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행운, 그 자체였다는 걸2021.10.28.
“저번에 아가씨 뒤를 쫓아가는 사람을 본 적 있어요.”
혹시 리로이 가문 사람들의 수상한 행동을 본 적 있냐는 에녹의 질문에 메리가 대답했다. 그때는 그저 우연이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파문당한 레티샤를 굳이 왜 따라가나 의문이 들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나?”
“네. 셋째 도련님 밑에서만 일하는 직속 집사였어요.”
“셋째 도련님이라면…….”
“에밀 리로이 도련님이에요.”
메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귓가에 박혀 들려왔다.
[누가 소문을 냈는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엔 가족들이 그런 거 같아요.]
부디 아니길 바랐건만 레티샤의 짐작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에녹은 착잡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말해줘서 고마워.”
“혹시 그 소문을 낸 사람이 셋째 도련님인가요?”
메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바라는 대답이 따로 있어 보였지만 에녹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럴 확률이 높지.”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정황상 레티샤의 남동생인 에밀의 짓인 게 분명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에녹을 보며 메리는 쉽사리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제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레티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는 비장한 표정이었다. 두 손까지 꼭 모으는 모습에 에녹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도 레티샤를 아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처럼 챙겨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에녹은 나지막하게 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껏 보답 없이 건넨 레티샤의 선행을 고마워하지 않고 원수로 갚았으니 이제는 제가 직접 나서서 되돌려줄 차례였다.
***
“한 자루밖에 없는 검이라 한 분이 양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무기상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물러서길 바랐건만 레티샤와 자비에는 서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럼 돈을 더 얹어주면 되나?”
“예?”
“말해 봐. 원하는 만큼 줄 테니까.”
“그게…….”
액수는 얼마든지 상관없다는 자비에의 태도에 무기상은 슬쩍 레티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금방 자비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야 많이 얹어주시면 얹어주실수록 좋습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제가 먼저 집었는데.”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레티샤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이 또 틀린 건 아닌지라 무기상은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자비에가 레티샤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제발 주제 좀 아시죠.”
“뭐?”
“이 검을 들지도 못할 거면서.”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어조에 레티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선물하려고 고른 거야.”
“그 사람한테 이 검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누님이 선물할 사람이라면 수준이 뻔한데.”
너무 당연하게 깔보는 모습에 레티샤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저를 우습게 여기는 건 언제든지 참을 수 있어도 에녹을 무시하는 건 절대 넘어갈 수 없었다.
“적당히 해, 자비에 리로이. 너는 얼마나 잘났다고. 선 넘는 거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싫다면요?”
그래봤자 네가 뭘 할 수 있냐는, 아니 할 수 있는 게 있기라도 하냐는 듯한 말에 레티샤보다도 먼저 이엘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그쪽 집안은 가정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나 봐?”
“뭐라고?”
“귀 안 들려? 너희 집안 사람들 못 배운 것 같다고! 인성이 더러운 게 눈에 보인다니까?”
“지금 말 다 했나?”
“이것도 순화해서 말한 거거든?”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는 말만 하는지 이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저딴 가문에서 레티샤처럼 착한 사람이 태어났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미안하지만 그쪽하고는 말도 섞기 싫은데.”
미안하다는 말과 다르게 자비에의 표정은 불쾌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아직도 아킬리즈 가문이 재수 없다는 소문을 믿는 모습에 레티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바로 뭐라 말하려는 찰나 나무 문에 매달린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곳엔 낯익은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먼저 알아본 레티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나 여기 단골이야.”
레티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오히려 키에나가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곧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알아채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 분위기가 좀 그렇네?”
“그게…….”
뒤늦게 키에나를 발견한 무기상이 재빨리 다가와 상황을 설명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키에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공평하게 검술대회에서 이기는 사람이 사주기로 하자. 대회엔 내가 나갈게.”
“네?”
“조만간 제국에서 검술대회 여는 거 못 들었어?”
검술대회가 열린다는 말은 처음 들은 레티샤와 다르게 자비에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해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인데 꼴사나운 모습 보이지 말고 포기하시죠.”
마지막 배려라도 하는 것처럼 깔보는 시선에 레티샤보다도 키에나가 먼저 나섰다.
“자신 없나 봐요? 뭐, 그럴 수 있죠. 이해해요.”
다 안다는 듯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자비에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기회를 줘도 받아먹을 줄을 모르네.”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제 첫째 누님은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데 재주가 있었다. 자비에는 짧게 혀를 차며 무기상을 쳐다보고 말했다.
“무기상, 예약금 걸어 두고 갈 테니 조만간 보자고.”
이미 제 승리를 예견한 태도였다. 그 말을 끝으로 더 볼일 없다는 듯이 자비에는 레티샤를 스쳐 지나갔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노려보는 건 잊지 않고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자비에가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레티샤가 키에나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요?”
