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전생에서, 그리고 방금 전 보았듯이 독구는 자존심과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순간의 감정 변화에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단점만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루나틱의 전설적인 궁수가 될 수 없었으리라.
"멈춰, 함정이다."
일행을 제지한 독구가 수십 초 만에 분석을 마쳤다.
"미세한 틈 외엔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 게다가 물리적인 뭔가로 발동하는 것도 아니고, 마력으로 공기 중에 지나가는 것도 감지하는 방식인 것 같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은 세심함.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물리적으로 발동하지 않으면 해제가 불가능할 텐데요."
지그문트가 물었다.
"아, 그건……."
뒤에 있던 웨인이 나서려 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마법 함정 해제용 시약'을 비싼 값에 사 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가 한발 빨랐다.
바로 피림이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있잖아요. 맡겨 주세요."
"할 수 있겠어, 피림?"
"못할 건 또 뭐람, 보고 있으세요."
앞으로 나선 피림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끝에서 푸른빛이 튀어나오더니 앞을 막고 있던 투명한 막에 부딪혔다.
10여 초 정도 흘렀을까. 빛이 사라진 순간 독구가 말했다.
"……역시 피림이군."
"……?"
"성공했어. 이제 가도 돼."
웨인은 저도 모르게 양미간 사이를 굳혔다.
'아니, 미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벌써 저 정도나 되는 수준의 마법 트랩을 해제한다고?'
웨인이 알기로 저 트랩을 해체하기 위해선 마나 마스터리가 최소 중급 5레벨 이상이어야 한다.
그 외에도 정밀 마나 제어라든가. 마법학 등의 스킬이 고르게 중급 이상이어야 하는 건 덤.
'괜히 대기업 길드 사이에서 날고뛴 게 아니구먼.'
물론 웨인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건 웨인이 회귀 전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일 뿐.
이 정도 성장 속도면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았다.
'게임 폐인은 아닌 거 같으니…… 재능충 그 자체로구먼.'
어찌 됐건 간에 좋은 건 돈이 굳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몇만 원이.
'흐흐.'
이걸로 할 수 있는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려 했다.
"너무 들뜨지 마시오."
명공이었다.
"아직 던전은 많이 남았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이제 중반이다. 벌써부터 긴장을 풀었다간 단숨에 전멸당하는 일도 있을 수 있었다.
맞는 말이기에 웨인은 재깍 사과하려 했다. 그 순간 명공이 씩 웃었다.
"그 의미가 아니오."
"……?"
"아직 저 정도로 감탄하기에는 이르단 뜻이니까."
"……?"
씩 웃은 명공이 앞서 나갔다.
그 말의 의미는 금방 드러났다.
조금 더 가자 다른 곳과 달리, 화려한 장식이 된 문이 앞을 막았다.
살짝 사이를 밀자, 일자 형태의 던전 룸 맞은편에 코끼리만 한 화염 정령이 있는 게 보였다.
"저놈이 바로 중간 보스인 대형 화염의 정령입니다."
"대형 화염의 정령이라…… 확실히 강해 보이는군."
이제껏 1마리만 기다리고 있던 던전 룸은 없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저 대형 정령은 전생에서 족히 50개가 넘는 고레벨 파티를 막아 낸 괴물이었다.
"제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저 정령은 공격받거나 공격할 때마다 표식을 남깁니다. 그 표식이 3개가 쌓이면 즉사급 데미지를 입으니 그 전에 옆에서 같이 쳐 표식을 없애는 게 관건입니다."
"그리고?"
"표식이 아예 없으면 정령에게 들어가는 피해가 90퍼센트 줄어드니, 최소한 표식 하나는 갖고 계십시오."
쉬운 일처럼 보이나 체력이 줄수록 정령의 공격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에 완벽한 팀워크가 없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넘지 못하는 난관이었다.
그러나 웨인은 이 상황을 대처할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 막 그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거 생각보다 쉬운 놈이군요. 자, 그럼 가 보자고."
"자, 잠깐."
