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화
카이사는 대륙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일반적인 의미의 대륙이 아니다.
전 세계 이용자 수 20억 명. 각국의 문화와 가치관에 걸맞게 서버가 개설되어 있다.
모든 서버들이 카이사 대륙이라는 이름에 편입되어 있으니, 카이사 대륙은 실은 초대륙이라고 불러야 옳으리라.
일본 서버는 개중에서도 더욱 특이했다.
전 세계를 구석구석 뒤져 봐도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문화를 지닌 게 일본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본 서버는 열도를 받았다.
일본 서버 '카이사 열도'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당연히 카이사 대륙과 많은 게 남달랐다.
유럽에 오크가 나타난다면 일본에는 오니가 나타난다.
미국에 마법사가 있다면 일본에는 음양사가 있다.
한국에 드래곤이 있다면 일본에는 다이텐구가 있었다.
지로보는 바로 그 다이텐구 중에서도 상위에 속해 있는 존재였다.
한국 서버 기준으로는 스페셜 네임드 보스 몬스터.
금(金) 속성을 지닌 다이텐구 지로보는 타고난 신력으로 어지간한 음양술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이놈은 죽일 수 없다.'
일본 음양사 랭킹 1위 세이메이가 7일 밤낮을 겨루고 나서 내뱉은 말이었다.
실력으로는 세이메이가 지로보를 앞섰지만 지존에 가깝다는 그의 음양술로도 지로보를 해할 수 없던 거다.
파괴력이 높은 음양술로도 해하지 못한 몬스터, 그렇다면 검술은? 당연히 무리다.
무사시라도 만나면 모를까, 그 외에는 적수가 없는 최강 급 몬스터.
그런 지로보가 지금 바닥에 납작 엎드려 말하고 있었다.
-커, 커헉…… 제발, 제발 목숨만은…….
상대가 나빴다.
아니, 상성 관계라는 말도 잘못되었다.
'타이틀, 금속의 지배자.'
쇠를 날리면 망치로 쇠를 다스리고.
'뇌전! 공명!'
낙뢰를 달리면 번개를 흡수해 버린다.
최근 작업과 단체전만 하느라 가려져 있었지만, 그렇다. 금속과 번개의 주인. 그게 바로 웨인이었다.
-크…… 크으…… 다, 다가오지 마라!
"3시간 동안 같은 대사 날리기도 지겹지 않냐?"
-3시간 동안 처맞았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다!
다이텐구 지로보가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석장을 흔들었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형님! 놈이 무슨 수를 쓰는가 본데요."
"나도 눈 있다."
속성을 생각해 보면 큰 해는 없겠지만 김민혁은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냉혹한 고인물 플레이어에 가깝다.
다이텐구가 대(大)주술을 사용하려한다. 필경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음양사라는 건, 결국 마법사거든.'
마법사의 최종 스킬 중 하나인 헬파이어.
최강의 공격 마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헬파이어를 맞으면 레벨이 더 높은 상대라 할지라도 죽는다.
그러나 실제로 헬파이어를 맞고 죽는 검사는 몇 없다. 마법사들도 대인전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캐스팅이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헉!
막 술법을 완성하려던 지로보가 깜짝 놀랐다.
웨인이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까지 점프한 것이다.
전광석화. 번개의 야금술이 힘을 발했다.
"그만해, 인마."
망치가 치솟아 오른다.
-아, 안 돼!
"돼!"
쾅!
-그아아아악!
지로보의 거구가 무너졌다.
3시간 동안의 격전 끝에 결국 다이텐구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 새끼! 감히 날 대머리라 놀려!"
무혈사신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그, 그만! 그만해라, 이 중놈아!
"뒈져라!"
-제, 제발. 고명하신 스님이 이 무슨…….
"또 날 대머리라 놀려?"
퍽퍽퍽퍽!
지로보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주먹만도 못한 인간 모험가 따위가 그 모기만 한 주먹으로 자기를 때린다.
근데 아프다. 미친 듯이 아팠다.
-그, 그만, 내가 졌다.
