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먼 옛날, 우리들의 선조는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다.
-그들은 터지는 쇠를 다뤘으며,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을 수 있는 방패. 그리고 다이아몬드를 떡 썰듯 가볍게 자르는 검을 만들었다.
-하늘을 나는 기계 장치의 배. 비공정도 그중 하나였다.
드워프의 역사.
실제 역사는 아니고, 초창기 뉴워커사에서 짜 놓은 시나리오 설정이다.
'저게 아마 게임 콘텐츠 설정 잡을 때…….'
송윤후는 기억을 되짚었다.
드워프의 발달된 공학 문명이라는 설정은 초창기 회의에서 이미 확정되다시피 한 내용이었다.
후반 콘텐츠를 위해서는 공학 관련 기술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걸 넣을 만한 게 드워프밖에 없었기 때문.
저 책도 그때 넣은 설정을 기반으로 쓰였을 것이다.
'물론 드워프 쪽 역사니 드워프 왕국에 있는 건 맞는데…….'
송윤후는 떨리는 손으로 내용을 읽었다.
분명히 곳곳의 문장에 '비공정'이 언급되어 있었다.
'이게…… 여기에서!'
"옛날 드워프 종족은 비공정을 타고 날아다녔다더군요. 오래된 왕국인 검은 망치 왕국엔 그 기술들이 조금 남아 있고."
책 한 권이 나오자마자 입장이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동시에 냉정하던 송윤후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져 내렸다.
웨인은 눈썰미가 빠르다.
기회를 포착한 웨인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건 참고로 일주일 전 제가 드워프 이게인의 대장간 서고에서 가져온 겁니다. 혹시나 해서 챙겨 두었는데, 잘됐네요."
물론 비공정을 말한 건 회귀 전 지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지 위기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챙겨 온 자료일 뿐이었다.
설명을 마친 웨인이 덧붙였다.
"이 정도면 제가 어떻게 공학 스킬을 배우고, 비공정 제작을 의뢰했는지 설명이 됐습니까?"
일반적으로 운영자와 유저 간엔 갑(甲)과 을(乙 )관계가 성립한다.
그러나 랭킹 1위, 거대 길드의 길드장 등의 인물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들은 유명인, 흔히 말하는 네임드 유저들이다.
수십, 수백만 단위의 유저들을 말 한마디로 움직일 수 있기에, 아무리 운영진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큰일 났다……!'
송윤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웨인, 김민혁은 실제로 혐의가 있더라도 건드리기 쉽지 않은 유저다.
대장장이 비공식 랭킹 1위, 4대 길드 모두가 스카우트하려는 유저.
거기다 '문신사'클래스 까지 겸한 유저는 세상에 김민혁 단 1명뿐이었다.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쉽게 다룰 수 없는 거물.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없는 누명을 씌웠으니, 이것은 두말할 거 없이 운영진의 실수였다.
송윤후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털썩.
의자에서 일어난 송윤후의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웨인 유저님. 이건 저희 측 잘못이 맞습니다."
"내통자가 있다는 혐의는 풀린 거군요."
"물론입니다. 이 자료에는 확실히 비공정과 공학 관련 콘텐츠가 적혀 있습니다. 저희 측 착오로 인해 마음 쓰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4대 길드의 수장에게 이랬다면 법적 문제까지 터졌을지도 모를 사건이다.
웨인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결국 날 확실한 증거도 없이 모함한 거로군."
"죄송합니다, 유저님."
"이거 제가 얼마나 이 게임을 성실히 해 오는지도 알고 계셨을 텐데요. 루나틱 운영진이시니까 더욱 그럴 테고."
대장장이 랭킹 비공식 1위.
카이사 대륙의 첫 개척자.
당장 웨인이 쌓아 온 칭호 및 업적만 해도 루나틱에서 열 손가락 내에 든다.
그런 사람을 함부로 의심한 건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 없는 잘못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시말서로는 끝나지 않겠지. 그것만은 막아야 해.'
송윤후 본인이야 질책 몇 번 듣고 말 것이다.
그러나 처음 보고한 직원에게는 100% 권고 퇴사나 좌천, 감봉이 기다리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 그렇다고 보상이라도 해 줄 것도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원칙상 운영진이 사적으로 특정 유저에게 보상이나 혜택을 주는 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유저를 대상으로 한 루나틱 내부 보상의 금지.
뉴워커사의 방침 중 하나인 이것은 20년 후의 미래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하…… 진짜 답도 없네. 사람을 범죄자 취급해 놓고, 아니라는 게 증명됐으니 그냥 가라는 건가?"
"죄송합니다."
