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잘 가, 또 오고~."
"뭐야, 뭐야, 벌써 가?"
"브로치 고친 다음에는 우리랑 하루 종일 놀기다?"
"다음엔 사탕도 가져오면 좋겠어! 달콤한 왕사탕으로!"
요정들의 배웅을 뒤로 한 채.
잊힌 정원이라는 맵 알림이 떴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것을 먼저 깬 건 무혈사신 쪽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퀘스트는?"
"완료 처리됐습니다. 내용도 변경됐고요."
본래는 1명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던 퀘스트.
그러나 웨인이 무혈사신과 같이 완수하면서 시나리오에도 변화가 생겼다.
단독 수행이었던 무혈사신의 직업 퀘스트의 내용은 이제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요정계 여왕의 부탁은 사실 더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해당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를 도와 요정계의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그럼으로써 클래스 마스터의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퀘스트 내용의 변경. 현실을 구현하다 보니 종종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때는 큰일이 아니라면 루나틱의 AI들이 대신 퀘스트를 조정한다.
기본적인 문구부터, 뒤의 내용까지도.
"그렇게 됐군."
웨인은 기뻐하는 대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전투 직업인 무혈사신의 도움이 있다는 건, 당연히 그를 쓸 싸움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상도 그렇고 꽤나 어려운 일이 될 테지.'
아스티나 대륙의 콘텐츠라 해서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시나리오에 따라서 나타나는 적들의 레벨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장 브로치의 수리를 하는 건 아직 일러.'
무혈사신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지금 웨인에게는 따로 처리할 것들이 더 있었다.
'일단은 아까 들었던 것부터 캐물어야겠다.'
무혈사신의 입에서 작업장 소리가 나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관련된 사람들의 뼛속까지 빨아먹는 게 그들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잠깐만, 괜찮나?"
"예."
"같이 작업하자는 건 빈말이 아니야, 퀘스트 완료를 도와준 것도 그 때문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고개를 푹 숙이는 무혈사신. 하지만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전에 확실히 해 둘 게 있다."
"보상이야 나중에 줄 만큼 주십쇼. 형님이라면 뭐, 웬만한 거 떼먹진 않을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웨인은 눈을 크게 떴다.
천하의 무혈사신이 이렇게 어리바리하다니.
'하긴 아까 보니까 좀 호구 같긴 하더라.'
전생에선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대형 길드와 거리를 둔 게 아닐까 싶다.
웨인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아까 나한테 작업장이 아니냐고 말했던 것 때문에."
"그거면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저도 한때 그쪽 일을 했었거든요."
그 말을 들은 웨인은 적지 않게 놀랐다.
한때라는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거니까.
"지금은 아니야?"
"예. 얼마 전에 돈 다 갚고 나왔습니다."
"그거 잘됐군."
웨인은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형님도 작업장 경험 있으십니까?"
"나……는 아니고, 내 아는 사람이."
웨인은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대로 말해 봤자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회귀 전의 세상.
당장 자신도 직접 겪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럼 얼마 전에 나왔으니 그쪽 상황은 잘 알겠군. 요즘 작업장들은 어떠냐?"
"작업장들요? 난리도 아니죠."
프로그램을 이용한 작업이 불가능한 루나틱.
현거래 사이트나 관련 업자들은 자연스레 사람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몸 튼튼하지 않아도 되고, 접속만 가능하면 뭐든 시킬 수 있으니까요. 지금 사람 모으려고 산골짜기까지 뒤지고 있어요."
"꿀이 대놓고 흐르는데 어떻게든 빨리 빨아먹고 싶겠지."
코인으로 치자면 루나틱은 초창기 열풍 불 때의 라이버 코인이다. 폭발적인 성장에 망해도 최소한 두 배 이상의 이득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광받을 테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만 모아 등골을 뽑아내고, 정작 대가는 다 떼먹으면서 계속 빚을 지워, 벗어나지 못하게 하겠지.'
웨인이야 빚이 있었지만, 그게 아니던 사람도 많았다.
도시에서 편한 일 하겠다고 올라오던 시골 사람들.
대부분은 작업장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던 웨인이 울컥했다.
문스톤만 보아도 구토기가 치솟아 오르던 과거.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이번엔 다르다.'
웨인은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너희들이 버는 돈은 장비까지 빨아먹어 줄 테니까.'
요정의 정원을 나오며 웨인은 작업장들의 현 상황을 조금 더 들었다.