"어쩌라고? 그냥 죽을 때까지 맞아라!"
"잠깐."
"왜 말리십니까, 형님?"
"생각해 보니 이상하군. 우리가 3시간이나 때렸는데 안 죽다니."
김민혁은 턱을 쓸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군. 왜 놈이 죽지 않는 거지?'
자신과 무혈사신의 합공이라면 드래곤조차 1시간 안에 죽일 수 있다.
지로보가 강하긴 하지만 한국 서버의 에이션트 드래곤보다 강한 건 아니었다. 비슷한 정도긴 하지만 말이다.
'이 공간이 문제인가?'
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로보라고 했나."
-예, 예. 나리.
다이텐구의 위엄 따윈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너를 살려 주지. 원한다면 계약서도 써 주겠다. 대신 네가 갖고 있는 술법이나 아이템을 내놓으면 돼. 어떠냐?"
깔끔한 제안. 다이텐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습니다.
"좋아. 그럼 일단 이 결계부터 풀지."
-계, 계약서부터 써 주시죠.
"결계부터."
끄응…… 다이텐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10시간만 기다리십쇼.
"……?"
"뭔 수작이야, 이 새끼가 또!"
-수, 수작이 아닙니다.
다이텐구가 기겁하며 답했다.
-방금 쓰려 했던 술법이 공간을 뚫고 가는 술법이란 말입니다. 이 술법, 다시 쓰려면 10시간이 걸립니다.
웨인과 무혈사신이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방법이 있나?"
-그, 그건 안 됩니다.
"있군."
웨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혈사신이 손목을 붕붕 돌렸다.
-자, 잠깐만. 그건 저희 텐구족의 비밀…….
"구명지은의 은혜를 입은 상대에게 비밀이라니, 실망이군."
-아니, 그건 절대로 안 됩…… 크흑!
퍽.
-크어억!
뚜둑.
-끄아악, 내 코!
휘리릭, 쿠당탕.
-거, 거긴 안 돼! 노래 주머니란 말이다!
콰악!
-끄아아악!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웨인은 망치를 들고 말했다.
"다음엔 내 차례다."
-나, 나리!
"말할 거지?"
-네, 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순간 검은 망치가 지로보의 정수리를 쳤다.
퍼억!
졸지에 얻어맞은 지로보는 텐구답지 않게 눈물까지 찔끔 내며 따졌다.
-왜, 왜 때리는 겁니까!
"그냥."
어찌 됐건 이제는 들을 차례.
웨인과 무혈사신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지로보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 공간을 뚫고 가는 건 원래 텐구의 술법인 땅바꾸기인데, 원래는 10시간이 걸립니다만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
-네, 결계의 힘을 무력화하는 피문의 구슬입니다. 그게 있으면 나갈 수 있지만, 제조법이 좀 어려운지라…….
순간 웨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만드는 아이템이군.'
다이텐구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재료와 제조법이었다.
"아오, 형님. 귀찮은데 그냥 이 녀석 죽이고 가죠?"
무혈사신이 창을 들었다.
술법은 시전자가 죽으면 대부분 풀리니 맞는 말이었다.
-아, 안 됩니다.
"뭐가 안 돼!"
-절 죽이면 여길 나가는 덴 300시간이 걸립니다!
막 창을 움직이려던 무혈사신이 멈칫했다.
"뭔 소리야?"
-키무이의 술은 한 번 쓰면 해제할 수 없습니다. 주변의 기를 빨아들여 계속 유지되니까요.
원래 술법은 쓰는 동안은 시전자의 마나를 빨아들인다.
음양사가 죽으면 술법이 전부 해제되는 것도 그런 이유.
그러나 키무이의 술은 일단 쓰기만 하면 시전자와 관계없이 계속해서 유지가 되는 강력한 술법이었다.
대텐구, 그중에서도 술법에 능한 지로보만이 쓸 수 있는 기술!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웨인은 인벤토리에서 모루와 망치를 꺼낸 뒤 말했다.
"그 피문의 구슬이라는 것, 재료랑 제작법이 뭐지?"
