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흔히 '꿀 사냥터'라 불리는 곳이 있다.
다른 곳에 비해 들를 가치가 높은 사냥터다.
폭풍 산등성이. 바츠 왕국 근방에 위치해 있는 이 필드도 그 꿀 사냥터 중 하나였다.
어째서 이곳이 꿀 사냥터인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크어어어!
거대한 덩치. 귀가 찌르르 울리는 포효.
이곳에서 젠되는 몬스터인 선더 리자드였다.
던전의 입구.
"다들 내성 포션 챙겼죠?"
"네, 파장님."
"여기."
"부족하면 말씀하세요."
폭풍 산등성이의 입구.
유저 4명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사냥 준비를 했다.
"씁, 아까워라."
포션을 보던 궁수 유저가 혀를 찼다.
"상급 번개 저항 포션이라니, 이 작은 게 50실버나 하잖아요."
"어쩔 수 없죠. 선더 다이아몬드가 여기서 가장 잘 나오니까."
선더 다이아몬드. 번개가 튀는 보석으로써, 사용하면 해당 장비에 번개 속성을 부여한다.
그 능력치는 번개 속성 보석 중 톱급.
해당 속성 자체가 PVP에서도 다양하게 쓰이는 건 덤이다.
"오늘 시세는 어때요?"
"별 차이 없네요. 경매장에서 개당 5.5골드 정도니까, 5골드에 팔면 맞을 거예요."
궁수 유저의 물음에 파티장이던 방패 전사가 대답했다.
1개를 얻었을 때 인당 배분 금액은 1.25골드.
현금으로 환전하면 9만 원가량이었다.
번개 저항 포션을 비롯해 들어간 비용을 제하더라도 꽤나 남는 장사인 셈이다.
"4개만 나와라, 1명씩 나누게. 제발."
간절히 기도하는 궁수 유저를 보던 창수 유저가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면 대박이죠."
"버프 체크됐으니 슬슬 포션 들어가죠."
"네."
슥.
네 파티원 모두 시간 맞춰 포션을 꺼냈다.
막 포션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야!"
-사자후를 들었습니다.
-상태 이상 스턴에 걸렸습니다.
-행동이 취소됩니다.
"커헉!"
"컥!"
파티 인원 모두가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번개 내성 효과도 당연히 받지 못했다.
"으윽……."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열댓 명의 남녀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 위에 붉은 닉네임을 드러낸 상태.
블러드 플레이어다. 파티장이던 방패 전사가 이를 악물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 남들 사냥하려는 데 왜 방해야!"
"방해는 당신네들이 했지.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사냥질이야, 사냥질은."
"여긴 우리 혈십자 길드가 지금 사냥 중인 거 몰라? 어? 먼저 침까지 발라 놓은데 온 건 너희들이라고!"
스르릉.
10여 명의 블러드 플레이어가 무기를 들었다. 이미 작정하고 온 듯, PVP 세팅까지 확실히 해 둔 상태였다.
꿀꺽.
파티원이 전부 입을 다문 가운데 방패 전사가 물었다.
"당신들, 원하는 게 뭐요?"
"흠, 이쪽은 말이 좀 통하네. 간단해."
건들거리던 블러드 플레이어들이 덧붙였다.
"남의 땅에서 뭐 하려면 이용료를 내야지? 원래 안 되는 건데, 입장료만 좀 내면 들어가게 해 줄게."
"입장료?"
"명당 1골드."
"미친!"
파티원 4명 모두 일제히 소리쳤다.
저대로 내면 포션값 50실버에 입장료 1골드. 도합 6골드를 경비로 써야 한다.
하루에 드롭되는 보석은 평균 1~2개. 이 정도면 벌이는 고사하고 손해만 보고 나올 판이다. 블러드 플레이어가 덧붙였다.
"경험치랑 기타 잡템 생각하면 우리가 손해지. 이것도 내가 진짜 착해서 이러는 거고. 그렇지?"
"프흐흐."
"그럼그럼."
"하지만 이건……."
"어흥!"
"히익!"
스르릉.
무기를 들어 올리는 블러드 플레이어들.
