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가다로 게임지존-471화 (472/592)

471화

"뭔 개소리냐?"

공손정은 곧바로 반응했다.

그것도 보통 보이는 무시나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 아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너랑 맺은 불가침을 파기할 수도 있다."

원정대가 넘은 길을 알아내 직접 따지러 올 만큼 격앙된 상태.

'그럴 만도 하지.'

애초에 공손정의 자존심은 특이할 정도로 높다.

그런 그와 서로 일을 도와주는, 즉 대등한 관계에서 뜬금없이 따까리가 되라는 말을 들은 상황.

오자마자 천마신공을 쓰며 덤비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웨인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오해를 하게 만들었군."

웨인은 씩 웃은 다음 말했다.

"물론 진짜 따까리, 수하로 들어오란 말은 아니다, 단지 그런 역할을 부탁하고 싶을 뿐이지."

"역할?"

"그래, 이 원정군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면 나 혼자 힘으로는 힘들 것 같아서. 충분히 강하면서,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설명을 들은 공손정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상황은 이해했다. 대충 부관 직책을 맡기고 싶단 말이군."

그러나 의문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뭐가?"

"저 녀석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둬도 딱히 손해는 없을 텐데."

공손정은 자존심 강한 천마이지만, 냉철한 기업인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답게 여기 모인 원정대의 내용물을 단번에 꿰뚫어 본 것이다.

"저들의 40%는 혈교, 무림맹 내의 흑도련 반대파, 나머지 60%는 일확천금을 노리고 지원한 멍청이들이잖나."

흑도련으로서는 과격파들이 실패하기를 바랄 터.

그런데 굳이 지휘를 맡아 책임을 지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내 비밀을 밝힐 필요가 있겠군."

"비밀?"

공손정이 물어보자 웨인은 대답 대신 장비 창을 열었다.

"내 숨겨온 정체다."

"정체가 뭐 별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공손정이었으나, 철가면에 이어 인피면구가 벗겨진 순간엔 그도 깜짝 놀랐다.

"너, 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 있던 공손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래서 내가 필요하다는 거였나."

철면인의 정체가 저 남자라면 모든 게 앞뒤가 들어맞았다.

씨익, 가볍게 웃은 웨인이 말했다.

"만약 이 사실을 허락 없이 다른 사람에게 누설할 시엔, 나는 게임을 접을 때까지 너와 손을 잡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알았다, 김민혁."

공손정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웨인이 생각했다.

'어차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천마 놈이 내 정체를 발설하는 일은 없겠지만.'

천마, 공손정은 이미 웨인에게 한 차례 은혜를 입었다.

백업 필드 건으로 조치를 하려는 운영진을 막아 준 게 그것이다.

자존심이 매우 강한 공손정이니만큼 굳이 제한을 걸지 않아도 그가 이 일을 노출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래서, 내 정체를 알았으니 계약을 해지할 건가?"

"……네가 김민혁이라고 해도, 철면인은 철면인."

공손정은 가면을 쓰며 대답했다.

"약속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꺼이 네 부관이 되어 주지."

물론 실제 부관 직책은 받을 수 없었다.

천마 클래스의 특성상, 단체나 진영에 소속되면 스펙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서버 간 전쟁이니만큼 소속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강요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 슬슬 가 볼까?'

***

중국 유저들의 한국 공격은 엄청난 속도로 진행이 되었다.

밥 먹듯 PVP를 해 오며 레벨을 올린 중국 유저들의 일제 공격!

대형 길드들이 본격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지금, 원정대는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았다.

-중국 원정대, 살라스 성에서 충격적인 패배.

-마법사 랭킹 6위의 네임드 유저 '수오미촌민' 대활약. 해일을 불러 일으켜 공격대 격퇴.

-일반인 유저들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어…….

사태가 심각해지자 혼자 활동하던 랭커와 네임드들이 일어난 것이다.

가장 큰 문제가 살라스 성.

