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흑도련의 거점인 소주와 항주는 중국 서버의 동쪽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고레벨 사냥터가 몰려 있는 서쪽은 무림맹과 혈교가 모두 차지했기 때문이다.
당장 무림맹이 있는 호북, 혈교가 있는 신강 둘 다 서쪽으로 치우친 장소!
흑도련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쪽으로 가는 길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물론 당장은 힘든 일이었다.
새로 만든 장비를 이용해 한 방 먹였다지만, 아직 무림맹과 혈교의 세력은 건재한 상태!
현재는 서로 견제만 하고 있지만 흑도련이 서쪽으로 가는 순간 이쪽을 칠 확률이 높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쪽 거점을 내주는 순간, 흑도련 유저들에게도 '랭커'가 될 방법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웨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후 진로를 서쪽으로 잡았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도엽아."
"예, 형."
부산 센텀시티의 펜트하우스.
로그아웃을 한 김민혁은 한도엽을 불러 말했다.
"요즘 정보 수집은 잘되어 가냐?"
"어우, 재밌는 거 많던데요?"
한도엽은 마시던 비타민500 병을 비웠다.
"정사마대전인가? 그거 시작돼서 난리도 아니잖아요."
"정사마대전?"
"아, 민혁 형은 장비를 만드느라 모르시겠구나. 중국 서버 지금 쟁 때문에 난리예요. 3천만 명이 넘는 유저가 각지에서 싸우고 또 싸운다니까요?"
"3천만 명?"
"네, 중국 서버 유저 수가 5억이라는데, 그중 콘텐츠 동접이 가능한 참가자만 해도 그 정도래요."
이 정도면 어지간한 소국의 전체 인구수만큼의 유저가 싸우는 셈.
아무리 남의 서버 이야기라지만, 이 정도 스케일이 되자 해외 각 서버에서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놀랍군."
김민혁은 처음 소식을 듣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보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한도엽이 설명을 이어 갔다.
"얼마 전까진 무림맹 길드랑 혈교 길드가 2강이고, 흑도련이 그 사이에 낀 느낌이었는데, 어젠가 그젠가부터 갑자기 치고 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치고 나온다고?"
"네, 소주를 치던 무림맹 유저 3만 명에, 산동에 있던 황보세가랑 제갈세가까지 합치면 10만 명 가까이 죽어 나갔다니까요?"
한도엽은 계속해서 번역한 소식들을 말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김민혁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도엽아, 공지 사항이랑 소식 번역은 이제 됐고. 짧고 굵게 일 하나만 하자."
"일요?"
"그래."
지친 표정을 짓는 한도엽에게 김민혁이 말을 이었다.
"3일에 200만 원."
"200……!"
단 3일에 200이라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일당이다.
한도엽의 눈이 번쩍 뜨이자, 김민혁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앞으로 3일 동안 닥치는 대로 중국 서버에서 새로 등장한 랭커들의 정보를 모으도록."
"그건……."
"다른 정보는 좀 나중에 들어도 되니까 이것부터 우선해서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일처리가 잘되면 더 챙겨 줄 테니까, 잘해 봐."
"네!"
우렁차게 외친 한도엽은 곧바로 작업실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김민혁은 조용히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이번 콘텐츠에서 미래 중국 서버의 유명 랭커 중 절반 가까이가 나타난다.'
우드 위키의 기억 외에도 알고 있던 모든 정보를 정리!
한도엽에게 시킨 것은 혹시나 깜박하고 넘어갈 때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자그마한 것이라도 놓친다면, 200만 원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이미 루나틱을 통해 여러 유명인들은 월 억대의 금액을 벌고 있었다.
김민혁은 신중했고, 그만한 시장을 다루는 데 이 정도의 투자는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일단 천마와 녹림왕에 대한 것부터 적어 볼까?'
사각사각.
김민혁이 작업에 집중하자, 펜트하우스 안에는 펜 오가는 소리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무림맹에 대한 반격이 끝난 다음 날.
웨인은 승리 소식을 듣자마자 간부들을 모아 작전 회의를 열고 있었다.
"전투 사이사이에 이동하면서 이걸 꼭 숙지하도록."
"이게 뭡니까?"
소주의 흑도련 본련 회의실.
