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무림맹과 혈교.
중국 서버가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던 이 두 세력은 사실상 중국 서버 그 자체이기도 했다.
황궁이나 새외 세력도 있지만, 유저의 절대다수가 속한 세력이자 문파는 역시 무림맹과 혈교 두 곳.
비록 흑도련에게 연이어 강펀치를 맞았지만, 아직 혈교와 무림맹 모두 지금까지 숨겨둔 비장의 수가 몇 개 더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쓰기 위해 보존해 두었거나, 혹은 그 때는 쓸 수 없었던 패들.
사사풍은 그 중 한 명을 이번 원정에 투입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철면인이 버림패로 쓰더라도, 그들이라면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드림 라이프 상대라…….'
일월패도 명일섭.
랭킹에 비공개 설정을 걸어 놓았던 그가 바로 혈교 측이 숨겨 놓은 패였다.
그럴 만했다.
혈교의 강력한 기인 NPC.
일월쌍마의 비전을 소화하는 수련을 빙자한 연계 퀘스트를 마친 그의 레벨은 무려 490에 다다라 있었으니까.
'프로메테우스 놈들과는 또 다르군.'
명일섭은 날아오는 화살들을 도신으로 튕겨 내며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보다 난전에 능숙한 유저들이고.'
그 사이 이어지는 드림 라이프 유저들의 연계!
도적들이 쇠 그물을 던지면 뒤를 이어 수리검이나 투창 등의 소모품이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나쁘게 말하면 싸우는 방식이 지저분하군.'
패턴과 지시에 따르는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드림 라이프 유저들은 보다 난장판인 싸움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좋지 않았다.
스타일이 서로 비슷하다면, 스펙이 좋은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 맞았으니까.
"하아앗!"
"일단 피해 주고."
명일섭은 크게 도를 휘둘러 공격을 걷어 내고 뒤로 물러났다.
일월회륜.
원을 그리며 뻗어 나온 검기가 달려들던 드림 라이프 유저들을 덮쳤다.
"이 정도쯤이야……어?"
"커헉!"
중국 유저들이라고 패기 있게 들어가던 빡겜반 유저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검기를 맞은 유저들은 단번에 사망.
충격파나 검기 조각을 튕겨 낸 유저들도 체력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 방이라고?"
"잠깐만……."
드림 라이프 최상위 랭커들을 상대로나 나올 법한 수치.
놀란 유저들을 향해 달려든 명일섭이 사방으로 도를 휘둘렀다.
"크아악!"
"아악!"
빡겜반 유저들도 랭킹 안에 드는 랭커들이었지만, 명일섭의 공격은 그 이상이었다.
순식간에 유저들을 정리한 명일섭의 표정이 굳었다.
'프로메테우스 대신 드림 라이프라…….'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중국 원정대는 프로메테우스와 싸우며 힘이 빠졌고, 드림 라이프는 그 틈을 정확히 노려 공격해 왔다.
그러나…….
'후회하게 될 거다, 드림 라이프.'
각종 버프를 받은 원정대는 오히려 철면인이 살아 있을 때보다 강해진 상태!
그런 벌집을 건드렸으니, 이제 중국 원정대란 벌들의 무서움을 보여 줄 차례였다.
'아직 내가 전면에 나설 때는 아니니, 눈에 띄지 않게 킬 카운트나 올려야겠군.'
그때였다.
명일섭이 전투를 속행하려 할 무렵.
파앗! 붉은 빛이 주변뿐만 아니라 전투가 진행 중인 전장 전체를 비쳤다.
동시에 공중에 나타난 붉은 혈룡의 형상.
'저건……!'
명일섭의 눈이 커졌다.
'혈룡강림! 저 스킬이 도대체 왜 드림 라이프 쪽에서!'
명일섭은 혈교 쪽 소속 유저.
당연히 혈룡강림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분명 혈교 쪽에 있을 거라 여겨지던 최상급 광역 강화 스킬인데…….'
경악에 잠겨 있던 명일섭의 의문은 곧 풀렸다.
붉은 혈룡 아래 있는 창수의 모습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무혈사신……첩자 놈…….'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설명을 들었기에 명일섭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눈치챘다.
고액에 영입되어 각종 히든피스를 받아먹고, 중요한 순간에 철면인의 편에 붙은 한국인 배신자!
'철면인을 따른다더니, 그새 흑도련을 배신하고 한국 놈들에게 붙었군.'
명일섭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빠질 때 빠지더라도, 저 녀석에게 혈교의 무서움을 보여 주고 가야겠군.'
천잠귀월보.
명일섭은 평소답지 않은 은밀한 움직임으로 무혈사신에게 가까워져 갔다.
'한 방, 스킬 연계까지 합쳐서 세 방 안에 숨통을 끊고 빠진다.'
