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악의 하수인. 흑정령을 보스로 둔 던전인 블라디미르 납골당.
수많은 던전 중 한 곳이나, 이곳의 악명은 동 레벨대의 다른 던전과 비교하면 수어 배나 더 높았다.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받는 냉기 디버프에, 던전 몬스터들이 가진 각종 중복 가능한 저주들까지.
특히 흑정령이 사용하는 '흑암의 공포'는 최후의 최후까지 선전했던 수많은 유저들을 좌절시키기로 유명했다.
스킬 방어 아이템이 희귀한 루나틱에서 이 던전의 난이도는 천정부지로 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이 버림받는 게 자연스레 이어질 수순이어야 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납골당은 연일 사람으로 가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암흑의 결정.
보스 몬스터인 흑정령의 드롭템이자, 각종 아이템의 필수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추후 수많은 퀘스트와 아이템 제작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코어 아이템이기도 하다.
게다가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주어지는 업적. '명예로운 자' 칭호의 능력도 절대 빼놓을 수 없었다.
직접적인 스텟 보정은 없으나, 이 칭호는 각종 고위 퀘스트를 위한 필수 칭호다.
신전과 교단 관련 퀘스트, 각종 고위 NPC의 호감도에 대해 무조건적인 보정이 붙기 때문에, 이 던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 한 번만큼은 반드시 깨야 하는 것이다.
"4인 파티 모집 중입니다. 방패 전사, 신관 있습니다! 광역 딜러 직업, 그리고 단일 극딜러 한 분 오십쇼."
"3인 빠른 클리어! 광역 정화 가능한 신관 모십니다."
"3인 숙련 팟! 열 번 클리어 증명 가능한 신관 대기 중입니다!"
던전 입구를 제외하곤 발 디딜 틈 없는 납골당 주변.
한적한 숲을 배경으로 했으나, 매일 아침마다 이곳은 마치 시장 통을 방불케 했다.
웨인은 그중 빈자리를 찾아 돗자리를 폈다.
-띠링!
미리 사 온 개인 상점 팻말을 설치하고, 장비명을 기입했다.
-코볼트 세트 30개 판매합니다. 1세트당 20골드. 개별 부품대로 판매 불가.
-개인 상점을 개설합니다. 개설하시겠습니까? (Y/N)
"한다."
쿠웅!
커다란 북소리. 그것과 함께 웨인의 앞에 터치 가능한 홀로그램 팻말이 떠올랐다.
인기가 좋은 던전 입구에는 이런 식의 장사가 흔하다. 마을까지 가긴 귀찮으니, 바로 재충전을 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흐음……."
웨인은 장터를 펼쳐 놓고 끈기 있게 기다렸다.
처음엔 사람들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포션인 줄 알았던 사람들 몇이 다가왔다가 쳇 소리를 낼 뿐.
반응이 온 건 30분쯤 후였다. 지나가던 유저들 중 한두 명이 웨인의 좌판을 가리켰다.
"야, 저거 좀 봐라."
"저게 뭔데?"
"저거 인벤에 그 장비 같지 않냐?"
"인벤?"
"내가 말했잖아, 인천어부라고, 루저씨 1명 있단 거."
"아! 그럼 설마?"
두런두런.
입소문이 점점 퍼져 가는 걸 듣던 웨인. 그의 입꼬리가 보일락 말락 하게 올라갔다.
첫 손님이 말을 걸어온 건 잠시 후였다.
"저, 혹시 장비 좀 볼 수 있을까요?"
스윽.
웨인은 대답 대신 팻말을 가리켜 보였다.
1세트당 20골드.
20년 후엔 1골드당 1만 원이지만, 초창기인 지금 20골드는 무려 200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말을 걸었던 마법사 청년은 헉 소리를 내고선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같이 다니던 성기사 유저가 대뜸 인벤토리를 열었다.
-코볼트 세트 1개가 판매되었습니다.
-2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거래가 끝났다.
세트 아이템을 산 성기사 유저는 놀란 눈을 한 친구를 향해 피식 웃었다.
"이제 됐지?"
"어? 어."
"일단 내가 한번 껴 볼게, 내가 샀으니까."
웨인을 힐끗 본 성기사가 말했다.
"이게 동영상에서 나왔던 그 장비가 맞는지, 아니면 겉모습만 대충 비슷하게 만든 건지…… 어?"
갑작스레 그의 말이 끊겼다. 보고 있던 마법사 유저가 어깨에 손을 짚었다.
"뭔데?"
"이, 이거……."
"이게 뭐?"
"……진짜배기다, 이거 진짜배기야."
"뭐?"
"……저주 내성을 늘려 주는 세트 효과가 있어. 스텟 상승효과도 준수하고."
"헉!"
맨 처음 고민하던 마법사 유저의 안색이 변했다. 이게 진짜배기라면, 200이 아니라 그 2배라도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뭐 좋은 거라도 파나?"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다른 유저들 2~3명이 가까이 왔다.
"어디 좀 보자, 뭔데?"
"장비 아이템?"