리웨이준을 비롯한 흑도련 간부들은 웨인이 건네준 종이들을 향해 물었다.
"주의해야 할 상대들의 특징이다."
"주의?"
"요주의 인물 체크리스트라 할 수 있지."
웨인은 말을 이었다.
"거기엔 그런 유저 및 NPC들의 주 정보 및 직업, 주 무공의 특징이 적혀 있다."
"……!"
자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무림맹이랑 혈교 측 데이터베이스라……."
"어디 한번 볼까……."
문서 쪽을 넘기던 간부들의 입이 벌어졌다.
현 시점에서 알려진 랭커들 외에도, 처음 들어 보는 유저 및 NPC들의 정보가 빼곡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무당파 1~5장로까지부터 혈교 흑천혈귀진의 약점까지……."
"어떻게 이런 정보를……!"
자리에 있던 간부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그 끝에 있던 웨인은 태연히 대답했다.
"대부분은 하오문에서 얻은 정보다."
"역시……!"
"하오문이 아군이 되니까 편리하군요."
회의실의 간부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웨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하오문의 이야기를 하니까 별 의심 없이 넘어가는군.'
당연한 말이지만, 하오문에 의뢰를 한 적은 없었다.
문건에 적힌 것은 전생의 기억 속에 있던 유저들의 정보!
유명한 랭커나 NPC는 지금도 알려져 있지만, 그 외의 숨은 고수들도 대거 적혀 있었다.
'대부분은 그때의 우드 위키에 적혀 있는 것들이지.'
전생에서는 이미 빠질 대로 물이 다 빠진 옛 정보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저것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극비 사항으로 취급되는 초고가의 정보였다.
"여기에 적힌 정보를 숙지하고 움직인다면, 어지간해서는 패할 일은 없을 거다."
"예!"
"다음 공략은 남궁세가가 될 것 같으니, 가장 먼저 그쪽 부분부터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일제히 대답하는 간부들.
그때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련주님, 질문이 있습니다."
"말해 봐."
"여기 천마에 대한 부분은 왜 정보가 없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 진짜네?"
체크리스트를 살펴본 다른 간부들이 눈을 크게 떴다.
다른 기재 인물들과 달리, 천마라 칭해진 유저의 란에는 '보고' 두 글자만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하긴 할 테지만, 그것만으로 됩니까?"
"그래, 천마는 되도록 상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어째서……?"
"천마는 1마리 야수같은 놈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거라곤 전쟁터에서 나타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 죽여 댄다는 것뿐이지."
천마의 출몰 장소 및 방식은 20년 후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전장터에 홀로 끼어든 뒤, 상대가 누구건 모두 죽이면서 미쳐 날뛰는 학살자!
"그때 맞받아치기보단, 차라리 적을 대신 죽여 주는 걸 기다리도록."
"알겠습니다……!"
"정 놈이 이쪽을 노린다면, 그때는 나와 부련주에게 보고하고."
천마는 무조건 피하라!
간부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천마가 적힌 쪽을 확인했다.
'직접 보고라니, 철면인 님이 이렇게 누군가를 경계하는 건 처음 아닌가?'
'대체 놈이 얼마나 세길래 철면인 님이 싸움을 피하라고 하는 거야?'
현재 흑도련 내에서 웨인의 이미지는 거의 신 그 자체!
그런 그가 주의하라 말하는 상대였으니, 흑도련 간부들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럼 이만 해산."
"해산!"
회의가 끝난 후.
지시를 마친 웨인은 회의실 밖으로 걸어 나오며 생각했다.
'그럼 다음 준비를 해 볼까?'
흑도련은 현재 절호조의 기세를 탄 것과 다름없는 상황.
그러나 남궁세가를 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남궁세가까지 점령당하면 무림맹은 더 이상 혈교에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휘 지역의 옆, 호북 지방엔 무림맹의 본거지가 위치해 있다.
즉, 안휘를 빼앗기면 무림맹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
당연히 무림맹 측도 절대로 뺏기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할 확률이 높았다.
'우리를 견제할 테니, 그 전에 대비해 둬야겠군.'
***
안휘성.
남궁세가가 있는 이 장소는 평상시엔 그다지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궁세가 소속 유저들은 주로 고레벨 사냥터에 귀환 지점을 등록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남궁세가는 무림맹 세력의 핵심.