웨인이 말릴 새도 없이 지그문트가 달려 나갔다.
버프 효과의 알림창이 뜨자마자 그 뒤를 따라 명공이 외쳤다.
"우오오오!"
야만의 포효를 내지른 명공이 도끼를 휘둘렀다.
부웅!
날아간 도끼가 거대 화염 정령의 머리에 틀어박히자 기다렸다는 듯 크리티컬 히트 알림이 올라왔다.
"엄호해! 어그로 핑퐁 기억하지? 세 번이야!"
같이 나간 지그문트가 대형 화염 정령의 공격을 막았다.
-띠링.
표식 1개가 뜬 순간 그가 스킬을 썼다.
"징벌의 검!"
쿠쿵!
하늘에 나타난 흰 빛의 검이 정령에게 내리꽂혔다.
이 던전의 속성은 불꽃과 어둠. 빛과 냉기 속성 공격에는 추가 데미지를 받게 된다.
"자, 잠깐만! 너무 빨라요!"
표식을 받을 필요가 없는 유니아가 뒤에서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그녀의 치유 성법은 효과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핑. 피잉. 핑!
지그문트의 HP가 죽기 직전까지 떨어지지만, 결코 죽지는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필요한 힐량을 정확히 알고 쓰고 있어. 그것도 감각적으로.'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선천적 재능.
그게 있기에 아까 지그문트가 그리 자신 있게 앞서 나간 것이리라.
쿠오오오오-!
얻어맞던 대형 화염의 정령에게서 검은 불꽃이 튀었다. 마지막 3페이즈에서 나오는 암흑 폭주 형태다.
"신이시여!"
"내가 적들의 피를 원한다!"
이에 맞서 지그문트와 명공도 각자 스킬을 썼다.
한순간 지그문트의 온몸을 빛이 덮었고, 명공의 주위에서는 붉은 오라가 피어올랐다.
"광화와 야성 폭발인가…… 저걸 벌써 익히다니."
둘 다 레어급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익힐 수 있는 스킬이다.
배우기 굉장히 까다로운 대신, 그 위력만큼은 확실하다는 평가.
그 말대로, 스킬을 쓴 둘은 몇 배의 공격 속도와 공격력으로 대형 화염의 정령을 공격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정령 쪽이 오히려 불쌍해질 정도였다.
"어드밴스 아이스 랜스!"
거기에 피림의 마법까지 꽂히자, 정령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화르륵!
크게 타오른 정령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두어 개의 전리품과 골드가 놓였다.
"다들 휴식!"
마무리를 마친 지그문트가 외쳤다.
첫 던전 발견 효과가 있기 때문에, 2개 모두 레어 아이템이 나왔다.
"나는 빠지지. 내 몫은 약속대로 저 친구에게 줘."
독구는 그 말과 함께 분배에서 빠졌다. 나머지 인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웨인에게 모였다.
이대로라면 전리품 경매의 3분의 1을 얻을 수 있다.
'첫 던전, 게다가 여기서 나오는 아이템은…….'
웨인은 순간적으로 망설였으나 곧 입을 열었다.
"저도 빠지겠습니다. 아이템은 네 분이서 필요한 데 적절히 배분하세요."
"빠지신다고요?"
"하지만 이 아이템들은……."
지그문트에 이어 피림까지 웨인을 만류했다.
그러나 웨인의 뜻은 확고했다.
"대신 골드로 주십시오."
"……아."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 나오더라도, 그것이 라이데른 후작령처럼 10배, 20배로 뛰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잠시 장승처럼 서 있던 지그문트.
그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역시 웨인 님답군요."
"……?"
"굳이 그렇게 생색 부리는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허, 참……."
"아니, 저는 한 것도 별로 없고, 또 돈이 더 필요해서일 뿐인데……."
"걱정 마십시오. 분배 금액은 확실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돈이 필요했을 뿐인데, 웨인은 입맛을 다셨다.
'왠지 쓸데없는 오해를 사 버린 것 같군.'
마나를 채우고 온 피림도 칭찬을 덧붙였다.
