭐, 별 건 없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 올린 디나아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방금 말한 대로 사과해.”
“그래, 좋아.”
“대신.”
“……?”
“무릎 꿇고 사과해.”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분위기에 이엘이 기가 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게 미쳤나.”
하지만 디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사과만 하고 끝나는 건 너무 재미없잖아.”
“…….”
그리고 보란 듯이 턱을 치켜드는 모습에 레티샤는 손을 꽉 쥐었다. 당연히 실패할 것이라는 태도에 화가 났지만 제가 무릎 꿇고 사과하는 걸 보고 싶다는 말에 어쩐지 착잡하기까지 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런 아이를 사랑했던 걸까. 레티샤는 살며시 두 눈을 내리깔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아껴주고 감싸주고 싶은 저와 다르게 제 여동생은 저의 초라하고 굴욕적인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게 서글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이제…….’
놓을 때가 된 건가. 나만 놓으면 끝나는 이런 관계를.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서 있던 레티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리로이 영애.”
“안 돼요. 하지 마요.”
이엘과 이안이 동시에 레티샤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레티샤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혹시 실패해서 디아나에게 사과하게 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덕분에 미련 없이 이 무의미한 가족의 연을 끊어낼 수 있었으니까. 더불어 가족의 연을 끊은 사람들에게 망설일 것도, 주저할 것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성공하면 네가 무릎 꿇고 사과해.”
“뭐? 내가 왜?”
내가 감히 왜 네 까짓거에 고개를 숙여야 하냐는 말투에 레티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야 공평하지.”
“…….”
“왜? 자신 없어?”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디아나가 사납게 실소를 터트리더니 삐딱하게 웃었다.
“자신이 없긴 누가 없어?”
같잖은 도발에 디아나가 보란 듯이 이죽거렸다.
“좋아. 어디 한번 열심히 해보라고. 어차피 결과는 뻔하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디아나는 에밀을 데리고 홱 소리 나게 돌아섰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레티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무모했나.’
막상 저지르고 보니 제가 이엘에게 폐를 끼친 건 아닌가 뒤늦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슬쩍 이엘의 눈치를 살피려는 찰나 따뜻한 품에 폭 안기고 말았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이엘이 레티샤를 꼭 끌어안은 채로 디아나와 에밀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니 누나 대하는 태도가 어쩜 저렇게 버릇없는지, 원.”
“아킬리즈 영애…….”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레티샤의 시선을 느낀 이엘이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요! 가족을 욕하려는 건 아니라…….”
“…….”
“……사실 리로이 영애 가족 욕한 거 맞아요.”
저렇게 구는데 어떻게 욕을 안 할 수가 있냐는 것처럼 변명 어린 시선에 레티샤가 살포시 웃어 보였다.
“고마워서 그래요.”
혼자 있기 싫은, 힘든 이 순간 함께 해주는 거로 모자라 이렇게 위로하듯 안아주는 이엘을 질책할 리 없었다. 레티샤가 고맙다는 뜻으로 더 활짝 웃어 보이자 이엘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렇게 예쁜 언니 누나를 두고 왜 저러는 거래요, 못된 것들.”
“아킬리즈 영애가 예뻐해 주니까 괜찮아요.”
“리로이 영애.”
어쩐지 묵직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엘이 레티샤를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자 이엘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버릇없는 동생 앞에 무릎 꿇는 일 없게 제가 열심히 할게요.”
“아킬리즈 영애…….”
“나 믿어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레티샤가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믿어요. 아킬리즈 영애라면 분명 잘할 거라는 거.”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말에 이엘은 어쩐지 마음속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이렇게 예쁘게 말하는 언니를 왜 그리 못살게 구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반드시 그것들 무릎 꿇게 할 거야.’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던 순간 이안이 레티샤의 앞으로 다가왔다.
“리로이 영애.”
“네?”
“방금 만난 남동생 말이에요.”
“아……. 에밀이요?”
“예. 언뜻 듣기론 황실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는데 맞아요?”
중요한 문제인 듯 이안은 재촉하듯 레티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에 레티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흐음…….”
“……?”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이안이 건조한 표정으로 제 턱을 쓸어 만지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없던 의욕도 생기게 하네.”
“……?”
어쩐지 음산하게 들려서 레티샤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앞으로 자주 얼굴 보고 지낼 사이인데 잘해봅시다.”
유독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기사 한 명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입단한 단원들과 서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던 순간, 기사는 불편한 기색으로 서 있는 에녹과 리비온을 발견했다. 바로 알아본 남자가 소리 내어 웃으며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갔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입단한 황실 기사단원 중 제일 기대되는 유망주들이라고.”