금방이라도 PK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결국 방패 전사가 두 손을 들었다.
"알았습니다. 안 들어갈 테니 오늘은 보내 주십쇼."
"안 들어간다고? 좋아."
블러드 플레이어들이 한 발짝씩 물러났다.
파티원 유저들이 살짝 마음을 놓은 순간.
푸욱!
일제히 날아온 원거리 스킬들이 그 자리를 덮쳤다. 효과가 사라진 자리엔 골드와 아이템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럼 우리 인건비는 주고 가야지."
"킬킬."
슥.
장비를 챙긴 블러드 플레이어들은 다시 수풀 속으로 숨었다.
그날 저녁.
"수금 금액 보고하겠습니다."
혈십자 길드의 아지트.
각 지역에서 모인 행동 대장들이 문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폭풍 산등성이에선 총 514골드입니다."
"카일로 성에선 총 288골드입니다."
보고를 들은 길드 마스터, 가바허트는 껄껄 웃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봐라, 운영진은 이런 거 제재 안 한다니깐."
게임 내부의 일은 게임 내에서, 운영진은 그 원칙에 따라 이런 문제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사냥터 통제, 전문적인 PK.
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상황은 블러드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총 얼마 벌었지?"
"금일 수익은 12,482골드입니다. 4대 길드에 바치는 상납금 2천 골드를 제외하고, 또 관련 경비를 처리하고 남은 순수익이 총 7,163골드입니다."
"좋아, 아주 좋아."
고개를 끄덕이던 가바허트가 물었다.
"혹시 4대 길드나 6대 중형 길드 쪽 길드원을 건드리진 않았고?"
"그러진 않았습니다, 작업 들어가기 전에 몇 번이고 강조한 사항이라서."
"잘했어. 하던 대로 30퍼센트씩 주고 나머지는 길드 창고에 넣어 둬라."
"예."
중견 길드라 해도 여러 기업이나 단체의 스폰이 잦다. 그런 곳이 작정하고 덤비면 혈십자 길드라 해도 답이 없었다.
"그럼 그 부분은 계속 애들한테 일러 둬. 4대 길드랑 6대 중형. 밥그릇 깨고 싶으면 건드리라고."
"알겠슴다."
행동 대장들이 어눌한 목소리로 재창했다.
"참, 그리고 보고드릴 게 하나 더……."
"뭔데? 말해 봐."
"저번에 블러디 핸즈 길드 조지라고 한 부분 말인데요. 그 길드 마스터인 베르한이 항복 선언을 해 왔습니다."
"캐릭터 삭제한대냐?"
"그건 안 되고, 대신 다른 걸 줄 수 있다고……."
"이거 웃기는군. 그쪽 사정을 뻔히 아는데, 줄 게 뭐가 있다고?"
현금이라도 들이붓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럴 돈이 있다면 진작 사용했을 것이다.
가바허트는 가차 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부하의 말은 전혀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듣기로는 그…… 김민혁과 연줄이 있다고 합니다. 자길 살려 주면 그 사람에게 소개를 시켜 주겠다고."
데오마론의 패배 소식은 루나틱 전체의 화제였다.
그 당사자의 이름이 나오자 가바허트의 양미간 사이에 주름이 졌다.
"별 같잖은 소리를 다 듣겠군. 됐다고……."
"허트야, 잠깐만."
혈십자 길드 행동 대장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던 남자 1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젤피뎀.
블러드 플레이어들 사이에 있는 흰 닉네임은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어? 어…… 응."
둘만 있는 곳으로 허트를 데려온 남자가 말했다.
"이거 한번 접촉해 봐."
"예?"
"어차피 이 새끼 다 말라죽어 간다며. 구라 쳐서 뭐 할 건데."
혈십자 길드는 이미 뒷세계의 반 이상을 먹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아니면 아닌 대로 치고 맞으면 그것대로 좋은 상황인 것이다.
특히 젤피뎀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미라클 길드원이라고는 하나 평길드원일 뿐인 상황.
아직 입지가 불안한 그에게 이건 하늘이 내려 준 기회 그 자체였다.
'진짜 김민혁이 나오면 보통 일이 아니야. 어쩌면 그분들에게 인정받아 간부급이 될 수 있을지도…….'