중국 서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의 한 축이었기에, 고레벨 콘텐츠 중 대다수를 독점할 수 있었으니까.
세가에 돌아오는 것은 스킬이나 퀘스트 때문.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제갈세가와 황보세가, 산동 지방이 무너진 지금, 남궁세가에는 수많은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무림맹 소속, 혹은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인물들!
그러나 남궁세가 건물 안에는 있어선 안 될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설마 우리 둘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이야, 인생 참 묘하구먼."
"동감이다."
세가 건물 안의 어두운 방.
지운결은 맞은편에 앉은 사사풍을 향해 말했다.
"그쪽은 어떤가, 운남성 분타가 무너졌다면서?"
"네놈이 알 바 아니다."
흑도련에게 크게 얻어맞은 것은 혈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제갈세가와 황보세가가 무너진 무림맹보단 사정이 낫다.
그러나 혈교에겐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래, 그럼……."
미소 지으며 넘어가던 지운결이 말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
"천마 건은 어떻게, 잘되어 가나?"
"……그놈 얘긴 꺼내지도 마라,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
지운결의 질문에 사사풍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처음 천마는 혈교 측에서 내보낸 비밀 병기로 오해받았지만, 이젠 아니다.
무림맹에게 있어서도 천마는 골치 아픈 존재가 되었으니까.
지운결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도 마찬가질세. 백학검선 그 친구부터 해서 전도유망한 랭커들이 천마 때문에 깡그리 레벨이 떨어졌어."
천마의 학살은 정파와 마도를 가리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지운결이 말했다.
"그래서 정보를 찾아봤는데, 자네도 알아야 할 게 있더군."
"……."
사사풍이 침묵하자, 지운결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중국 지사장이 마약 건으로 잡혀가서 다는 알 수 없었지만, 천마가 서버 전체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히든 클래스란 건 확실해졌어."
"1인 문파?"
"그래, 그걸 듣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전 서버 1인 한정 히든 클래스.
그 단어가 나오자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오행문……."
"그때는 어떻게든 세상에 퍼지기 전에 지워버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엔 이미 소문이 퍼졌으니 조금 더 까다로울 걸세."
오행문은 주술사 계열에서 전 서버 1개밖에 없는 히든 클래스였다.
천마와 다른 점이라면, 현재 이 클래스는 유저부터 획득 방법까지 모조리 지워졌다는 것이었다.
무림맹과 혈교의 철저한 말살 정책으로, 그런 게 있다는 정보조차 사라져 버렸으니까.
"흥."
코웃음을 친 사사풍이 으르렁댔다.
"빨리 본론이나 꺼내라. 여기 더 있기 싫으니까."
"거참, 성질 급하긴……. 알았네, 알았어."
지운결은 어깨를 으쓱한 뒤 말을 이었다.
"내용은 간단하네, 서로 어려운 일이 있으니 같이 돕고 살자는 거지."
"도와?"
"조만간 흑도련이 여기 안휘를 노리고 올 걸세. 그때 자네는 혈교의 정예부대로 놈들의 후방을 쳐 주게."
"대가는?"
"흑도련이 꺾이면 그 후 무림맹도 전력으로 천마 토벌에 협조하지."
"그걸 믿으라고?"
"못 믿겠으면 계약서라도 써 줌세, 현실에서 말일세."
"됐어."
사사풍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지으며 대답했다.
"어느 쪽이든 네놈이 유리한 건 마찬가지잖아.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마찬가지, 지킨다 해도 직접 천마를 잡는 건 혈교여야 할 테니까."
"그렇구먼……."
고개를 끄덕이던 지운결이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쳐도 상관없네."
"뭐?"
"흑도련 놈들을 잡을 때의 경험치가 아깝긴 하지만, 그거야 뭐 내 알 바 아니지."
"……크."
무림맹으로서는 혈교가 받아들여도 이득, 안 받아들여도 이득인 셈.
한참을 고민하던 사사풍이 말했다.
"좋다, 대신 일이 끝난 후 흑도련의 재산은 우리가 6, 그쪽이 4로 배분한다."
"그렇다면야 기꺼이."
지운결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사사풍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사사건건 서로를 견제하던 두 사람, 아니 두 세력이 힘을 합치는 데 동의한 것이다.
세상이 변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