“뭐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자비에의 능력은 검술이에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을 키에나 혼자 모르는 것 같아서 말했다. 하지만 키에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 그래? 정말 큰일이네.”
놀란 표정과 다르게 말투는 어디 연극에 나가는 것처럼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이래 봬도 나 몸 쓰는 데 좀 자신 있거든.”
그러니 저만 믿으라며 제 가슴팍을 팡팡 쳤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린 레티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도와주시는 거예요?”
“내가 말 안 했나? 너한테 잘 보이고 싶다고.”
“…….”
너무 당연하게 하는 말에 입을 다문 것도 잠시, 키에나를 의심쩍게 쳐다보던 이엘이 레티샤의 곁에 바짝 붙어 물었다.
“친구예요?”
“응? 아냐. 친구가 아니라…….”
“앞으로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가 될 예정이지.”
자연스럽게 제 말허리를 자르는 키에나를 밀어내며 레티샤가 다시 말했다.
“그냥 조금 아는 사이야.”
“그렇게 말하면 옆에서 듣는 사람 좀 서운한데.”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다가가던 키에나가 천천히 레티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놓고 관찰하는 시선에 레티샤가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표정이 좋아졌네? 그 소문 꽤 오래갈 줄 알았는데.”
“설마 그쪽이 퍼뜨린 거예요?”
소문이라는 말에 이엘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레티샤를 뒤로 감췄다. 곧바로 적의를 감추지 않고 키에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런 헛소문이 계속 돌 리가 없잖아요! 오히려 언니 만나고서 좋은 일만 잔뜩 생겼는데.”
“그래……?”
“그럼요! 우리 언니가 아주 굴러 들어 온 호박, 아니 살아 숨 쉬는 복덩이라고요.”
“흐음…….”
“그러니까 사람 면전에 대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이엘이 레티샤를 보호하듯 소중하게 껴안았다. 그 모습이 마치 사나운 짐승에게서 제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새를 연상케 했다. 잔뜩 경계하는 이엘의 눈초리에 키에나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나는 쟤한테 잘 보이고 싶다니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상을 짓는 것도 잠시, 키에나의 시선이 레티샤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뭐가요?”
“너도 네 덕분에 좋은 일이 잔뜩 생겼다고 생각해?”
방금까지만 해도 장난스러웠던 태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바로 알아챈 레티샤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묻는 의도가 뭐예요?”
“궁금해서. 그리고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라.”
얼른 대답해보라는 것처럼 한 걸음 다가가기가 무섭게 이엘이 막아섰다.
“언니가 능력이 있든 없든 그런 게 왜 중요해요?”
“이엘.”
“우리 언니는 존재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이엘 또한 레티샤가 무슨 이유로 리로이 가문에서 제명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아껴주고 챙겨주며 상처를 덮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레티샤의 능력에 대해 떠들어대며 헤집으니 절로 속이 뒤집혔다.
“이런, 기분 상했나 보네.”
“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언니한테 친한 척하지 마요.”
“왜?”
“의도가 불순해 보여서요.”
“레티샤 도와주려고 검술대회까지 나가는데?”
“누가 나가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순수하게 돕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이엘과 다르게 키에나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였다. 쿠키를 팔 때부터 도움을 주는 것 같은데도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걸 굳이 숨기지도 않아서 마냥 믿기가 찝찝했다. 매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때면 고맙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어쩐지 노련해 보이기까지 해서 레티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마탑에서 한창 에레보스 가문에 대해 알아보던 세이오스는 우연히 오래된 서책 한 권을 발견했다. 서책에는 헬리오스 제국이 막 건국된 시기에 신에게 능력을 물려받은 세 가문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레티샤와 비슷한 일화가 있으려나.’
다른 동생들과 다르게 눈에 안 띄는 능력을 지녔을 가능성이 있었다. 세이오스는 지금도 레티샤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한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다.
‘행운을 주는 존재?’
「그 기운이 마치 햇살이 온몸을 감싼 듯 따스하면서도 포근했다. 간혹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 눈이 부셨다.」 저 자신에게는 행운을 불러올 수 없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행운을 퍼뜨리는 선한 능력.
‘태양이라……. 잠깐, 태양이라고?’
그 순간 오랜만에 리로이 후작을 만나러 갔던 날이 떠올랐다. 기억하기론 둘째 딸의 생일이라 리로이 후작이 첫째인 레티샤와 둘째인 디아나를 소개해주었다. 그때 분명 레티샤를 보고 찬란한 태양처럼 강렬한 기운을 느꼈었다. 디아나와 비교하여 느껴지는 기운이 남다른데 능력이 없다고 무시당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꼭 도와주고 싶었다.
“설마…….”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존재만 가질 수 있다는 능력, ‘행운’. 레티샤의 기운은 바로 ‘행운’,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