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며칠 후.
혈십자 길드 인원들의 정보가 웨인의 손에 들어왔다.
"이거 생각보다 인원수가 많은데?"
신청자의 수는 대략 1,200여 명.
이 정도면 혈십자 길드원 전원이 의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하지만 유니크 아이템을 의뢰한 건 젤피뎀을 비롯한 극히 일부였다.
나머지 99%는 대부분 레어 아이템 주문이었다.
펄럭.
계속해서 종이를 넘기던 웨인은 혀를 내둘렀다.
"없어서 모인 놈들끼리 더해요."
-죽일 때마다 상대의 레벨을 흡수하는…….
-공격력의 999배만큼 방어력 무시한 데미지를 넣게…….
있지도 않은 기능들을 넣어 달라는 요청이 한가득했다.
"20년 후에도 없는 기능들을 내가 무슨 수로 넣어 줘?"
짧게 욕설을 내뱉은 웨인은 문건들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곧장 아키러스시 도둑 길드에 간 그는, 암거래 상인들에게 가서 말했다.
"장난꾸러기 임프 봉인구를 사고 싶은데."
"임프 봉인구? 개당 1실버요."
"1,500개 줘."
"1,500개?"
암거래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족하면 다른 곳에서 사지."
"아니, 물량이야 많소."
"그럼 깎아 줘."
15골드밖에 안 하지만, 웨인은 그 와중에 1골드를 더 깎았다.
막 아이템을 챙기던 찰나 암거래상이 물었다.
"대체 누구한테 원한이 있기에 그러는 거요?"
"원한?"
"그게 아니라면 임프 봉인구를 그렇게 많이 살 리가 없지 않소?"
-암거래상 '볼프'의 호감도가 -10 하락합니다.
-암거래상 볼프가 당신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메시지를 보던 웨인이 말했다.
"알 것 없다."
-<장난꾸러기 임프 봉인구> 1,500개를 구매합니다.
-총 14골드입니다.
-구매하시겠습니까? (Y/N)
"구매한다."
미련 없이 봉인구를 구매한 웨인은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개인 공방 시설도 괜찮지만, 왕실 대장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이 기능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중앙 용광로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대형 작업틀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생산 효율을 높여 주고, 한 번에 여러 개의 작업물을 같이 만들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사용료를 내야 하지만 강철의 손은 해당 비용이 면제다. 웨인은 Y를 누르며 망치를 들었다.
카앙! 카앙!
왕실 대장간에 모처럼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우."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한 번에 5~6개씩 쏟아져 나오는 장비 아이템.
전문 생산 시설의 힘이다.
망치를 두들기던 웨인.
제작 완료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말했다.
"이 정도면 됐군."
<혈십자 대검>
-등급 : 크래프트-레어
-분류 : 무기
-내구도 : 350/350
-제한 : 혈십자 길드원만이 착용 가능
-효과 : 공격력 +75, 스킬 공격력 +10%, 피격된 상대방의 방어력 감소. 피격된 상대방에게 일정 확률로 '공포' 상태 이상 부여.
-기타 : 1012호 제작 작업품.
댕그랑.
붉은 십자 무늬가 그려진 대검 한 자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크래프트-레어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레어 아이템 이상의 성능이다.
유니크도 상황은 마찬가지.
나으면 나았지, 일반 유니크보다 못한 장비는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이걸 받은 혈십자 길드원들의 스펙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일반 유저들의 고통은 그만큼 늘어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럼 이제 봉인구를 쓸 때지."
웨인은 임프 봉인구를 꺼내 든 채 스킬 창을 켰다.
부가.
보석이나 장식을 추가 장착하는 데 쓰이는 스킬이다.
'꽤나 숙련도가 오르겠군.'
제작이나 제련만큼 중요한 스킬은 아니다.
하지만 아예 필요 없는 스킬은 또 아니었다.
추후 고급 보석이나 젬스톤 등이 늘어날 때, 이 스킬의 유용성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재료 창에 장난꾸러기 임프 봉인구를 올려놓자…….
-<혈십자 대검>에 <장난꾸러기 임프 봉인구>를 부가하시겠습니까? (Y/N)
알림창을 확인한 웨인은 주저 없이 Y를 눌렀다.
나머지 1,200여 개의 장비에도 마찬가지였다.
-부가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부가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대성공! 부가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메시지가 나오는 사이 웨인은 홈페이지에 혈십자 길드를 검색했다.