업자들이 너도나도 이 시장에 붙으려 하고 있으나, 아직까진 상황이 여의치 않은 듯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떻게 하면 돈을 뽑을 수 있는지에 대한 매뉴얼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거 외에 다른 쪽은 더 없고?"
"제가 나갈 땐 그랬어요, 뭐."
무혈사신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래, 꽤나 도움이 되었어."
이런 움직임은 공식 웹을 통해서 확인하기 힘들다.
무혈사신의 대답 덕분에 그 빈 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형님."
"음?"
"형님은 카이사 대륙 안 가십니까?"
"카이사?"
"예. 레벨 꽤나 높아 보이시는데. 제가 보기에 민혁 형님 정도 수준이면 길드들이 모셔 가려고 할 걸요?"
카이사 대륙 정기선 배편의 가격은 여전히 꽤나 비싸게 팔리는 중이다.
하지만 첫날보단 나아서, 이젠 가고자 한다면 못 갈 곳도 아니었다.
"혼자 가기 애매하면 유명 길드들에서 길드원 모집 중이니까……."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아 있어, 연락을 기다리는 것도 겸하고."
웨인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브로치 건은 더 진행시킬 수 없지만, 번개의 야금술은 다르다.
또 카이사 대륙에서는 베르한의 답장도 받지 못할 테고.
'이미 무혈사신을 찾긴 했지만…… 적어도 상황 설명은 하고 가는 게 맞겠지.'
다짜고짜 의뢰를 하겠다고 보냈다가 잠수한다?
가지고 있던 호감도 다 사라질 짓이다.
하지만 무혈사신은 그걸 다르게 받아들였다.
'역시나 대형 길드에서 진작 스카우트 제의를 했구나!'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그에게도 웨인의 능력은 심상치 않았다.
저 정도면 상위 랭킹 100위 안에 드는 대장장이.
아니, 어쩌면 데오마론에 필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레벨 특수 생산직은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다던데, 지금은 어디를 골라야 할지 생각하고 있겠지? 청와대2번방? 망치군주? 아니면 갤럭시같이…….'
청와대2번방과 망치군주는 길드 랭킹 100위 안에 드는 곳이다.
또 무혈사신이 가입 신청을 했다가 망신당한 길드이기도 했다.
'이 몸이 형님이라고 부를 만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히죽 웃는 무혈사신.
그 순간.
"참, 일단 이것부터 받아라."
"아? 아, 네."
"너 꽤나 허당이구먼, 일할 때는 그러지 마라."
-'무혈사신'에게 친구 신청을 했습니다.
-친구 요청을 수락합니다.
닉네임 위장 아이템이 있었기에 '김민혁'으로 표시되어 다행이었다.
"일을 하려면 계약서를 작성해야겠지. 일단 서식을 작성해서 나중에 다시 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 봐."
"네, 형님."
"그럼……."
웨인은 말을 마치고 핫도그를 풀었다.
불과 물 속성 내성은 얻었지만 아직 바람 속성 내성이 남았기 때문이다.
멍멍!
인벤토리에서 나온 핫도그가 혀를 내밀었다.
그때였다.
"형님, 펫 키우십니까?"
"그런데?"
"그거 잘됐다. 형님, 제가 아는 누나가 지금 펫숍을 하고 있는데 한번 오시죠."
"펫숍?"
"예. 필요한 거 있으면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그럼 잠깐 갔다가 오지, 뭐."
무혈사신을 따라간 곳은 정원 필드 근처 도시 안쪽.
인적 없는 골목을 몇 번 걸어 들어간 무혈사신이 목소리를 높이려 한 순간.
"잠깐만."
웨인이 손을 내밀어 앞을 막았다.
"저거 좋은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프렌들리 펫숍.
아기자기한 간판 아래에, 한눈에 보기에도 안 어울리는 떡대들이 서 있다.
"저 펫숍인데…… 지금 무슨 일 있나 보네."
"그, 그냥 다른 데 가자."
"그러자……."
오던 손님들의 대부분은 젊은 여자나 남자들.
하지만 입구를 막아선 험상궂은 유저들 때문에, 대부분이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웨인의 뒤쪽. 가게 방향을 보던 무혈사신이 이를 갈았다.
"저놈들이 또……."
"아는 애들이냐?"
"용마인력 길드의 블러드 플레이어들입니다. 깡패라고 보시면 됩니다."
용마인력.
