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은 란디오스 쪽이었다.
"합!"
란디오스가 앞으로 나서서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같이 나온 검기가 웨인을 향해 날아왔다.
검기에 스치기만 했는데도 웨인의 HP가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탱커치고는 빠른데?"
첫 공격이 빗나간 란디오스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뿐이었다.
쉬지 않고 움직인 란디오스의 검이 웨인의 전신을 노렸다.
방어 스킬을 썼지만 곳곳에서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었다.
투기장 전용 장비를 쓰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
'란디오스라…….'
이어지는 연계를 피해 물러난 웨인이 생각했다.
'기억에 있는 이름이군.'
란디오스.
현 시점에서 그는 KU 소속이란 것 외에는 딱히 평범한 유저였다.
전체 랭킹 161위.
강하다면 강하다 할 수 있지만, 제우스의 번개나 미라클 길드원들처럼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웨인은 절대 방심을 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생의 기억 속에 있는 20년 후의 미래.
란디오스는 그곳의 랭커 명단에서도 언뜻 보인 적이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20년 후에도 현역 랭커로 남아 있는 건 쉽지 않지.'
아니,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전생에서도 그게 가능했던 건 대기업의 힘을 업거나 정말로 천재인 몇몇만이 가능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놈들은 대개 숨겨 둔 한 수가 있는 법이고.'
콰앙!
란디오스의 검격을 피한 웨인이 생각했다.
'그 전에 단번에 끝을 낸다.'
웨인은 곧바로 웨폰 쓰로잉을 사용했다.
란디오스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그럴 줄 알았다! 하압!"
란디오스의 검이 웨인을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나 던져진 망치가 한 발 더 빨랐다.
'무난하겠군.'
그때였다.
웨인이 마무리를 준비할 무렵.
갑자기 란디오스의 온몸을 푸른 보호막이 덮었다.
티티티티팅!
보호막 위로 맞은 망치들은 덧없이 튕겨 나와 사라졌다.
데미지를 받지 않은 란디오스의 공격이 그대로 쇄도!
'저건……!'
웨인은 번개 공명을 사용해 란디오스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지금 생각났다. 란디오스가 누군지.'
방금 전까진 긴가민가했지만, 푸른 보호막을 본 순간 확실해졌다.
'저 녀석, 원거리 스킬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놈이었지.'
란디오스의 스펙과 컨트롤은 그저 그랬다.
최상위 랭커의 평균 수준은 되지만, 그 이상은 아닌 정도.
하지만 란디오스가 20년 후의 미래에서도 유명세를 유지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대원거리 공격 카운터!
란디오스는 산악의 검사에게 받은 스킬들을 통해, 모든 원거리 공격의 데미지를 90% 가까이 줄일 수 있었다.
'마법사랑 궁수들의 인간상성…… 그 때문에 게시판에 항의가 올라왔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스킬 대다수가 원거리인 마법사나 궁수들에게 있어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
원거리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마찬가지였기에, 란디오스는 20년 후에도 그 특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확실히 어려운 상대군.'
현재 웨인이 쓰는 꼼수는 웨폰 쓰로잉 스킬을 이용한 무한 원거리 투척.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건, 순수한 근접 컨트롤만으로 싸워야 한단 뜻이었다.
웨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승산은 60 대 40 정도.'
물론 60이 란디오스 쪽이다.
꼼수 없이 대장장이와 전투 클래스 간의 차이를 뒤집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게다가 지형도 좋지 않아.'
결투장의 지형은 바다와 모래사장, 그리고 숲.
셋 다 웨인보다 란디오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시간을 끄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
물론 어느 정도 싸울 수야 있었지만, 아예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 PVP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상을 벗어난 꼼수가 필요했다.
'어쩔 수 없군.'
고민하던 웨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 스킬을 쓸 수밖에.'
란디오스의 허를 찌르면서도 확실히 승기를 가져와야 하는 것.
웨인이 생각해 낸 건 두 가지 모두를 만족하고 있었다.
"왜 망치를 던지지 않지?"
그때였다.
공격을 이어 가던 란디오스가 물었다.
"다른 랭커들 썰로는 네가 망치 던지기 꼼수로 승리를 날먹했다던데."
"날먹?"
"그럼 날먹이지."
정석대로 싸웠다면 대장장이 유저는 최약체 중의 최약체.
웨인이 타 랭커들을 이겨 온 건 어디까지나 웨폰 쓰로잉 덕이었다.