우르르.
검색어를 넣자마자 수많은 정보들이 떴다.
-혈십자 PK.
-혈십자 신고.
연관 검색어들을 보던 웨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가관이군.'
각종 이유 없는 PK와 아이템 도둑질.
거기다 인신모독, 시체 능욕까지 해 대며 어그로를 끄는 모습들이 찍혀 있었다.
웨인은 그중 몇 개의 링크를 모은 뒤 황우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민혁 :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황우진 : 사냥입니까?
띠리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대답이 왔다.
-황우진 : 시켜만 주십쇼. 오늘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하이브 비 사냥 이후, 황우진은 무엇이든지 김민혁이 시키면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강철의 손과 관련된 일을 들은 다음엔 더욱 그랬다.
'분명 왕국에서 큰 의뢰를 했을 거야!'
잘만 하면 큰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던 황우진에게 김민혁이 본론을 꺼냈다.
-김민혁 : 아니, 글 좀 써 줬으면 해서.
-황우진 : 네?
순간적으로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황우진.
그러나 김민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김민혁 : 자료는 내가 보내 주지. 고풍스럽게, 그러면서도 요점만 딱 잡아서 써 줘 봐. 귀족 NPC용으로.
-황우진 : 네?
황우진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그렇지만 이미 한배를 타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빠르군요."
수일 후, 다시 만난 젤피뎀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인벤토리는 충분히 준비해 왔겠지?"
"여기 있습니다."
"좋아."
달그락.
1,200개의 아이템을 받은 젤피뎀의 외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붉은 십자 모양이 수놓인 검은 마법사형 로브.
그 아래로 보이는 건 희한하게도 전사용 갑옷이다.
"나머지 잔금은?"
"여기, 레어 개당 30골드, 유니크 개당 700골드씩 쳐서…… 총 39,800골드입니다."
레어 아이템 1,200개가 36,000골드.
거기다 700골드씩 하는 유니크 아이템이 6개다.
본래는 세트 아이템을 만들려 했으나, 자본금이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
'엄청나군.'
루나틱은 1천만 명이 모여 하는 가상현실 게임.
그 뒷세계를 잡은 길드라면 이 정도 자본이 있는 건 당연했다.
'작업장 여러 곳을 돌리니 그렇겠지.'
웨인은 아이템을 확인한 뒤 말했다.
"그리고 그쪽 건."
"여기 있습니다. 3,500골드."
혈십자 길드와 별개로 젤피뎀도 자신의 아이템을 의뢰했다.
-거래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알림창을 바라보던 웨인이 Y를 눌렀다.
'이 정도면 기둥뿌리까지 긁어 왔겠군.'
"어떻습니까? 검은돈은 이 정도쯤 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굉장하군."
"그 돈 때문에 다들 이쪽 일을 하곤 하죠."
굉장하단 건 솔직한 소감이었다. 젤피뎀이 대답했다.
"그럼 적절한 일 생기면 또 연락하도록."
"예."
척.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젤피뎀.
그러나 김민혁이 사라진 후,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메시지 창을 켰다.
-젤피뎀 : 출발해.
-헷지호쏜 : 네.
-예미르 : 네.
파팟.
미리 은신 중이던 블러드 플레이어들이 움직였다.
홀로 남은 젤피뎀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력도 하나 없는 주제에 블러드 플레이어들에게 순순히 오다니, 완전히 꿩 먹고 알 먹기로군."
약점이 있으면 좋지만, 그게 아니라도 거점만 잡으면 두고두고 이용해 먹을 수 있다.
대장장이 비공식 랭킹 1위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면, 그 이득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어쩌면 미라클에서 나와서 제5의 길드가 될 수도…….'
"크크."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젤피뎀.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수많은 대기업 길드에게 '갑질'을 하는 자신이 그려지고 있었다.
***
장비를 받은 다음 날.
혈십자 길드원들은 자신 있게 영업을 나섰다.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히 닉네임을 드러낸 모습.
평소 쥐처럼 숨어 다니던 것과는 딴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려 대장장이 공식, 비공식 통합 랭킹 1위.
'김민혁'이 만든 장비를 착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어 등급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혈십자 길드원들은 자신만만하게 처음 온 유저들에게 작업을 걸었다.
그런데…….
"이 새끼가…… 뭐야!"
