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벽력문.
유저들만이 모인 유저 문파로써, 문파원 수는 대략 1만 5천여 명 정도다.
수십만 명이 접속해 있는 게 일상인 거대 문파들 입장에서는 발톱의 때만 한 크기.
실제 문파원들의 레벨도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개별 문파는 물론, 무림맹이나 혈교 같은 초거대 세력도 벽력문을 무시하지 않았다.
폭약 제조!
중국 서버에서 실질적인 고화력 광역기를 가진 건 오직 벽력문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일이었다.
마법의 위치를 가진 주술이 약한 중국 서버에서, 화력의 가치는 몇 배 이상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 벽력문의 자존심이 얼마 전 무너졌다.
'대체 이 폭약은 누가 만든 것인가?'
벽력문주, 뇌진개는 한숨을 내쉬었다.
뇌화 벽력탄.
눈앞에는 얼마 전 항주 공방전에서 쓰였던 폭약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재료는 얼추 알아낸 것 같은데, 번개 관련 추가 효과는 무슨 수를 써도 재현 못 하겠군.'
뇌진개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폭발에 미친놈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폭죽이라면 사족을 못 썼으며, 실제 화약을 만들려고 도서관을 매일같이 찾을 정도.
그러나 현실에서 폭약을 가지고 노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뇌진개는 친형이 같은 짓을 하다가 공안에 끌려가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항상 좋아하는 걸 추구할 수 없다.
또 다른 세계로 가지 않는 한은 말이다.
뇌진개는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친형이 끌려가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그 성격은 더욱 단단히 굳어졌다.
지망하던 화학공학과 대신 미대를 선택했고, 겉으로는 완벽한 일반인처럼 살아가려 했다.
하지만 루나틱이 서비스를 시작하며 그의 삶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버그를 쓰지 않는 이상, 무엇이든 허락되는 새로운 세계!
심지어 성과를 내면 거금을 만질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친형 건으로 인해 여러 불이익을 보는 상황.
뇌진개는 망설이지 않고 루나틱에 올인(all-in)했다.
비록 미술 쪽에서 배운 지식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화학 지식만은 루나틱에서 아낌없이 활용!
수많은 노력 끝에 현 시점에서는 중국 서버에서 폭약 제조로는 으뜸으로 꼽히는 유저가 되었다.
중국 서버에서 각종 제작, 합성 스킬을 다루는 유저 중에서는 단연코 1인자가 된 셈.
게다가 벽력문의 취급 분야는 폭약뿐만 아니었다.
피화포, 폭발 수리검. 포은사.
무협지에서나 볼 법한 각종 특수 아이템이라면 벽력문의 거래 카테고리에 항상 들어가 있었다.
이 정도쯤 되니 무림맹이나 혈교에서도 함부로 벽력문을 박대할 수 없었다.
벽력문이 정사 지간의 중간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흑도련이 이런 소모품을 만들 수 있다면 벽력문은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된다.'
벽력문이 무시받지 않았던 건 다른 대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그 위치가 무너지는 건 확실했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텐데…… 무언가…….'
뇌진개가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덜컹.
연구실의 문이 열리고 수하 한 명이 들어왔다.
"뇌진개 님! 큰일 났습니다!"
"뭐냐?"
뇌진개는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처, 철가면이……."
"철가면이 뭐, 또 흑도련에서 신형 폭약이라도 만들었다는 거냐?"
"아니……."
수하는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철가면이 나타났습니다."
"당연히 나타났겠지, 신형 폭탄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알리려면 공식 석상에 나와야 하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럼? 폭약 말고 피폭포냐?"
"아, 진짜! 철가면이 직접 여기 왔다고요! 좀!"
수하의 언성이 높아진 순간.
따악!
뇌진개는 자리에서 일어나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이 새끼가 문주 앞인데 어디서 언성을 높여, 버르장머리 없이."
"그럼 진작에 제대로 알아듣든가요! 나 원 참."
"아니꼬우면 네가 문주 하든가."
"아이고오…… 얼른 이직 자리를 알아보든가 해야지……."
"새끼가……."
손을 털던 뇌진개가 피식 웃었다.
몸을 움직인 덕분인지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기도 했다.
슥슥.
가볍게 머리를 긁던 뇌진개가 순간 멈칫했다.
"그런데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철가면이……."
"아."