마법사 유저들이 주로 모여 수비하자, 들이대던 중국 원정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웨인이 첫 번째 작전 회의를 연 것은 그때였다.

원정대의 중심 거점인 발제리아 성.

슬레지다운 협곡 근처에 있던 이 성채에 원정대 랭커들이 모였다.

"다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지."

웨인이 말했다.

"살라스 성 공격 허가를 내려 달라고?"

"그렇소. 체계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짜야 하지."

모여 있던 간부들이 말했다.

"전군이 몰려가는 건 그렇고, 병력을 나눠서 성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계속 영역을 넓히는 게 좋겠소."

한국 서버에서의 영역을 넓힐수록 더 많은 중국 유저들이 오기 편해진다.

단순히 경험치와 아이템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가치가 있는 셈.

"살라스 성은 북쪽과 동쪽으로 길이 뚫린 요충지, 반드시 차지해야 두고두고 편해질 거요."

"그럼 그렇게 하지."

듣고 있던 웨인이 선뜻 수락했다.

"공략을 하려면 일단 지휘관부터 임명해야겠군."

"안 그래도 우리들이 생각해 둔 사람이 있소."

무림맹 측 인원들의 리더로서 위중악이 말을 꺼냈다.

"백학검선."

"네, 중악 형님."

동시에 간부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백학검선.

과거, 천마의 첫 희생자가 되었던 랭커 유저였다.

그 사건 후 백학검선은 치욕을 씻기 위해 심기일전해 루나틱에 몰입!

열심히 하는 모습을 눈여겨본 위중악이 영입한 것이다.

"이 친구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지. 쟁 경험도 여러 번 있고, 머리도 잘 돌아가거든."

백학검선을 본 순간 웨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군.'

총사령관인 웨인은 본진에 남겨 두고 자신들끼리 흩어져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

그 생각을 읽은 웨인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백학검선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웨인이 먼저 나서 손을 들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무슨?"

"이미 사령관으로 내정해 둔 사람이 있거든."

"…….?"

영문을 몰라 하는 유저들 대신 웨인은 곧바로 손짓을 했다.

동시에 새로운 사람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기에, 막사 안의 유저들은 검을 장비한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검사?'

'처음 보는 놈인데?'

'일반 유저로 따라왔나?'

만약 간부로서 왔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간부들이 의문을 가지는 사이 웨인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엄백호다."

"엄백호?"

"……!"

순간 간부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기묘한 닉네임이군."

"정말 이상한 닉네임은 아니긴 한데……."

그사이 흰 가면과 변장 도구를 쓴 공손정은 미친 듯이 메시지 창을 입력했다.

-공손정 : 야, 이 미친놈아!

-공손정 : 어째서 내가 엄백호냐. 공손찬으로 하라 했잖아.

-철면인 : 공손찬이나 공손천은 안 돼. 놈들의 경계심을 풀려면 이 이름이 제격이었다.

그럴 만했다.

엄백호는 유명한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엑스트라 악당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으니까.

실제로 일부 무림맹 측 간부 유저들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웨인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엔 이자가 지휘관을 맡기 적격인데, 그쪽은 생각이 다른가 보군."

"당연하지!"

백학검선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에게 지휘관을 맡기다니, 아무리 총사령관이 당신이라도 그 말은 받아들일 수 없소!"

"이건 백학검선 쪽이 맞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였다.

반대 여론이 물살을 타려고 할 무렵.

지켜보고 있던 무림맹 측 리더였던 위중악이 말했다.

"다들 그만하지."

"……!"

생각지도 못했던 대사에 백학검선을 비롯한 인원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위중악은 웨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 뭐, 총사령관 명령이니 들을 수밖에…… 안 그렇습니까?"

"흠."

"이거 미안하게 됐네, 백학검선. 다음번을 노리자고."

"하지만…… 알겠습니다."

백학검선까지 동의하자 다른 간부들도 더 이상 항의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웨인이 위중악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총사령관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 보도록, 죄를 묻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기꺼이 말씀드리지요."