반항하는 유저에게 칼을 휘두르던 길드원이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갑자기 눈앞에 사람 머리통만 한 삐에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히히! 우히히히!
"으억!"
-'경직' 상태 이상을 획득했습니다.
-'공포' 상태 이상을 획득했습니다.
상태 이상을 겪는 건 다른 혈십자 길드원도 마찬가지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일반 유저들이 스킬을 사용했다.
-파티원 '킬로그'가 사망했습니다.
-파티원 '느 x x포비아'가 사망했습니다.
고인물 블러드 플레이어인 그들에게, 한 번의 죽음은 곧 캐릭터의 완전한 죽음을 뜻했다.
"이거 뭐야…… 뭐냐고!"
"으, 으아아악!"
남은 길드원들은 순식간에 뺑소니를 쳤다.
애당초 규율 같은 게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을 향해, 유저들의 추격이 이어졌다.
비단 한 곳뿐만 아니라, 모든 영업장이 마찬가지였다.
쿠웅!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가바허트의 분노에 찬 고함이 아지트를 뒤흔들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공격만 하면 임프가 나와서 웃어 대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장난꾸러기 임프의 봉인구를 넣은 덕분이다.
착용자에게 보이지 않는 이 옵션은, 아이템을 사용하는 순간 그 사용자가 역으로 짧은 상태 이상 효과를 받게 되어 있었다.
원래는 장난이나 골탕 먹이기에 사용되는 정도. 하지만 PVP를 주업으로 하는 혈십자 길드원에겐 치명적인 독이 된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일반 유저들이 척살조를 짜서 역으로 혈십자 길드원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프 때문에 전투가 불가능한 혈십자 길드원들.
PVP의 베테랑이라 해도, 이런 상황은 다들 처음 겪었다.
어떻게든 몸을 추슬러 살아온 길드원이 5분의 1 정도. 길드 전체가 망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김민혁 그놈이 만든 장비 아이템 때문입니다. 뭔가 쓰기만 하면 그쪽에서……."
"날 속였어!"
으르렁거리는 가바허트의 옆에서 젤피뎀이 허허 웃었다.
"돈만 받고 이딴 속임수를 쓰다니, 설마, 혼자 힘으로 혈십자 길드 전체와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혈십자 길드는 사실상 블러드 플레이어 전부.
이에 비해 김민혁은 아직 별달리 부하나 세력이라 할 게 없었다.
'4대 길드에 들어간다 해도 다른 쪽에 힘을 실어 주면 그만이다. 놈이 고급 장비를 나눠 주면, 그걸 죽여서 뺏고……!'
200명이 넘는 블러드 플레이어라면 어떻게든 PK 영업을 계속할 수는 있다.
심각한 타격인 건 맞다. 하지만 이미 블러드 플레이어 업계에서 혈십자 길드를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젤피뎀이 읊조렸다.
"감히 블러드 플레이어들에게 사기를 치려 해? 이 손해, 10배로 받아 내 주지."
"5분의 4가 죽었는데 어떻게……."
"아직 5분의 1이나 남았지."
가바허트의 말을 중간에 끊은 젤피뎀.
어제의 미행조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메시지 창을 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럼 놈부터 먼저 추적해 볼까?"
그때였다.
"큰일입니다!"
공식 홈페이지를 보던 행동 대장들이 갑자기 외쳤다.
"뭐야? 지금 급하니까 나중에 말해."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업장이나 닉네임, 클래스 등이 전부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습니다."
"엉?"
"김민혁 놈이 웹사이트마다 이걸 대문짝만하게 실어 놓았단 말입니다!"
이게 또 무슨 소린가.
급히 루나틱 공식 홈페이지를 켠 젤피뎀에게서 억 소리가 나왔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제목 : 강철의 손 김민혁입니다. 믿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단체를 고발합니다.
-작성자 : 김민혁
-내용 : 김민혁이라는 것부터 인증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간단한 인증 사진과 함께 올라온 게시 글.
그 아래에는.
"우리 닉네임이랑 영업장, 그리고 클래스랑 퀘스트가 뭔지 다 나와 있잖아!"
김민혁이 혈십자 길드원에게서 받았던 정보.
베르한이 같이 조사한 내용.
그리고 '전생'에서 알고 있던 혈십자 길드의 행적이 전부 필터링 없이 올라온 상태였다.
물론, 거기엔 미라클 길드원 '젤피뎀'이 그들의 뒷배라는 내용도 숨김없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