마저 근질거리던 머리를 긁은 뇌진개가 기겁해 외쳤다.
"뭐! 철가면이 여기 왔다고?"
***
벽력문의 문주실.
웨인이 이곳에 안내받은 지 5분쯤 후에 뇌진개가 들어왔다.
"후우, 후, 늦어서 죄송합니다."
"폭약을 다루는 문파라서 그런가, 목청이 다들 크군."
"크흠."
아까 전의 큰 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뇌진개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됐고."
웨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말했다.
"그럼 이제 항주의 빚을 받아 낼 차례군."
"……!"
뇌진개의 몸이 얼어붙었다.
"설마, 여기 온 것이……."
"항주의 흑도들을 도울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각오하고 한 게 아닌가?"
웨인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후우.
숨을 들이마신 뇌진개가 차근차근 답했다.
"우리는 의뢰를 받은 대로 항주의 흑도 문파들을 지원했을 뿐이오."
"알고 있다."
"그럼 어째서……."
"벽력문이 작정하고 무림맹이나 혈교에 붙어 버리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무림맹과 혈교를 둘 다 적으로 돌린 상황.
미래, 두 세력이 벽력문의 화약으로 무장한다면 안 그래도 어려운 상대가 더욱 강해지리라.
"뜻은 이해했다."
뇌진개는 그 시점에서 더 이상 존댓말을 붙이지 않았다.
상대가 벽력문을 부수러 온 이상, 굳이 대우해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서 온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간도 크군."
타악.
뇌진개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문주실 바깥에 있던 문파 간부들이 일제히 둘의 주변을 포위했다.
웨인은 주변을 흘긋 훑어보며 말했다.
"덤빌 셈인가? 나에게?"
"흐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뇌진개가 웃었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 벽력문의 자랑이 뭔지는 잊지 않았겠지?"
웨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벽력문의 간부들.
장비를 보아하니 개개인의 레벨이나 스펙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들 품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틀림없이 폭약일 터.
벽력문주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용아벽력탄이군."
"뭐?"
"용아벽력탄이라고 말했다."
뇌진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호오, 역시 보는 눈은 있구나."
그리고 곧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 너는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10여 명의 간부가 각각 양손에 든 폭탄을 내보였다.
뇌진개가 말을 이었다.
"제아무리 고레벨의 랭커라 할지라도, 무림맹주나 혈교 교주라 해도 용아벽력탄의 세례를 받으면 살아남지 못하지."
용아벽력탄.
과거, 벽력문에서 다루던 폭탄 중에서도 위력으로는 제일가는 소모품이었다.
심지어 지금 보인 건 그중에서도 엄선한 특급.
초대성공에서 나온 것들만을 모았기에, 수치만으로는 대형 보스 몬스터도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과연 그럴까?"
"광오한 놈. 얘기는 끝이다! 죽어라!"
철가면의 레벨을 떨어뜨린다면 부숴진 자존심도 찾을 수 있을 터.
뇌진개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렸다.
"일발필중!"
"수라산화!"
벽력문은 각종 소모품과 관련된 모든 콘텐츠를 독점한 문파.
당연히 간부들 모두가 폭탄, 소모품 관련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더욱 위력이 증대된 용아벽력탄 수십 개가 일제히 터져 나갔다.
문주실은 물론, 벽력문의 건물이 뒤흔들릴 정도의 대폭발!
"큿…….!"
뇌진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폭발에 직접 휩쓸리지 않았음에도 체력의 9할이 떨어졌을 정도.
피폭포와 방어 아이템이 아니었다면, 자신들까지 휩쓸려 죽고 말았으리라.
"그렇지만 저 폭발이라면 확실히 해치웠겠군."
씨익.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뇌진개가 말했다.
"흐흐, 새끼. 레벨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두 개는 떨어졌겠군."
그때였다.
스스스.
점점 걷혀 가는 모래먼지 사이로 당당히 서 있는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
뇌진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벌렸다.
대신 주변에서 몸을 추스르던 다른 간부들이 뇌진개가 생각하는 걸 그대로 말해 주었다.
"아, 아니!"
"저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놀랍게도 웨인은 폭발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것도 빈사 상태가 아니라 멀쩡한 모습으로 말이다.
휘릭.
웨인은 뇌진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재미있는 걸 보여 주지."
펄럭.
몸을 둘러싼 망토가 떨어졌다.
