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바로잡는 법2021.12.23.
오랫동안 생각했다. 제 의지로 아카데미를 자퇴한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도움이나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알려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제 인생은, 제 목표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정하고 스스로 걸어야 한다는 걸.
‘레티샤 언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이린은 제 무릎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레티샤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애써 참아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건 바로잡아야 했다.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청탁은 금지인 거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황실 공무원 합격자 발표가 얼마 안 남았을 때 아이린은 베르너를 찾아갔다. 베르너는 아이린을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챘는지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청탁이 아니라 밀고하러 왔어요.”
“밀고라고?”
“제 오라버니에 관해서요.”
며칠 전 리로이 저택에서 에밀과 자비에가 비밀스럽게 나누던 이야기를 들었다. 목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레티샤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려고 작당한 건 분명했다.
“연을 끊었다 해도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에게도 그러는데 과연 제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줄까요?”
말하면서도 아이린은 그동안 퍼진 레티샤의 나쁜 소문도 어쩌면 에밀이 한 짓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아이린의 말에 베르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더니 알겠다며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그렇게 리로이 저택으로 돌아가던 아이린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제가 한 행동에 후회는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먼 길을 걸었지만 늦게라도 되돌아가야만 했다.
“도대체 왜 그런 건데?”
상념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에밀이 아이린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내가 요즘 너 안 챙겨줬다고 이러는 거야?”
“오라버니.”
“나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 얼굴은 어떻게 보려고 그런 짓을 한 거야?”
“…….”
“대답해, 아이린 리로이.”
에밀이 불합격한 이유에 아이린이 가담했으니 리로이 후작이 가만 안 둘 게 당연했다. 도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런 몰상식한 짓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쫓겨나기 전에 제 발로 나가려고요.”
“뭐?”
“외숙부 저택에서 지낼 거예요.”
아카데미에서 자퇴하겠다고 결심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리로이 후작 부인의 오빠인 외숙부에게 연락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엄격하고 귀족으로서의 품위만 챙기던 리로이 후작 부인과 달리 외숙부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더불어 아이린을 아껴주고 안쓰러워해 주던 사람이었다. 이미 서신을 주고받아 허락을 받은 터라 외숙부의 영지로 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에밀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삐딱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카데미는 어떻게 하고? 통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닐 텐데.”
“그건 오라버니가 신경 쓸 일 아니죠.”
“너 설마 진짜 자퇴했어?”
아이린이 자퇴한다는 말을 듣기야 했지만 에밀은 헛소문이라고 넘겼다. 제가 아는 아이린은 리로이 후작의 말을 신의 계시처럼 믿고 따랐던 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린은 에밀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시선에서 대답을 들은 에밀이 목소리를 높였다.
“미쳤어? 제정신이야?”
“오라버니야말로 지금 왜 이렇게 된 건지 스스로 돌아보고 정신 좀 차려요.”
“아이린 리로이!”
언제부터인가 아이린이 달라졌다는 걸 에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유순하고 연약해 보여도 제 밥그릇은 언제나 챙기는 걸 잘 알았기에. 그러나 지금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아버지가 아시면 어떻게 할…….”
“파문시키겠죠.”
“…….”
“파문시킨다면 어쩔 수 없죠.”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 넘쳤다.
“더 이상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려지고 싶지도 않고요.”
사실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를 비난하고 견제하는 가족들처럼 살 생각 없었다.
“아이린, 너…….”
“언니를 불길하게 생각하고 피해 다닌 저도 최악이지만 오라버니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에요. 쫓아낸 아버지나 쫓겨난 사람에게 헛소문 퍼뜨린 오라버니나 둘 다 똑같이 만만치 않게 최악이에요.”
“…….”
“그러니까 이제 오라버니도 정신 차리세요.”
이래도 정신 못 차리면 어쩔 수 없고. 아이린은 멍하게 저를 쳐다보는 에밀을 향해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방을 나갔다.
***
“장하다, 내 동생. 내 동생이 정말 황실 공무원이 되다니!”
아킬리즈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이엘은 이안의 어깨를 얼싸안고 떨어지지 않았다. 계속 달라붙는 이엘이 부담스러웠는지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밀어내지 않고 투덜대기만 했다.
“징그러우니까 좀 떨어져.”
“장하니까 그렇지.”
이안이 슬쩍 피하려고 하기만 하면 이엘은 더욱 바짝 붙으며 이안을 귀찮게 했다. 서로 투덕거리면서도 눈빛엔 애정이 가득 담겨 있는 게 보기 좋아 레티샤가 살며시 웃고 있을 때였다. 간신히 이엘을 떼어낸 이안이 천천히 레티샤에게 다가왔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가만히 앞에 서서 쳐다보기만 해서 레티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봐?”
“칭찬이요.”
지금껏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칭찬한 건 뭐로 들은 건지. 레티샤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이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칭찬해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안은 레티샤의 손길을 받아도 받아도 좋은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다음 타겟은 레티샤의 옆에 있는 에녹이었다. 이미 이안의 마음을 눈치챈 에녹은 조금 거칠게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하해주었다.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았어, 이안.”
“감사합니다, 형님.”