세 번의 공격으로 한국의 랭커를 죽이는 일은 암살자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명일섭은 자신이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폐관 수련으로 쌓은 레벨과, 퀘스트를 깨고 얻은 새 스킬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무혈사신은 드림 라이프 유저들의 가장 앞에서 싸우고 있었다.
굳이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지금!'
거리를 좁히던 명일섭의 눈이 번쩍였다.
동시에 붉고 푸른 두 색깔의 검기가 무혈사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죽어랏!"
명일섭은 재차 검기를 만들어 내며 외쳤다.
제우스의 일곱 번개들이라도 맞으면 죽는 위력의 초식!
처음 공격을 피해 내더라도, 재차 공격을 받는 순간 그대로 베어지리라.
그때였다.
검기를 인식한 무혈사신이 창을 한 차례 접었다가 엄청난 속도로 휘둘렀다.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내력이 끊겼습니다.
"컥!"
가까이 와 있던 명일섭의 몸이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무혈사신의 공격에 방금 전 내던 속도까지 겹쳐지자 엄청난 대미지를 입은 것이다.
쿠당탕.
단숨에 엎어진 명일섭의 눈이 곧바로 뜨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불굴의 의지.
사망에 이르는 공격을 받을 시, 한 번 일어나게 해 주는 효과가 발동한 것이다.
'아무리 창수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만한 대미지가……!'
명일섭은 눈을 크게 뜨고 항의하려 했다.
그러나 무혈사신의 창이 머리에 맞는 게 한 발 더 빨랐다.
-명일섭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띠링!
메시지를 확인한 무혈사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녀석은 좀 거물이군. 경험치가 꽤나 올랐어.'
방금 공격해 왔던 중국 유저의 스펙은 분명 강했다.
그러나 낙성곡에서의 전투, 그리고 재귀와의 싸움 및 쥬그로와의 전투를 마친 무혈사신의 능력은 그 이상이었다.
게다가…….
'혈룡강화 버프가 있고 없고도 차이가 나고 말이지.'
광역 강화 스킬 중에서도 최상급의 강화 스킬.
혈룡강화는 무혈사신이 중국 서버에서 얻은 가장 큰 재산 중 하나였다.
'어쨌건 이대로라면 엄청난 이득을 얻겠군.'
수십만 중국 유저들을 쓸어 버리며 얻는 경험치와 아이템.
가산점 수치가 없다 해도 분명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리라.
표정을 굳힌 무혈사신은 재차 창을 휘둘렀다.
'민혁 형님이 목숨으로 만든 기회이니, 한 놈이라도 더 많이 죽인다!'
철면인이 김민혁이란 사실은 무혈사신과 베르한을 비롯한 극히 일부만 아는 비밀.
그들로써는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 간단하다.
여기서 이득을 보지 못하면, 추후 어떤 소릴 들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못 얻은 경험치를 보충해야 한답시고 지옥 캠프 사냥에 데려갈지 몰라!'
'군대 체험도 아니고……아무리 경험치가 높다지만 그건 두 번 다시 사양이야!'
***
중국 원정대와 드림 라이프 길드 사이의 전투!
처음 그 소식이 알려진 것은 중국 와이보우의 원정대 중계 커뮤니티였다.
-한국 놈들이 습격해 왔다!
-이거 싸움 규모가 꽤나 큰데?
한국 서버 원정대는 중국 커뮤니티에서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
실시간으로 중계를 하고 있던 스트리머 유저들이 급히 자리를 잡았다.
-한국 유저들의 정체는 드림 라이프 길드라고요? 다들 들었죠! 드림 라이프 대 원정대입니다!
-프로메테우스 대신 드림 라이프와 싸우게 됐네요. 저도 곧 참전하겠습니다.
중국 유저들의 반응에 이어, 위험한 지역을 찾아온 한국 스트리머들의 채널도 실시간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반격하라!"
"철면인이 없어도 원정대의 힘은 강하다는 걸 보여 주어라!"
"비겁한 암수를 쓴 한국 놈들에게 응징을!"
사방에서 몰려온 중국 유저들이 무공을 쓰며 달려들었다.
드림 라이프 측 마법사들이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플레임 리버!"
"어스퀘이크!"
넓은 전장에 영향을 주는 광역 마법들이 연달아 작렬!
"으아아악!"
"불길이 밀려온다앗!"
혼란에 빠진 중국 유저들에게 드림 라이프 유저들이 다가갔다.
"죽어랏!"
"에라이!"
체력이 많이 깎여 있었기에, 간단한 공격으로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쪽도 만만치 않았다.
-불굴의 의지가 발동했습니다.
-HP가 10인 상태로 부활했습니다.
"이대로 갈 쏘냐!"
"크아아아!"
분명 HP가 0이 된 유저들이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불굴의 의지 버프의 효과!
물론 체력이 바닥이었기에 금방 죽일 수 있었지만, 껄끄러운 건 껄끄러운 것이었다.