반갑다는 뜻으로 악수를 청하자 에녹도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다음엔 리비온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리비온은 그 손을 힐끗 쳐다보곤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노골적인 무시에 민망한 듯 멋쩍은 표정을 지은 남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두 분은 서로 아시나 봅니다.”
“얼굴 몇 번 본 게 다입니다.”
에녹이 딱 잘라 선을 긋자 옆에 서 있던 리비온이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다시 힐끗 에녹을 본 순간 리비온은 에녹의 시선이 향한 곳을 깨닫고는 굳어지고 말았다.
“…….”
표정은 서늘하면서도 담담했지만 레티샤를 쳐다보는 시선만큼은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할 수 있다면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다는 기색에 절로 이가 갈렸다. 아까도 보란 듯이 레티샤가 있는 곳에 한 번 갔다 오더니, 갔다 와서도 계속 레티샤 쪽을 연신 바라보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더 거슬리는 건 돌아갈 곳도 레티샤의 곁이라는 듯 고정된 시선이었다. 왠지 저 보란 듯이 하는 행동 같아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네가 뭔데.’
안 지 얼마나 됐다고. 리비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할 수 있다면 에녹의 앞을 가로막아 레티샤를 못 보게 하고 싶을 정도였다. 망설이지 않고 움직이려는 때였다. 이상하게도 레티샤와 그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뭐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낀 리비온이 레티샤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 찰나.
“죄송하지만 제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예, 조심히 가십시오. 아킬리즈 경.”
에녹은 짐짓 예의 있게 인사하곤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레티샤가 있는 곳이었다. . . .
“괜찮습니까? 무슨 일 없었습니까?”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다가온 에녹이 레티샤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단원들과 인사하는 자리는 다 끝나셨나요? 저는 별일 없었…….”
걱정할까 봐 아무 일 없었다고 이야기하려는데, 에녹이 눈동자를 치켜떴다. 그 순간 레티샤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계속 말했다.
“있긴 했는데 아킬리즈 영애와 영식이 같이 있어 줘서 괜찮아요.”
“…….”
“정말이에요. 진짜 괜찮아요.”
변명하듯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손을 내젓는 레티샤의 뒤로 이안이 이엘에게 말했다.
“아까 그 여자 말이야.”
“응?”
“네가 상대할 거야?”
무슨 말인지 잠시 못 알아들은 이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곧 디아나를 일컫는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씨익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그런 시건방진 사람 콧대 눌러주는 데에서 오는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흥분되는지 이엘이 활짝 웃자 이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럼 나는 그 남동생 쪽 상대하지, 뭐.
‘에밀 리로이라…….’
이안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이제는 멀어져 작아진 에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을 깔보는 사람을 상대하는 건 제게 무척 쉬운 일이었다.
‘수준 낮다고 욕한다면.’
제 수준을 높여서 감히 그딴 말을 하지 못하게끔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서로 디아나와 에밀을 상대하자고 암묵적으로 약속하고 있을 때였다.
“레티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제게 말하라고 하는 에녹에게 꼭 그러겠노라 대답하던 레티샤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언제 왔는지 리비온이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저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예전이라면 왜 그러냐며 감싸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끊어야 할 관계가.’
하나 더 있었구나. 레티샤에게 있어 리비온은 가족보다 가깝고 편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무의미하고 부질없는 관계였다. 둘 다 능력이 없을 때 서로 의지가 되던 사이였지만 리비온이 각성한 후에는 능력을 발현하지 못한 자신을 한심하게 보기 일쑤였고, 약혼자로서 존중해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레티샤는 사랑 없는 이 관계를 끝까지 우애와 도리를 가지고 지켜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지금까지 쌓아온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파혼을 언급하는 그의 태도였다. 그로 모자라 제 의사 따윈 상관없이 아킬리즈 저택에 찾아와 멋대로 데려가려 했던 행동까지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실 이미 오래전에 변한 관계였다. 그걸 알면서도 레티샤는 차마 놓을 수 없어 미련하게 혼자 그 얄팍한 끈을 잡고 있었다.
“가요.”
레티샤는 에녹의 소매를 꽉 쥐고 리비온의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
“…….”
“……!”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 놀란 듯 자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뜬 리비온과 시선이 부딪쳤다.
“레티샤!”
처절하게 찢어질 듯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뒤에서 강하게 꽂히는 선명한 시선.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가지 말라고, 이쪽으로 오라고 할 게 분명한 눈빛이. 하지만 레티샤는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하듯 리비온에게서 더 멀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