"형님, 근데 이거 좀 위험해요. 냄새가……."
"나 갈까?"
"……."
가바허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젤피뎀이 가면 그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 팬티 바람이 되기 때문이다.
혈십자 길드의 마스터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길드가 블러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세를 뻗친 것도 순전히 젤피뎀 덕분.
이미 가바허트는 젤피뎀의 말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와 있었다.
"메시지 보내서 접선시키고, 확인하자. 허트…… 아니, 민수야."
"알겠습니다, 형님."
"그래, 잘해라."
탁탁.
어깨를 살짝 두들긴 젤피뎀이 방을 나갔다.
애초에 회의가 끝났기에 돌아갈 것도 없었다.
잠시 후.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알았어."
왕실 공방 안. 장비를 만들던 웨인은 베르한에게 대답했다.
"만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진짜 사장이 나오면 그때 만나 준다고 해."
"네."
메시지를 보낸 베르한이 물었다.
"놈들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어서 죄송합니다. 기껏 의뢰를 맡겼는데."
"됐어. 신경 쓰지 마라."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 베르한의 조직은 궤멸에 가까운 상태다.
애초에 그럴 것이라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만난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생각해 둔 계책이 있다."
웨인은 베르한에게 자신이 생각한 계책을 알려 주었다.
얘기를 듣던 베르한이 놀라 말했다.
"그 정도라면 분명 놈들도 예상치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긴 한 겁니까?"
"가능해."
웨인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말한 건 미래, 다른 사람이 혈십자 길드를 상대로 실제 크게 피해를 입힌 사건이기 때문이다.
***
"왔군."
바네시아 시 외곽의 술집.
김민혁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쏠리는 시선을 느꼈다.
'NPC마저도 없고…… 전부 블러드 플레이어군.'
술집을 통째로 빌렸거나, NPC들을 죽였을 것이다. 약속 장소를 잡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김민혁은 스읍 하는 소리를 낸 다음 말했다.
"길마는 어디 있지?"
"진짜 김민혁이로군."
"설마, 진짜로 데려올 줄이야."
대기 중이던 길드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들어갈 수 없소."
"그 정도면 충분하오."
옆에 있던 베르한이 말했다.
현재 둘은 일자리 알선 업자와 의뢰인의 관계로 위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유저들은 그다지 신용이 가지 않는데."
"나를 믿으시오. 적어도 배신은 하지 않을 거요."
"흠……."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업자와 의뢰인 관계.
김민혁은 약간 망설이는 듯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어디 있지?"
"이쪽으로."
블러드 플레이어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걸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김민혁은 자신이 바네시아 시의 도둑 길드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설마, 진짜로 김민혁을 데려올 줄이야……."
"이거 거절했으면 난리 날 뻔했군. 환영합니다, 김민혁 씨."
안내된 테이블엔 두 남자가 있었다. 1명은 마른 체형의 마법사, 다른 1명은 스 x워즈의 자 x 헛을 연상시키는 두툼한 남자였다.
띠링.
웨인이 가까이 가자 둘 모두 닉네임을 드러냈다.
젤피뎀이란 닉네임의 마법사가 가바허트에게 말했다.
"넌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예……."
드르륵.
가바허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닫는 소리가 울려 퍼진 뒤에야 젤피뎀은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요, 김민혁 씨. 젤피뎀입니다."
"미라클의 젤피뎀?"
"김민혁 씨가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젤피뎀은 간부를 대하듯 깍듯이 맞이했다.
그가 미라클 소속이라 하나 기껏해야 일반 길드원.
급으로 따지면 데오마론을 이긴 김민혁이 높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베르한 씨가 믿을 수 있는 곳이라 해서 소개를 받았는데, 과연 당신을 보니 그 이유가 납득이 가는군."
"감히 미라클을 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말끝이 살짝 떨려 나온다. 그 사실을 캐치한 김민혁은 미미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그럼……."
막 젤피뎀이 입을 열려던 찰나, 김민혁은 그것을 끊고 먼저 얘기했다.
"로드릭의 제자 김민혁이다. 제안이 있어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