"만약 제대로 정정당당히 싸웠다면 지금까지 무패 연승만 하진 않았을 테니까."
란디오스가 으르렁거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가만히 있던 웨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 것은.
"이해할 수 없군."
"뭐?"
되묻는 란디오스를 향해 웨인은 피식 웃었다.
"아니꼬우면 너도 대장장이 해서 꼼수 쓰던가."
"……!"
졸지에 기만을 당한 란디오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웨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기가 밴픽이 있는 게임도 아니고, 내가 가진 스킬을 다 써서 우위를 점하는 게 뭐가 나쁘지?"
"그야……."
"너도 네 스킬들을 써서 궁수, 마법사들의 승점을 갈취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는 것도 웃기는군."
"그건 내 클래스 스킬……."
"나도 그런데?"
"……."
구구절절 이어지는 말에 란디오스의 입이 닫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웨인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 스킬만 써서 이기는 게 싫다면, 다른 스킬들도 보여 주지."
순간 웨인의 주변을 바람의 막이 감쌌다.
풍왕륜.
바람의 막을 둘러 몸을 보호한 것이다.
"큿!"
둘이 있는 곳은 모래사장.
바람의 막이 생성되자 주변의 모래가 떠올라 시야를 가렸다.
'얕은 꼼수를……!'
그러나 란디우스도 한국 서버의 최상위 랭커.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스킬을 쓰기 전에 끝내 버리면 되지.'
그때였다.
스윽, 스킬을 쓰던 란디우스의 몸을 각종 나무의 넝쿨이 묶은 것은.
"……뭐, 뭐야!"
넝쿨뿐만이 아니었다.
칼을 휘두르려던 란디오스의 머리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쉬이잇!"
"라, 라쿤 군대개미!"
라쿤 군대개미.
사냥터에나 있어야 할 몬스터가 대여섯 마리씩 무더기로 등장한 것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혼란스러운 표정의 란디오스였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파앗!
궤적을 그은 검이 넝쿨과 다가오는 군대개미를 동시에 베어 냈다.
"캬아아!"
괴성을 지르며 쓰러지는 군대개미.
다른 군대개미들이 동시에 공격해 왔지만, 란디오스는 능숙하게 다리와 입을 피하며 공격했다.
라쿤 군대개미의 무서움은 떼를 지었을 때 나타난다.
즉, 서너 마리와 싸울 때는 해볼 만하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동안 상대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거지.'
란디우스는 신중하게 주변을 경계하며 싸웠다.
그러나 마지막 군대개미를 쓰러뜨릴 때까지 웨인의 공격은 오지 않았다.
"하압!"
파삭!
군대개미의 머리통을 깨뜨린 란디오스가 생각했다.
'대략 31초, 고위 스킬을 시전한다면 이미 하나쯤은 완성됐겠군.'
상관없는 일이었다.
근거리 공격이라면 시간을 끌면 되고, 원거리라면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이제…….'
슥, 고개를 돌린 란디오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동시에 란디오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마, 맙소사."
그 자리엔 온몸에서 번개를 뿜어내는 웨인이 서 있었다.
30초.
웨인이 그동안 아무 공격도 하지 않은 것은, 바로 각종 버프 스킬을 모조리 몸에 두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촤라락.
모래바닥에서 튀어나온 넝쿨들이 란디오스의 발목을 잡았다.
"아……."
순간 란디오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동시에 번개 거인처럼 변한 웨인이 있는 힘껏 망치를 내리찍었다.
***
-PVP를 승리했습니다.
-원시 고대 투기장 점수가 +17 상승했습니다.
-아레나 포인트 139점을 획득했습니다.
-54연승!
-추가 아레나 포인트 33점을 획득했습니다.
"후우."
전투가 끝난 후.
웨인은 대기실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은 아니었다.
후회의 한숨이었다.
'밑천을 너무 쓴 건 아닌가?'
숨기고 있던 스킬을 모두 사용한 것에 대한 후회였다.
'확실히 이기려고 숨겨 두었던 스킬까지 다 보여 버렸군.'
기존에 있던 버프에, 중국 서버에서 얻은 버프 스킬들까지.
그래도 확인한 건 있었다.
'제석천의 뇌전 스킬은 같이 쓰면 시너지가 엄청나군.'
기존의 대장장이 스킬도 강력했지만, 제석천의 스킬은 차원이 달랐다.
'괜히 교단의 수호자 자리에 경쟁이 붙은 게 아니었어.'