"만약 이 책이 없었으면, 그럼 전 꼼짝없이 계정 영구 정지를 당했겠죠. 설정이 중세라서 진짜 중세식 마녀재판 하시는 겁니까? 운영진 당신들 미쳤어요?"
운영진 클레임 대응팀 측은 협상과 언변의 달인.
수많은 경우로 따져 대는 유저들을 무사히 돌려보낸 능력자들이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저도 게시판에 올려서 죄송하다는 사과받았다고 말하겠습니다. 루나틱이 유저를 이렇게 개, 돼지로 보는 줄은 몰랐군요. 저한테 이럴 정도면 일반 유저들에게는 어떨지 뻔합니다."
웨인은 무려 20년간 사채업자들의 각종 억지와 진상 짓을 보고 겪어 왔다.
송윤후 팀장이 아무리 노련하다 해도 고작 10여 년 남짓.
그 두 배의 시간을 경험한 '선배'에게는 한 수 밀릴밖에 없었다.
게다가 명분이 완전히 저쪽에 있는 것도 문제였다.
'이쪽이 저지른 게 있으니…… 반박할 수가 없어!'
크윽.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무는 송윤후.
그때 웨인이 말을 이었다.
"고개 숙이고 운다고 일이 다 잘됩니까? 팀장이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신경을 박박 긁는 악랄한 대사들!
웨인이 송윤후를 놓아 준 것은 그로부터 1시간 가까이가 지난 후였다.
"다음번에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공식적으로 사태를 키워 항의할 겁니다. 그때는 아무 일 없이 넘어갈 거라 생각 마세요."
"네.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웨인 유저님. 대신 처음 보고 올린 직원은 엄중히 문책하겠습니다."
"시말서 한 장 올리게 하고 끝내게요? 어림도 없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부분은 본사에서 규정대로 엄중히 처리하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한동안 아무 말 않던 웨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송윤후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뒤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가셨던 장소로 바로 가실 수 있습니다."
"그사이 몬스터도 다 다시 리젠됐겠구먼. 됐어요. 다른 데로 보내 주세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아…… 네. 어디로 보내 드릴까요?"
"광맥이 모인 곳으로요."
"……알겠습니다."
루나틱에서 GM, 운영자는 관리자라기보다는 서비스를 수리하는 직원의 느낌이 강했다.
모험의 주역은 유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인이 말한 것 정도는 말단 운영진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초창기에는 지형에 몸이 끼이거나 버그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유저들이 꽤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서버 유지 및 관리에 거금을 투입할 수 없었던 때의 일이다.
탁.
홀로그램을 켠 송윤후가 무언가를 조작했다.
"됐습니다. 들어가시면 광맥 쪽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후."
웨인은 한숨과 함께 문으로 걸어 나갔다.
물론 책을 챙겨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파앗.
빛의 문을 나서자 원형의 광장이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웨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까 전에 분명 운영부 1팀장이라 했지?'
송윤후의 직책은 팀장.
잘은 모르지만 운영진 중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다.
실제로 보수는 받아 내지 못했지만, 웨인이 얻은 무형의 이득은 그보다 더 컸다.
'일단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한 번은 더 다시 보거나 넘어가 줄 테고.'
한 번 잘못 짚었으니, 두 번째는 더욱 신중하게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만약 그게 맞더라도, 이번의 경우를 물고 늘어지면 운영진도 말이 궁색해지는 게 사실.
흔히 말하는 까임 방지권의 획득이다.
웨인은 동영상 녹화 파일을 확인했다.
최근 동영상에 녹화된 운영자와의 대담!
전생에서 사기를 당할 때부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녹화를 해 두게 되었다.
'증거가 없으면 누구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아. 내 몸은 내가 스스로 지켜야지.'
루나틱에서 녹화한 동영상은 실시간으로 VR 기기 및 드라이브에 전송된다.
시스템을 다룰 수 있는 운영진이라도, 이 동영상의 내용은 조작하기 힘들 것이다.
'이제 마음 놓고 회귀 전의 지식들을 사용할 수 있겠군.'
현재 루나틱의 서비스 시간은 대략 2년에서 3년 사이!
회귀 기간인 20년 중 고작해야 초반 2년이 흘렀을 뿐이다.
남은 18년분의 미래의 지식을 사용할 때, 운영진들이 신중해진다는 건 큰 도움이 될 게 틀림없었다.
엄청난 이득.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웨인은 씩 웃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 더…… 운영진 덕분에 겨우 찾았군. 지하 광맥……!'
검은 망치 왕국 지하 갱도!
용암이 흐르는 지반과 연결된 만큼, 던전 자체가 굉장히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곳곳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용암 강과 구덩이가 흐른다.