"저도 감탄했어요. 아까 함정도 그렇고, 보스 공략이나 그런 게 마치 던전을 속속들이 아는 분 같아요."
함정들부터 중간 보스까지, 패턴을 몰랐다면 몇 번이나 죽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웨인은 1인분 이상의 몫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웨인이 별거 아니라 말하려는 순간, 피림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는데, 설명하시는 게 저희 레이드 후기 올릴 때랑 비슷한 거 같아요. 그래서 더욱 이해하기 편했어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나도."
다른 셋도 이구동성으로 그렇다 대답했다.
웨인은 속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후우, 깜짝 놀랐네.'
비슷한 게 아니라 진짜로 거의 똑같았다.
사실상 웨인의 것은 문신사를 비롯해 조금 더 편하게 깰 수 있는 방법을 덧붙인 정도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로 웨인의 설명이 지그문트가 미래에 올린 후기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웨인은 가볍게 얼버무리며 생각했다.
'과연 지그문트 파티…… 개개인의 실력뿐 아니라 합까지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어.'
고전을 생각하고 많은 준비를 해 왔는데, 모두 헛수고가 된 느낌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물품이야 더 비싼 값에 팔면 되고, 또 이 던전을 깸으로써 얻는 이득은 그 수십, 아니 수백 배는 될 테니까.
***
던전의 후반부는 전반부보다 한층 어려웠다.
그러나 이 파티는 그 이상으로 강했다.
퍼엉! 펑!
피림의 아이스 포그가 땅을 덮고, 느려진 정령들에게 지그문트와 명공이 달려든다.
여러 축복을 받아 능력을 강화한 둘의 공세는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한 번 공격할 때마다 1마리씩.
던전 후반부의 강력한 정령들이 마치 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엄청나게 빠른 진행 속도.
하지만 그에 반해 일행은 별반 다친 곳이 없었다.
화염 저항력 25의 수치 덕에, 사실상 데미지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이 던전에서 지그문트 파티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문신이 있어 다행이에요."
유니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게 아니었으면 제 힐량이 따라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고."
"아니, 그건 아닐걸."
웨인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이 파티에게는 그만한 잠재력이 있었다.
파티의 앞길은 순탄했다.
가끔 던전 룸이나 함정이 가로막았지만, 모두 예상 범위 내였다.
그그긍.
보스 룸의 문 앞, 마지막 도르래를 내려 다릴 놓은 독구가 고갯짓을 했다.
이제 다리를 건너 보스 룸에만 가면 된다.
"여러분, 잠시만."
문을 열기 직전.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춰 세운 지그문트가 말했다.
"길이 여러 갈래군요."
그 말대로다. 다리 너머에는 보스 룸을 양옆으로 3개씩의 갈림길이 나 있었다.
여섯 군데를 슥 살핀 웨인이 설명했다.
"혹시……?"
"각 갈림길마다 1명씩 들어가야 합니다. 안에는 흑마법사와 스켈레톤 들이 있는데, 각자 1명씩 흑마법사를 죽이고 수정구를 깨야 합니다."
"수정구?"
"샐러맨더를 강화시켜 주는 버프 오라를 뿜고 있지요. 6중첩을 다 받는 샐러맨더는 프로메테우스 길드가 도전하더라도 답이 안 나올 겁니다."
만약 수정구를 깨지 못하고 죽으면 입구 대신 바로 이곳으로 소환된다.
어떤 의미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성공시켜야 하는 임무였다.
"하지만 흑마법사는 약한 놈도 70레벨이나 하는 고위 몬스터인데요? 60레벨까지는 어떻게든 잡아 보겠지만, 그 이상은……."
유니아가 울먹거렸다.
사실 보통 흑마법사들은 다들 그 정도 레벨이다.
거기다 각종 디버프와 상태 이상, 그리고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그들은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몬스터 중 하나였다.
그러나…….
"괜찮아. 아마 너나 나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걸."
웨인의 설명에 유니아는 물론 피림마저 놀란 토끼 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