위중악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전략이니 뭐니 하는데, 아무래도 루나틱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스펙이고. 결국 활약을 할 수 있는 고레벨 플레이어가 리더를 맡아야 한단 게 제 생각입니다."

"흐음, 그래서."

"백학검선이야 랭킹 1,000위 안에도 들어 있고, 보유 스킬 개수나 레벨도 남부럽지 않은 랭커인데, 사령관님이 내세운 대타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웨인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설명을 들었다.

그사이 위중악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물론 총사령관님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적어도 한 번 검증 절차는 거쳤으면 합니다."

"검증이라?"

"아무래도 스펙을 보는 것이니 타임 어택 같은 게 제일 낫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아니니 깔끔하게 1:1 PVP로 하면 좋겠지요."

"오……!"

"그거 괜찮군."

아까까지 영문을 몰라 하던 간부들이었지만, 내용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틱은 무엇보다도 스펙이 중요한 게임.

1:1 PVP에서 이긴 쪽이라면, 다대다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펼칠 게 틀림없었다.

단순히 한번 보자는데 이마저도 거절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테고 말이다.

"그러니까."

설명을 듣던 웨인이 정리했다.

"내가 임명한 엄백호가 스펙이 좋은지, 아니면 그쪽 스펙이 좋은지 보자는 거군."

"물론 저 친…… 엄백호가 이긴다면 군말 없이 따르겠습니다."

엄백호란 이름을 되새기던 간부 몇몇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천마, 공손정의 얼굴이 가면 속에서 실시간으로 굳어 갔다.

"좋아."

웨인이 말했다.

"쇠뿔도 단숨에 뽑자고, 지금 하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중악은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다.'

총사령관인 철면인의 영향력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사건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백학검선이 여기서 이겨 버린다면, 철면인의 체면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당연히 이후 작전에서도 발언권이 흔들릴 터.

문제는 여기서 백학검선이 지는 것인데, 위중악은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지 않았다.

'흑도련 고수들은 다 중국 서버에 있고, 다른 낭인들이 온다 해도 백학검선을 이길 수는 없다.'

살막주나 천마라도 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

정말 만약의 경우 살막주가 오더라도, 그땐 대처법이 있었다.

-위중악 : 할 수 있지?

-백학검선 : 뭐 이런 거 가지고…… 족보도 없는 놈 따위야, 금방 이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백학검선은 이번 싸움에서 전혀 패배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 간단하다.

위중악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지금, 백학검선은 중국 내 랭킹 100위 안쪽.

감히 이름도 밝히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 따위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중악 : 최대한 깔끔하게 이기도록 하게나.

-백학검선 : 맡겨만 주십시오.

두 사람은 은밀히 메시지 창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후 막사 바깥에 임시 전장이 마련되었다.

"다들 준비!"

"PVP는 3판 2선승제, 룰은 주변 버프랑 포션 없이!"

전투가 시작된 순간, 백학검선은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가볍게.'

첫 공격은 백학포익.

학이 날개를 편 자세를 통한 공격으로, 실패하더라도 무난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엄백호란 저 녀석, 아무리 그래도 이거에 쓰러지진 않겠지?'

주문한 대로 최대한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주려면 최대한 오래 살려 둬야 했다.

'뭐, 한 방에 죽는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

그때였다.

백학검선의 검이 가까이 오는 동안 가만히 있던 엄백호가 일순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헉!"

"무슨!"

극성에 이른 천마무영보 스킬로 거리를 좁힌 것이다.

'마, 막아야…….'

백학검선은 본능적으로 검을 회수했다.

그러나 사거리 안에 든 엄백호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저, 저 녀석…….'

시작 전 깨뜨려 주겠다고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전혀 없는 모습.

엄백호의 초식이 공격으로 넘어간 순간, 백학검선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사, 살려 줘! 항복할게!"

살라스 성 별동대의 사령관이 누군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