초반엔 이런 식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비등한 싸움을 이어 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우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컥!"
"윽!"
"커헉!"
드림 라이프 빡겜반을 막고 있던 정예 랭커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부, 분명 기본기인데."
"어떻게 기본 스킬이 저렇게……"
바닥에 누워 있던 정예 랭커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이 마재훈은 천천히 적의 대열을 돌파해 나갔다.
상대가 무공을 쓸 때 보이는 틈마다 정확히 공격!
본래 있던 컨트롤에 스펙까지 더해지자, 마재훈을 막을 수 있는 유저가 보이지 않았다.
"마동석!"
"마동석!"
빡겜반 유저들은 신나게 이름을 부르며 뒤따라갔다.
다른 요충지들의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네크로맨서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건 좀 아쉽군."
원샷 원킬의 대미지에, 광역 디버프까지 뿌려 대는 지존법사.
"대형 몬스터 사냥이 전문이긴 하지만, 이런 폭업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암요."
500레벨대 몬스터의 갑피도 우그러들게 만드는 쇠기둥을 휘두르는 베어그릴스에.
"다들 공격!"
"캬오오!"
"크허엉!"
동물들을 떼거지로 이끌며 진격하는 아마란스까지.
"됐다! 이긴다."
"밀어붙여!"
심지어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후열에 있던 음유시인 랭커들, 무희나 요리사 등 비주류 유저들이 일제히 버프를 걸어 준 것이다.
-
'전우여!'
를 불렀습니다.
-주변 50cm 안에 아군이 있을 시 체력과 방어력이 5%씩 상승합니다.
-멸적의 횃불을 불렀습니다.
-공격력과 치명타 확률이 7%씩 상승합니다.
"싸우기 전에 먹고 가세요!"
"든든한 특제 설렁탕 먹으면 체, 방, 스태미나가 10퍼센트씩!"
"지금 먹으면 공짜로 드립니다!"
중국 유저들을 내쫓는 일에 기꺼이 재료를 공짜로 내놓는 요리사들!
싸우기 전에 든든히 배를 채운 유저들의 공격이 한층 강력해졌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많은 유저들이 조금씩이나마 힘을 보탰다.
드림 라이프 길드원뿐만 아니라, 중국 유저들에게 밀려났던 일반 유저들도 끼어 있었다.
그런 노력이 하나둘씩 겹치자 마침내 중국 유저들의 철벽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놈들의 대열이 무너진다!"
"전부 때려잡아! 다시는 한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해!"
원군이 오는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중국이 저 언덕은 내주면 안 되는데요!"
"저대로 밀려나면, 답이 없어요!"
최신식 TV 화면 안.
상황을 중계하던 캐스터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군>
-남은 인원 : 411,232명
-주요 간부 : 위중악(생존),월백(생존),루피(생존)……
-색깔 : 붉은색
<드림 라이프>
-남은 인원 : 98,811명
-주요 간부 : 무혈사신(생존),마동석(생존),지존법사(생존),바하(생존)……
-색깔 : 푸른색
화면 옆에는 대략적인 상태 창이 떠 있어 시청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TV 화면의 맞은편.
"예상대로군."
사망으로 인한 자동 로그아웃 이후 TV를 보던 웨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무난하게 이길 수 있겠어."
위중악이 결사항전 스킬까지 쓴 건 예상 밖이었지만, 그래도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구도를 만드는 '플레이메이커'급 유저가 얼마나 있는지였으니까.
그 점에서 드림 라이프 길드의 유저들은 프로메테우스와 대등할 정도.
아니, 그 이상이었다.
'내 캐릭터가 죽는 걸 전제로 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이득이군.'
레벨 다운과 아이템 드롭을 피할 수는 없지만, 대신 중국 유저 전체에게 디버프를 넣었다.
한 명의 유저로써는 아쉽지만, 드림 라이프의 길드장이자 한국인으로써는 속이 시원할 일.
게다가…….
'어차피 떨어뜨릴 아이템은 프로메테우스와 협상하기 전 모두 창고에 넣어 뒀으니, 딱히 흘린 아이템도 없고 말이지.'
미리 사망 시 손해를 최소한으로 줄인 덕분에, 승전 경험치를 얻으면 오히려 이득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닭 쫓던 개가 되겠군.'
중요한 건 이 전쟁으로 드림 라이프와 흑도련 모두가 이득을 취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한 번 죽어 줄 만한 가치는 있었다.
'전생과 달리 중국 놈들의 침공도 더 이상 없을 테고.'
한국 쪽에서 공격한다면 모를까.
이번 패배로 중국 서버는 감히 한국 서버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프로메테우스가 뒤통수를 맞은 걸 보았으니, 더 이상 아무도 중국 유저들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은 다 이룬 셈이지.'
씩 웃은 웨인은 컴퓨터를 통해 메시지 창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이 전쟁을 끝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