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멸문한 집안의 핏줄2021.09.09.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고. 아킬리즈 저택에 온 레티샤는 키에나를 떠올리며 입술을 매만졌다. 무엇 하나 믿을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참 수상한 사람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조심하는 게 좋겠지.’
이상하리만큼 저에 대해 잘 안다는 묘한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다. 특히 마지막에 헤어질 때 제대로 느꼈다.
[무슨 보답이 받고 싶은 건데요?]
되도록 제가 해줄 수 있는 보답을 해서 다시 만날 구실을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키에나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또 만날 테니까 나중에 말할래.]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볼일이 있다며 키에나가 돌아섰다.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아킬리즈 저택에 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은 석연치 않았다.
‘다시 만날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다지 좋은 만남도 아니었고. 하지만 왠지 계속 엮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언니!”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레티샤를 기다리고 있던 이엘이 빠르게 달려왔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어쩐지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덩달아 레티샤의 얼굴도 굳어졌다. 하지만 이엘은 대답 대신 레티샤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갔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거예요?”
“보시면 알 거예요.”
그 말에 레티샤는 초조한 표정으로 이엘을 올려다보다가 걸음을 빨리했다. 곧 응접실로 들어가자 이미 에녹과 이안이 와 있었다. 심각한 일인가 걱정되어 두 사람의 얼굴을 살펴볼 시간도 없이 이엘이 재촉했다.
“빨리 와서 이것 좀 봐요.”
“이건…….”
“드디어 핑크 다이아몬드가 나왔다고요!”
이엘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작은 상자 안에 담긴 걸 가리켰다. 코앞까지 들이대서야 보일 정도로 하찮은 크기였지만 확실히 최상급은 최상급인지 색깔만큼은 맑고 찬란했다.
‘이게 핑크 다이아몬드구나.’
레티샤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핑크 다이아몬드의 자태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작은 꽃씨를 보는 기분이었다. 홀린 듯이 바라보던 레티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쁘다…….”
“그쵸? 알맹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이엘은 말하면서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옆에서 이안이 진정하라고 해서야 비로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티샤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온 걸 보면 다음엔 더 예쁘고 큰 보석이 나올 거예요.”
“그러니깐요! 어휴, 광산 팔았어 봐. 이 조그만 알맹이도 못 봤을 거 아니냐고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지 이엘은 진저리를 치며 에녹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우리 나중에 부자 되는 거 아니야, 오빠?”
“호들갑 떨지 마.”
타박하는 어조와 다르게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레티샤가 흐뭇하게 쳐다보는 순간 에녹과 시선이 부딪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에녹이 레티샤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레티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런 두 사람을 바로 알아본 이엘과 이안은 두 사람 모르게 웃으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 나는 이만.”
“저도 곧 황실 공무원 시험이 있어서 공부하러 가보겠습니다.”
눈에 띄게 자리를 비켜주는 모양새에 레티샤가 붙잡을 새도 없이 이미 이엘과 이안은 응접실을 나간 뒤였다. 그 뒷모습을 허망하게 보던 레티샤는 제게 닿은 시선을 느끼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녹이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레티샤는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훈련은 안 힘들었어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정말요?”
그 말에 놀라서 레티샤가 빠르게 에녹의 몸을 살펴보았다.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닌가 걱정하는데 머리 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런데 잠깐만 안아주시면 안 됩니까?”
“네……?”
“힘내라는 의미로.”
별거 아니라는 듯 두 팔을 벌리는 모습에 레티샤는 잠시 머뭇거렸다. 제가 안아달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왜 얼굴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정작 장본인은 태연하게 웃고 있어서 어쩐지 괘씸하게 느껴졌다.
“아, 안 돼요.”
“어째서?”
“그건…….”
말하기 곤란해 한걸음 뒷걸음치려는 찰나, 손등 위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바로 고개를 내리자 제 손등을 감싼 커다란 손이 보였다. 놀라서 슬쩍 빼내려 했지만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얽혀 그대로 갇히고 말았다.
“왜 안 되는지 이유를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이상 놓아주지 않을 기색이라 레티샤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떨궜다.
‘부끄러워서 안 된다는 말을 어떻게 해!’
차마 그 말만은 할 수 없어서 입을 꾹 다물자 서운하다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저번엔 잘만 안아줬으면서.”
“제가 언제요!”
누가 들으면 항상 안아주는 줄 알 만한 말이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마자 저를 내려다보던 에녹과 정면으로 시선이 맞부딪쳤다. 에녹은 보는 사람까지 녹아내릴 것처럼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레티샤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시네요.”
“놀리지 마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섭섭한 목소리였으면서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느물거리기 시작했다. 레티샤는 에녹의 뺨을 가볍게 콕 찌르곤 핑크 다이아몬드로 시선을 돌렸다. 봐도 봐도 신기해서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핑크 다이아몬드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에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소원을 이루어준다’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보석. 그 값어치를 하는지 핑크 다이아몬드는 아주 작은 크기임에도 별처럼 반짝반짝 영롱하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가까운 사람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운세가 이렇게 맞아떨어지네.’