현실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저 길드는, 말만 길드지 사실 현금 작업장 중 한 곳이었다.
"그럼 그 용마인력의 길드원들이 왜 저기서 영업 방해를 하고 있는데?"
"……펫 내놓고 나가라는 겁니다, 장사 방해하지 말고."
어딘가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다. 보고 있던 웨인이 물었다.
"저기가 네 누나가 한다던 그 가게냐?"
"예."
"니네 누나가 빚이라도 졌어? 아니면 뭐 잘못했거나?"
"절대 아닙니다! 양심적으로 영업하고, 펫들도 성능이랑 친화성이 좋아서 고객들에게 사랑받고 있었고요."
물론 그럴 것이다.
저 펫숍 브랜드의 로고는 미래에서 꽤나 유명한 한 랭킹 최상위 유저가 쓰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내가 저길 도와줄 이유는 안 되지.'
끼어들어서 이득이 된다면 모를까.
그때였다.
"저놈들, 프로메테우스랑 선만 안 닿았으면…… 아예 입도 뻥긋 못 하게 도륙을 낼 텐데."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용마인력의 회장이 얼마 전에 그쪽 사람이랑 계약을 맺었거든요. 지금 저러는 것도 프로메테우스 소속 테이머들한테 방해가 되니까 치워 버리려는 거고요."
"그래?"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웨인은 뒷말을 속으로 생각한 다음 펫숍으로 향했다.
입구를 막고 있던 용마인력 길드원들.
그들은 웨인이 문 앞까지 오는 걸 주의 깊게 살피더니만.
"아야."
웨인이 펫숍 문을 열려는 순간, 서로 시선을 교환한 1명이 대뜸 비명을 질렀다.
"부딪혔잖아!"
"똑바로 안 다녀?"
웅성거리며 무기를 꺼내 드는 남자들.
다음 순간 가장 선두에 있던 1명의 얼굴에 망치가 틀어박혔다.
퍼걱.
단말마도 못 지르고 바닥에 엎어진 길드원의 몸이 가루로 변했다.
남은 용마인력 길드원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 때, 웨인이 말했다.
"멍청한 놈들, 길거리에 대놓고 칭호 드러내 놓고 다니는 블러드 플레이어가 어디 있어?"
-명성치를 획득했습니다.
블러드 플레이어들에겐 현상금과 명성치가 걸려 있다, 게다가 잡는다고 명성치가 깎이지도 않고.
미래였다면 이 안에 일반 유저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웨인은 망설이지 않고 또 1명의 블러드 플레이어에게 망치를 휘둘렀다.
"커헉!"
험상궂은 인상과 근육질 몸, 그것만으로 영업이 되는 건 어디까지나 현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용마인력 길드원들의 레벨은 평균 60대.
웨인과는 아이템도, 레벨도, 심지어 스테이터스도 차이가 너무 났다.
-명성치를 획득했습니다.
-명성치를 획득했습니다.
총 11개의 명성치 알림.
일 처리를 마친 웨인은 바닥에 남은 귀 11개를 주워 들었다.
아직 놈들이 미숙했던 게 다행이었다.
타탓.
등 뒤에서 달려온 무혈사신이 외쳤다.
"형님, 놈들은 프로메테우스 길드랑 연관되어 있는데……."
"그래 봤자 블러드 플레이어지."
"……!"
"내가 더 세. 그게 끝이야."
무혈사신은 놀란 눈으로 웨인을 쳐다보다 말했다.
"과연 형님이십니다. 설마, 프로메테우스 길드에도 러브콜을……."
"아냐."
단숨에 부정한 웨인이 말했다.
"뭐, 다른 의미로 좋아하기는 하지."
호구를 좋아하지 않는 악덕업주는 없다.
전생의 김민혁은 그런 의미에서 사채업자들의 사랑을 너무 과하게 받았었다.
그때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펫숍 안에서 달려 나오던 여주인이 헉 소리를 내었다.
웨인은 손을 내밀었다.
"그때 도와주신 빚은 이걸로 갚지요, 아마란스 님."
"뉴비 아니셨어요? 저는……."
아마란스는 말도 제대로 못 잇고 제 입을 막았다.
뒤따라온 무혈사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는 사이십니까?"
'그건 내가 너한테 해야 할 질문인 것 같은데.'
웨인은 생각했다.
쿼드로플 마스터 무혈사신과 '비스트 마스터' 트리를 만든 비스트 마스터 아마란스.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건 전, 현생을 통틀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