잠시라도 방심하거나 잘못된 길을 밟는 순간 용암에 삼켜져 버릴 것이다.
'실시간으로 지형이 바뀌고 있는 던전이니, 찾기 더욱 어렵고.'
용암 동굴인 만큼 지반이 쉽게 무너졌다 복구된다.
자칫하면 길을 잃기 딱 좋기도 했다.
웨인은 과거의 경험을 살려 광맥을 찾으려 했으나 영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운영진의 힘을 빌리자, 이렇게 금방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소소한 것에서까지 이득을 챙겨 가는 웨인!
과거, 사채업자들 밑에서 빚을 갚아 가며 생긴 습관을 이어 가는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나설 수 있을 때 한 발짝씩 앞서가는 거지.'
챙길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 노력하는 게 성장의 비결이었다.
막 던전으로 돌아온 웨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나…….'
문 너머에서 나타난 장소는 원형의 광장!
곳곳에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용암 지류가 흘렀다.
치지직!
땅에 떨어진 땀은 그대로 끓어올라 사라진다.
화염 저항력이나 냉기 버프가 충분하지 못하다면 있는 것만으로도 데미지가 들어온다.
웨인은 대장장이였기에 화염 데미지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바위 표면에 가득한 붉은 결정들을 제정신으로 볼 수 있었다.
'이건…….'
웨인은 순간 숨을 멈췄다.
원형 공간 주변과 구덩이마다 가득한 붉은 광맥!
심지어 바닥과 구덩이에 고인 것들마저 전부 불의 정수들이었다.
"여기…… 숨겨진 히든 피스라도 되는 것 같군."
사방에 널려 있는 불의 정수와 용암석 광맥.
굳이 돌아다닐 것도 없이 여기서 자원을 캐도 될 정도다.
'이 맵의 광맥은 이런 식으로 모여 있는 모양이지.'
광맥 및 아이템이 한 곳에만 모여 있는 던전은 생각보다 흔하다.
생각을 털어 낸 웨인은 곧바로 곡괭이를 들었다.
'어쨌든 간에 불의 정수가 이만큼이나 한 곳에 모여 있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불의 정수.
파이어 엘리멘탈에게서 드롭되며, 동시에 광맥에서도 캘 수 있다.
주로 쓰이는 곳은 비공정의 원료가 되는 용암석 정수의 제작.
그 외에도 각종 고레벨 화염 속성 아이템의 제작에 꼭 필요한 아이템이기도 했다.
두어 시간 후.
-채광에 성공했습니다.
-<불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불의 정수>를 버리시겠습니까? (Y/N)
-<불의 정수>를 버렸습니다.
-대성공!
-<불의 정수 10개>를 획득했습니다.
-<불의 정수 10개>를 버리시겠습니까? (Y/N)
-<불의 정수>를 버렸습니다.
광맥 열대여섯 개를 해체한 웨인이 고개를 들었다.
'금맥이 가득 있는 걸 보는 기분이군.'
아직도 사방에 가득한 불의 정수와 광맥들!
사방이 붉은 빛으로 번쩍였으나, 웨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하지만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금은 한정되어 있지.'
불의 정수는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다.
잠깐이라면 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인벤토리 역할의 배낭을 태워 버리기 때문이다.
망가진 배낭은 두 번 다시 못 쓰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아이템이 있다면 불에 영향을 받아 망가지는 것도 각오해야 했다.
'즉 손이나 금속 장갑을 끼고 들고 나가야 한단 뜻이고.'
웨인은 인벤토리 창을 열었다.
혹시 불의 정수를 넣을 만한 배낭이 없나 확인하는 것이다.
대장장이 클래스는 대부분 여러 가지 배낭을 같이 가지고 다닌다.
각종 광석을 취급하는 특성상 인벤토리 공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손을 몇 번 움직이던 웨인의 표정이 구겨졌다.
'없군.'
배낭이라는 아이템부터가 굉장히 드물다.
불 내성이 있는 배낭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웨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져가 봤자 효율도 떨어질 테지.'
불의 정수는 밖으로 가지고 가면 등급이 떨어지게 된다.
그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일부 초대형 길드는 대장간을 용암 지대에 만들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었다.
"일단 되는 대로 가져가 볼까……."
미래에도 등급이 떨어진 불의 정수를 잘만 써 왔다.
웨인은 등을 돌리고 곡괭이를 휘둘렀다.
까앙! 까앙!
대략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순간이었다.
"……잠깐만."
웨인의 눈이 번득였다.
미래, 대형 길드는 용암 지대에 직접 대장간을 만들어 광석 효율을 끌어 올렸다.
물론 그 방법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안에서 정수를 가공하는 것은 웨인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