-그건…… 설마 여기서 만드실 겁니까?
"가만히 10시간 동안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야외에서 작업을 해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웨인은 망치를 들며 생각했다.
'일본 서버의 아이템을 만드는 건 처음이군.'
***
<피문의 구슬>
-분류 : 일반
-등급 : 레전더리
-내구도 : 없음
-제한 : 없음
-효과 : 사용 시 공간 왜곡 계열의 주술 1개 해체 가능, 쿨타임 10분, 사용 MP 회당 15,000
-기타 : 텐구들의 보물, 공간을 왜곡하는 모든 힘을 막아 준다.
스윽, 구슬을 본 웨인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완성했다."
"세상에…… 여윽시 형님……."
무혈사신이 감탄했다.
"용광로도 없이 생으로 밖에서 스킬만으로 그게 됩니까?"
"숙련도랑 스텟 덕분이지."
워낙 스펙이 높다 보니 임시로 꺼낸 재료만으로 제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보를 확인한 웨인은 지로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지켰군, 가 봐도 좋아."
-가, 감사합니다, 나리.
"참, 그리고."
흠칫!
조금씩 뒤로 물러나던 지로보의 어깨가 출렁였다.
그 모습을 보던 웨인이 말을 이었다.
"여기 놈들 말인데……."
-아, 그건…….
까마귀 산을 부수고 텐구들을 죽였으니, 이제 그 전리품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리라.
지로보가 의례적으로 괜찮다 하려는 순간, 웨인이 입맛을 다시고 먼저 말했다.
"마을을 부순 건 미안하게 됐다."
-그 말씀은…….
"너희도 먼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이거랑 퉁 치지. 이후로도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나도 너희들을 적대하지 않겠다."
예상밖의 내용에 지로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진짜로 살려 주시는 겁니까?
"나는 약속은 지킨다. 네가 먼저 지키는 한."
-…….
고개를 깊이 숙인 지로보가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웨인이 말했다.
"그럼 우리도 가자."
"네."
피문의 구슬을 결계에 갖다 대면 결계를 풀 수 있었다.
스윽, 웨인은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 있던 지로보가 크게 말했다.
-나리! 잠깐만!
"음?"
-목숨을 살려 주신 이 은혜, 이 자리에서 갚고 싶습니다.
"은혜?"
웨인은 아리송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죽지 않는 걸 억지로 때려잡기도 그렇고, 약속을 지켰으니 풀어 준 것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지로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음양사나 무사들은 요괴들과의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버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딱히 갚을 게 없었는데, 당신은 진짜인 듯하니 저도 보은을 해야겠지요.
"흠."
-저 지로보. 700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은과 원을 제대로 갚지 않은 적 없습니다. 목숨을 제대로 구함 받았으니 그만큼 보은을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지로보.
동시에 웨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히든 퀘스트인가?'
일본 서버에서 만난 첫 히든 퀘스트!
오는 떡 막는 김민혁이 아니었다.
"형님, 그냥 죽이죠? 저 녀석, 주는 아이템도 장난 아닐 거 같은데. 저희들 갈 길도 바쁘고 말이죠."
"쉿, 이런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야."
속삭이는 무혈사신을 제지한 웨인이 말했다.
"말해 봐."
지로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나리께서는 저와 비슷한 격을 가진 존재들을 사역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사역? 웨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격이라. 일본 서버에는 없는 몬스터. 그리고 우리 서버에는 있는 몬스터면…….'
곧 무언가를 떠올린 웨인이 말했다.
"드래곤, 아니 용 말인가?"
-그렇습니다.
지로보가 간신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긴 한데. 그건 왜 묻지?"
-다름이 아니라 X년 전 이 열도에 찾아온 한 행자가 용을 봉인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웨인의 눈에 크게 뜨였다.
'설마?'
행자라면 키클롭스가 틀림없었다.
중국 서버뿐만 아니라, 일본 서버에도 그 자취가 남아 있었던 것!
-그 장소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바로 그게 저의 보은입니다.
지로보가 다이텐구답지 않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