우연이겠지만. 옅은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레티샤가 에녹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핑크 다이아몬드가 또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큼지막하게.”
근 10년 동안이나 안 나왔다고 했으니 이제 소나기처럼 우수수 쏟아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간절하게 바라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에녹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렇게 될 거예요.”
레티샤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에녹의 손등을 감쌌다. 부디 아킬리즈 가문 사람들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고 또 바랐다.
*** 어느새 황실 공무원 1차 시험이 다가왔다. 시험장까지 따라온 레티샤는 애써 초조함을 억누르며 이안의 손을 꼭 쥐었다.
“누가 보면 누님이 시험 보러 온 줄 알겠어요.”
타박이라 하기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 말에 퍼뜩 놀란 레티샤가 올려다보자 이안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건 내가 할 말이에요, 이안.”
시험 보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제가 긴장하는 건지. 레티샤가 멋쩍게 웃으며 두 손을 매만지자 이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보시다시피 전 괜찮아요. 그저 생소해서 그래요.”
“네?”
말 그대로였다. 누군가 제가 걱정되어, 저를 응원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같이 와준 게 처음이라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전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에녹은 황실로 입궁해야 했고 이엘은 또 다른 사업에 돌입해서 이안은 저 혼자 시험장에 가겠구나 생각했다. 섭섭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충분히 저 혼자 갈 수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레티샤가 함께 해주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안.”
조용히 이름을 부르더니 천천히 이안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마주한 푸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흔들림 없이 올곧았다.
“열심히 하고 와요.”
“…….”
그 말에 이안은 입을 꾹 다물고 레티샤를 쳐다보았다. 레티샤는 잘 보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하고 오라고만 했다. 그 말이 마치 잘 못 봐도 괜찮으니 그저 최선을 다해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예, 열심히 하고 올게요.”
이안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레티샤의 손을 한 번 세게 잡더니 이내 시험장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어쩐지 시선이 제 뒤에 향해 있어서 레티샤는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
“…….”
에밀 리로이. 차갑게 굳어진 표정과 똑바로 마주한 순간 한숨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
“얼굴이 아주 폈네. 요즘 사업이 잘되나 보군.”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엘 후작이 말했다. 리로이 후작의 얼굴은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화색이 돌았다.
“평소와 똑같은데 사람 참 실없는 소리 하기는.”
짐짓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이미 입꼬리는 삐쭉 삐죽 올라간 뒤였다. 그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엘 후작이 슬쩍 흘리듯이 말했다.
“광부들에게 줄 임금이 밀렸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 제대로 챙겨준 지가 언젠데 그런 쓸데없는 말이 도나.”
리로이 후작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어쩐지 수상해서 엘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금이 없다는 말이 돌던데. 뭐 별일 아니겠지.’
잘 해결한 것 같으니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 없을 듯싶었다.
“그래, 자네가 아니라면 그만이지. 사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왜? 무슨 일 있었나?”
광부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랴, 광산 사업에 다시 매진하랴 정신없었던 리로이 후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곤란하다는 듯 잠시 눈살을 찌푸리던 엘 후작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멸문했다는 ‘에레보스’ 가문 말이야.”
“재수 없게 그 가문 이야기는 왜 해?”
“할 만하니까 하지.”
혹시 응접실에 다른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곤 엘 후작이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 가문 핏줄이 살아 있대.”
“뭐……?”
들으면서 믿기지 않아서 리로이 후작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안색이 점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지만 알아채지 못한 엘 후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요즘 그거 때문에 황실에서 난리도 아니야. 쉬쉬하려고 하는데 이미 눈치챈 사람도 몇몇 나왔고.”
“…….”
“아무튼 자네도 조심해. 황제파 귀족들에게 앙심을 품을 게 분명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차를 마시는 엘 후작과 다르게 리로이 후작은 다리까지 덜덜 떨렸다.
‘그 가문 자식이 살아 있다고?’
정말이지 땅에 묻어놨던 시체가 벌떡 일어났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불쾌한 소식이었다. 리로이 후작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나는 그만 가보는 게 좋겠어. 요즘 일이 계속 바빠서 말이네.”
“그래. 몸조심하고 다음에 또 보세나.”
누가 봐도 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모양새에 엘 후작은 의아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바로 일어나 응접실을 나가려던 리로이 후작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래서 누가 살아 있다는 건가? 딸? 아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 집안 자식들이 어디 한둘이었겠어.”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가문 핏줄이 어디선가 살아 있다는 사실뿐.
“일단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하지 않을까 싶은데. 원래 그 가문 사람들이 우리 집안과 다르게 육체파지 않았나.”
“그래……. 그렇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중얼거리던 리로이 후작은 다시 걸음을 옮겨 응접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엘 후작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제 턱을 매만졌다.
“흐음…….”
어딘가 영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