에녹에게 칭찬을 받는 게 쑥스러운지 이안의 고개가 살짝 내려갔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레티샤는 남몰래 웃었다. 어른스럽다가도 저렇게 사랑받고 싶은 걸 보면 어리긴 어리구나 싶었다. 그때 단란하게 서 있는 세 사람을 보던 이엘이 빠르게 끼어들며 말했다.
“나도 칭찬해줄게.”
“너는 됐어.”
“이게 누나한테!”
다시 한번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말려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아가씨, 서신이 왔어요.”
“나한테?”
“그게…….”
레티샤는 의아한 표정으로 메리가 건네는 서신을 보았다. 보낸 이가 누군지 확인한 순간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메리에게 부탁했다.
“괜찮다면 내 책상에 놓아줄래?”
“네, 아가씨.”
메리는 서신을 돌려받으며 레티샤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어깨 위로 작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어깨에 턱을 얹은 에녹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누구한테 온 겁니까?”
“비밀이에요.”
“저한테 비밀도 있습니까?”
서운하다는 말투에 레티샤가 잠시 탄식을 내뱉더니 손을 뻗어 에녹의 뺨을 매만졌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레티샤가 매만지는 게 좋은지 에녹은 보란 듯이 제 뺨을 갖다 대고 웃어 보였다. 애정행각을 벌이기 시작하자 두 사람을 보던 이엘과 이안이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레티샤가 에녹을 밀어냈을 땐 이미 쌍둥이들이 사라진 후였다.
“정말이지 틈만 나면.”
너무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해오는 에녹에게 넘어가는 제가 제일 문제였다.
“좋은데 그럼 어떡합니까?”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게 부끄러운 레티샤와 달리 에녹은 언제나 그렇듯 숨기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깨달았는데 그는 그럴 때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제 얼굴을 즐기곤 했다.
“자꾸 놀리기나 하고.”
“새삼.”
얄밉도록 예쁘게 웃는 에녹의 입술을 가볍게 꾹 누른 레티샤가 천천히 커다란 손을 잡아챘다.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산책하러 나가요.”
레티샤는 에녹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뒤에서 에녹이 그런 레티샤를 귀엽게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 . . 항상 낮에만 보러와서 몰랐는데 밤에 보는 화원도 느낌이 색달랐다. 분위기가 고요하고 잔잔한 게 마치 아무도 없는 호수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를 마음껏 둘러본 레티샤는 에녹과 나란히 벤치에 앉아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벌써 파티네요.”
레티샤는 등 뒤로 손을 짚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올 내일이 긴장되면서도 설레었다. 파티가 끝나면 아킬리즈 가문의 입지도 변하고 위상이 올라갈 게 분명했다.
‘나도 당당하게 옆에 설 자격이 있어야 할 텐데.’
에녹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더불어 저 자신이 떳떳해질 수 있는 위치에 서고 싶었다. 그때 에녹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에녹이 천천히 말했다.
“이것도 너무 빠릅니까?”
레티샤는 의아한 표정으로 에녹의 손에 놓인 반지 함을 내려다보았다. 반지 함에는 푸른색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결혼은 너무 이르다고 하시길래 약혼부터 하고 싶습니다만.”
에녹이 내민 건 다름 아닌 약혼반지였다. 반지에 박힌 블루 사파이어는 레티샤의 눈동자 색을 그대로 담았다. 마치 일부러 블루 사파이어로 준비한 것처럼 보였다. 바람에 살짝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그 아래 고요하게 반짝이는 잿빛 눈동자. 오로지 저만 담은 눈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표정은 담백하기 그지없으면서 귓가만 붉게 달아오른 게 보여 레티샤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레티샤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에녹이 반지를 집어 손가락에 끼워주려는 순간.
“안 돼요!”
“…….”
“아니, 저 그러니까. 제 말은…….”
거절의 의미로 들었는지 에녹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하지만 레티샤는 절대로 거절하려고 막은 게 아니었다.
“약혼이라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해주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한 순간 레티샤는 꾹꾹 억눌렀던 소유욕과 독점욕이 드러났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로가 연인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제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너무 커다랗게 자라 더 이상 숨기지 못할 정도였다.
[분명 우리 오빠 노리고 오는 귀족들도 있을 거라고요.]
[연인은 언니예요. 오빠가 결혼 생각할 상대도 언니밖에 없을 거고.]
며칠 전 이엘이 했던 말이 귓가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말을 떠올리자 다른 사람들이 에녹을 눈독 들인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 말을 어떻게 들었을지 걱정되어 레티샤가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곧 유쾌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반지 함을 닫은 에녹이 레티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내일 보여주기로 하죠.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과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은 정원에서 저를 향해 웃는 에녹의 모습에 레티샤는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왠지 제 욕심을 허락받은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찼다. *** 다음 날 아침. 파티 당일이 되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정신없었다. 하지만 어제 메리가 말한 서신이 마음에 걸려 레티샤는 책상에 놓인 서신을 확인했다.
“…….”
“언니, 빨리 드레스로 갈아입어야 해요.”
“알겠어. 곧 갈게.”
재촉하는 이엘의 목소리에 레티샤는 빠르게 서신을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늦었지만 저의 옳지 못한 행동들로 언니에게 상처 줘서 미안해요. 그동안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