어쨌건 위력을 확인해 보았으니 쓸 만한 가치는 있었다.
'게다가 란디오스는 거기서 끝내지 않으면 안 되기도 하고.'
웨폰 쓰로잉이 통하지 않는 이상,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웨인이 불리하다.
그것까지 감안하면 그렇게 심하게 과투자를 한 건 아닌 셈이었다.
'그럼 다시 가 볼까?'
현재 웨인의 원시 고대 투기장 랭킹은 81위.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웨인은 다시금 매칭을 돌렸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랭킹 점수를 올리기 시작했다.
-PVP를 승리했습니다.
-PVP를 승리했습니다.
-PVP를 승리했습니다.
-…….
매칭을 돌릴 때마다 나타나는 최상위 랭커들!
그중엔 절호조를 맞은 프로게이머, 혹은 컨트롤의 정점이라 불리는 대형 길드의 비밀병기들도 있었다.
그러나 웨폰 쓰로잉이라는 희대의 '날먹' 앞에서는 그들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실제로 전생에서 데오마론은 이 스킬로 잠시나마 원시 고대 투기장 랭킹 1위를 달성했었으니까.
'원시 고대 투기장에서 스킬 밴이 된 드문 경우지.'
스킬을 너프하면 쓰레기 스킬이 되고, 내버려 두면 사기가 되는 상황.
그보다 더 이전인 지금은, 웨인을 막을 사람이 더욱 없었다.
수일 후.
웨인은 마지막 싸움을 끝냈다.
-PVP를 승리했습니다.
-원시 고대 투기장 랭킹 1위를 달성했습니다.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새로운 칭호 '태고의 패왕'을 획득했습니다.
-해당 칭호는 스테이터스 창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레나 포인트 15,000을 획득했습니다.
-'황금 돌도끼'를 획득했습니다.
-'패왕의 휘장'을 획득했습니다.
-원시 고대 광휘의 닉네임 표지 장식을 획득했습니다.
-숨겨진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원시 고대 투기장 1위를 달성했습니다.
-원시 고대 챔피언 메달을 획득했습니다.
-5,000골드를 획득했습니다.
-투신의 버프x3을 획득했습니다.
-버프 1 : 투신의 힘
- 힘 스테이터스가 5% 상승했습니다.
-버프 2 : 투신의 의지
- 상태 이상 저항력이 5% 상승했습니다.
-버프 3 : 투신의 용기
- 일반, 스킬 공격력이 5% 상승했습니다.
스펙 업에 필수적인 랭킹 1위 보상들을 획득!
특히 태고의 패왕은 반드시 얻어야 하는 칭호였다.
'모든 스테이터스를 1%나 영구적으로 올려 주는 꿀 칭호를 놓칠 수는 없지.'
그동안은 다른 일이 바빠서 챙기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가져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투신의 버프.
랭킹 1위를 찍은 유저는 원시 고대 투기장의 챔피언에게만 주어지는 특수한 버프까지 얻을 수 있었다.
'한 서버의 최상위 컨트롤 보유자에게만 주어지니는 버프이니 효과도 크지.'
해당 스테이터스가 5%씩 오르는 사기 버프!
물론 영구적으로 지속되진 않는다.
주어지는 버프는 클래스에 따라 달라지고, 또한 시즌이 갱신되면 버프도 사라진다.
즉 버프를 유지하려면 매 시즌마다 원시 고대 투기장 1위를 찍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세부적인 스테이터스나 업적들도 모두 도움이 되니까.'
단순히 버프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나 대규모 이벤트 개최 시 출전 우선권도 주어진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노가다를 뛸 만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아직 작업이 끝난 건 아니지.'
나중에 순위를 뺏기지 않으려면 지금 계속 돌려 점수 차를 벌려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1위 달성과는 별개로, 투기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을 위해선 더 많은 포인트도 필요했고 말이다.
'그럼 매칭이 돌아가는 사이에 그것도 사 볼까?'
웨인은 새로 매칭을 잡은 뒤 상점을 열었다.
차라락.
순식간에 나타나는 카테고리에서 웨인은 능숙하게 재료 분류만을 골라 열었다.
-라그나의 화염석
-피닉스의 깃털
-데블 아이의 눈
각종 희귀 재료들을 제치던 웨인의 눈이 한 곳에 멎었다.
'찾았다.'
동시에 웨인의 입꼬리에 회심의 미소가 나타났다.
돈 되는 아이템을 찾은 '사업가'의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