던전 공략 파티가 결성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수십 분에서 수 시간. 그동안 파티원들은 어디 가지도 못하고 기다려야 한다.
지루함에 지친 그들에게 있어, 이건 충분히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좌판을 보던 구경꾼 중 1명이 입을 열었다.
"잠깐, 저 장비……."
"맞아, 인벤 화제 글에 나왔던 그 장비지?"
수군수군.
입소문은 금방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0만 원은 섣불리 쓰기 어려운 거금이다. 그 정도의 돈을 곧바로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에라, 모르겠다. 나도 하나 주쇼!"
"나, 나도!"
그리고 웨인에게 오는 무수한 거래의 요청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느새 좌판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당초 오늘은 10개만 만들어서 가져왔다. 어느 정도는 예정된 일이었다.
웨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유저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3개 남았습니다."
그사이에도 유저들은 계속해서 돈을 꺼내 들고 있었다.
잠시 후…….
-띠링!
-개인 상점의 모든 아이템이 판매되었습니다. 상점을 종료합니다.
-20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거래가 끝나자 웨인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는 시간이 곧 금이다.
다음 날.
오늘은 지친 몸을 쉬게 해 주는 하루다.
김민혁은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집 주변 조깅을 했다. 장기간 게임을 하려면 체력 유지는 필수였다.
운동 다음엔 청소와 식사, 빨래 등 밀린 집안일을 처리한다.
회귀 전의 경험 덕분일까. 김민혁은 루나틱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 처리가 신속했다.
덜덜덜. 세탁기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그는 천천히 컴퓨터를 켰다.
접속한 곳은 루나틱 공식 홈페이지와 각종 루나틱 관련 커뮤니티들이다.
'예상대로군.'
웹사이트를 보던 김민혁은 생각했다.
각종 사이트의 최상단. 유저 자유 주제나 실시간 화제 목록 중 찾던 것들이 보였다.
-코볼트 세트? 그게 뭔데?
-저주 내성 효과에 대해 araboza
-흑정령 던전 후기 코볼트 세트 ver
네 자릿수로 댓글이 달린, 실시간 화제인 게시 글들.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대번에 짐작이 갔다.
댓글 반응은 더욱 폭발적이었다.
-3중대장섹시가이 : 이거 영상 편집 조작한 거 아님? 개미쳤는데, 진짜.
-신화재림 : 주작 아닌 듯. 인천어부 님 1명이면 모르겠는데 코볼트 셋 사서 낀 사람들이 실제 있음.
-동찬동ppap : 코가 볼트 모양이여서 코볼트 ㅋㅋㅋ엌ㅋㅋㅋㅋ코볼트는 코코볼을 좋아함 ㅋㅋㅋㅋㅋㅋㅋㅋ
-재미슨정칸슈타인 : 아,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고요 ㅡㅡ
-동찬동ppap : 코볼트가 보트를 타면 코보오트 ㅋㅋㅋㅋㅋㅋㅋㅋㅋ코볼트계의 2인자면 콩볼트ㅋㅋㅋ 1인쟈면 캬볼트 캬
-하태핫해 : 솔직히 이건 좀 웃김ㅋㅋ
합성이나 조작일 거라며 열을 올리는 유저들이 대략 3분지 1. 그리고 아재 개그를 치며 관심을 끌려는 사람이 10분의 1.
나머지는 코볼트 세트 아이템의 능력치나 가격, 획득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어쨌든 코볼트 세트라는 아이템의 발굴이 핫한 이슈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락카락챠 : 개대박, 이거 나도 샀다. 던전 앞에서 어떤 사람이 팔더라.
-천마군단 : 뭐임?
-홍연비 : 이걸 팔았다고? 제작 가능한 거임?
전날 웨인에게 아이템을 산 사람들로 추정되는 댓글도 보였다.
-그락카락챠 : ㅇㅇ 어제 흑정령 열 번 잡음.
-홍연비 : 미친;;;
-엔젤로스 : 님 레벨이? 고렙 쩔 아니죠?
-그락카락챠 : ㄴ-저 어제 31이었다가 던전 돌면서 33 됨.
-다크흑염소 : 와,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사기 아이템이겠지.'
웨인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이건 원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아이템이다.
그 때문에 다른 것처럼 패치의 손길이 지날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노다지 중 하나였다.
잠시 댓글을 보는 사이, 코볼트 세트의 가성비에 대한 게시 글이 새로 올라와 있었다.
흥미가 생긴 웨인은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결론은 간단했다.
업적과 드롭 아이템을 포함했을 때, 20이 아니라 40골드에 팔아도 무조건 사는 게 이득이라는 것.
"더 볼 필요도 없겠군."
아마 지금쯤 던전 입구에선 그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누군가 내기하자고 한다면 할 수도 있었다.
"그럼 이제 슬슬 준비를 해 볼까?"
물론 그 준비란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낚아 올릴 준비다.
웨인은 가볍게 몸을 푼 뒤 루나틱에 접속했다. 마지막으로 접속 종료한 대장간 한복판에서, 그는 망치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