보통의 망토와 달리,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위로 여러 한자와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뭐, 뭐냐 그건!"
"글쎄다…… 신형 방화복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바, 방화복이라고?"
뇌진개의 눈이 커졌다.
폭발을 막는 소모품 정도는 벽력문에서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방금 같은 대폭발에서 몸을 지킬 수 있는 방화복이라니?
'설마, 그 정도로 기술 격차가 난단 말인가? 철가면과 내가!'
뇌진개의 눈동자가 마구 떨렸다.
루나틱을 시작한 후, 사력을 다해 끌어 올린 스펙과 자존심이 산산이 깨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한 가지 감정이 강렬히 일어났다.
'나도, 나도 가지고 싶어……!'
열등감이었다.
'저 정도의 기술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주변 간부들이 무어라 외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웨인이 뇌진개를 향해 말했다.
기이하게도 그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렸다.
"알고 싶지 않나? 어떻게 이 방화복을 만들었고, 너보다 뛰어난 폭약을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알려 주지."
너무 쉽게 나온 대답에 순간 뇌진개는 눈을 끔벅거렸다.
"……사, 사실이냐?"
"거래를 할 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웨인은 말을 이었다.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말이야."
꿀꺽, 뇌진개의 목울대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정말 레시피를 알려 준단 말이냐? 그…… 흑도련에 들어가기만 하면?"
"물론이다. 난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계약서도 작성하지."
벽력문이 지금까지 제1수칙으로 지켜왔던 정사 중간의 원칙!
웨인의 제안은 그것을 깨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건…….'
뇌진개는 고민에 빠졌다.
'리턴이 있다.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군.'
지금까지 정사 중간의 법칙을 지킨 이유는 이득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폭약과 소모품은 한 세력만 다루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물건.
그렇기에 벽력문이 한 세력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쪽은 무조건 벽력문을 노릴 게 틀림없었다.
즉, 벽력문에게 있어 중립은 이득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이 제안, 받아들이면 위험하다.'
아무리 흑도련이, 그리고 철가면에 세다 한들 중국 서버 전체의 공적이 된다면 어찌 될지 모른다.
기껏 얻은 새로운 세상에서의 기반.
더불어 현실에서 버는 수익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한 제의였다.
하지만 뇌진개는 그 이상으로 폭탄, 그리고 폭약에 미친 사람이었다.
후우, 숨을 내쉰 뇌진개가 말했다.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문주님!"
"안 됩니다!"
주변 간부들이 소리쳤으나 뇌진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흐! 네놈 기술만 다 빼먹어 주마. 누가 너같이 수상한 녀석의 밑으로 들어갈 줄 아느냐?'
물론 뇌진개도 정말로 충성을 바치려는 건 아니었다.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철면인을 따르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노리는 것은 철면인의 기술!
적당히 따르는 척하면서 제작 기술 및 노하우를 빼먹은 뒤 탈주할 생각이었다.
물론 웨인도 그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확실히 끝을 볼 계획이었다.
"그럼 이제 구두로나마 동료가 되었으니…… 남은 빚을 치를 차례군."
"음?"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거든."
뇌진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웨인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동시에 엄청난 폭발이 주변을 휩쓸었다.
"크아악!"
"아악!"
비명과 함께 뜨는 메시지!
-선우준이 사망했습니다.
-금길재가 사망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간부들이 단숨에 사망!
바닥에 움츠려 있던 뇌진개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어, 어?"
죽지 않았다고?
뇌진개는 흘긋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은 위치의 간부 여럿이 죽었는데, 어째서 자신만 살았나.
이유? 간단하다.
뇌진개의 정면.
먼저 자리를 잡은 웨인이 방화복을 써서 폭발을 막았기 때문이다.
'무, 무서운 놈.'
설마, 여기서 한 번 더 폭발을 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기선 제압이 목적이었다면 제대로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 저 녀석이 두른 방어 아이템, 이 정도의 폭발을 멀쩡히 막아 냈다, 이 말이지?'
뇌진개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웨인이 생각했다.
'역시 폭미새로군.'
폭발에 미친 새끼.
미래, 실제로 중국의 랭커였던 벽력문주 뇌진개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그런 그답게, 강력한 폭발물과 그것을 막아 내는 아이템을 보여 주자마자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됐다.'
웨인은 철가면 속에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 벽력문은 다 끌어들인 거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