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나는 화나지 않았다 =========================================================================
“……!”
한동안 유지웅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최현주와 마주친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재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잔뜩 불안해하는 정효주가 느껴졌다. 맞다. 지금은 정효주와 사귀고 있다. 일단 그녀의 마음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정효주를 생각하자 그는 겨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목소리도 차분해졌다.
“오랜만이다.”
“오빠도 설마 소집된 거야? 어떻게…….”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유지웅이 능력을 상실한 것 때문에 둘은 헤어졌다. 그런 인물을, 국가가 레드 타입 괴수 레이드에 부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채 잇지 못한 그녀의 말은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는 의문을 나타내는 것이다.
유지웅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옛 여자친구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불안해하고 있는 현 여자친구를 위한 배려다. 어느 여자가, 자기 애인이 옛 여자 앞에서 흔들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까.
재회는 갑작스러웠지만, 몇 번이고 연습한 대로 그는 차분히 말을 꺼냈다.
“나도 소집됐어. 일단은 힐러 역할이야.”
“힐러? 하지만 오빠는 힐 능력을 잃었잖아?”
“잃었던 것은 아니야. 나도 몰랐는데, 그때 나는 각성 초기의 발아 상태였대.”
능력의 각성 과정이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연구된 게 별로 없었다. 인간은 각성된 능력을 일상생활에 활용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몇 가지 검증된 가설은 있었다. 능력자는 발아, 성장의 단계를 거쳐 자기 능력을 각성한다는 것이다.
발아는 능력이 눈을 뜬 단계를 말한다. 이 시기는 능력자가 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자인지는 알아볼 수 없다고 한다. 능력의 정체성이 결정되지 않은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즉, 이 시기에서는 아직 탱커, 딜러, 힐러, 어느 쪽이든 결정되지 않았다는 관점이다.
성장은 일단 각성한 능력이 뿌리를 내리는 시기를 말한다. 클래스가 확정되어 외관상 알아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기 상태의 육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걸로 비유할 수도 있다. 이 단계가 끝나면 비로소 제대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성장이 끝나기 전에도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그 위력은 유년기의 인간처럼 약하다.
보통 발아-성장 단계는 길어야 사흘, 짧으면 하루 만에 끝난다. 그러나 유지웅은 그 단계가 남들에 비해 몇 달이나 걸릴 정도로 길었다. 그 때문에 초기에는 딜러로 활동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윤성태 박사가 내놓은 가설이었다.
“……정말? 그럼 오빠는 힐러가 아니라 딜러나 탱커였다는 거야?”
“아니. 충격 흡수 능력자.”
“……뭐?”
“너도 알려나 모르겠다. 나 보호막 능력자로 활동하고 있어.”
순간 최현주의 안색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사귀던 시절에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급격한 감정 동요. 그녀는 딜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십 대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항상 차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놀라는 게 눈에 확 띄었다.
“어……. 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빠가 그 앱서버? 보호막 힐러?”
“이제 힐은 전혀 못해. 난 보호막 능력으로 고정됐어.”
“……맙소사.”
최현주가 비틀거렸다. 유지웅은 태연한 척 했으나 가슴이 쿵쾅거렸다. 감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헤어졌다. 그런 옛 애인의 앞에서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지금의 유능함을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은, 마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쾌감이었다. 아, 오늘부터 한국 드라마 꼬박꼬박 챙겨봐야지. 아니면 그냥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볼까? 드라마 제작비야 레이드로 감당하고 말이다.
“그 유명한 보호막 능력자가 유지웅 씨였던 건가요?”
말을 잇지 못하는 최현주를 대신해서 김서웅이 물었다. 유지웅은 당당하게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래요.”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은 했어요. 힐 측정기에 잡힌 수치에 오차 범위가 너무 심해서…….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겨우 자신을 추스른 최현주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오빠도 그럼 제12공격대에 편성된 거야?”
“어.”
“잘 됐다. 나 안 그래도 어글 높은데, 오빠랑 같이 있으면 한 방에 급사할 일은 없겠네.”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유지웅은 아무렇지 않은 척 팔을 빼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서운한 듯이 말했다.
“오빠, 매정하다. 나 민망하게. 헤어졌다고 이러는 거야?”
“현 애인에 충실해야지. 지금 보고 있잖아?”
“응? 아하하, 오빠, 설마 나랑 서웅 오빠 사이 오해해? 옛날에도 그랬지만 우리 별 사이 아냐. 서웅 오빠랑 같이 있던 것도 제12공격대에서 아는 얼굴이 서웅 오빠뿐이라서 그런 거구.”
“아니. 저 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유지웅은 자연스럽게 정효주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효주가 오해할까 봐 그래.”
“……둘이 사귀어?”
목소리가 착 가라앉는다. 눈빛도 가늘어졌다.
“좀 봐주라. 효주가 우리 옛날 사이 다 아는데, 사소한 거 때문에 책잡히면 나 마음 고생하거든.”
“…….”
“무사히 레이드 마치면 넷, 아니 셋이서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할까?”
“……그래. 술 한 잔 해. 꼭.”
주먹을 꽉 쥔 채 최현주가 쏘아보았다. 그가 아니라 정효주를. 이윽고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기 싫다는 듯이 그녀는 몸을 홱 돌려 다른 곳으로 갔다.
정효주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못지않게 그녀도 강하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이유리가 그제야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보호막 능력자였어요? 세상에! 이런 데서 마주볼 줄이야! 우리가 당신을 영입하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에이, 빈말이 과하네요. 난 쪽지 한 번 받아본 적 없는데.”
“ID를 알아야 쪽지를 보내죠! 막공 참가 인원 ID는 해당 공대장만 알 수 있는데, 그걸 공유하지를 않으니까 알 수가 없죠. 그렇다고 무식하게 집으로 바로 찾아갈 수도 없고. 힐러들이 원래 그런 거 굉장히 민감하니까요. 진짜 우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고요. 오죽하면 탱커진과 딜러진에서 로테이션으로 계속 막공을 돌았을까.”
김서웅과 이유리는 아는 사이다.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라 김서웅이 그녀에게 프러포즈까지 한 사이다. 조금 불편할 법도 한데 둘 사이에는 그런 기류가 없었다. 아니면 유지웅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서웅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현주가 보호막 능력자를 엄청 영입하고 싶어 했어요. 한 번 만나 보려고 안달이 나 있었죠. 그런데 그게 옛 남자친구일 줄이야. 참 운명이 얄궂네요. 그죠?”
자기만의 공격대를 꾸리기 위해 최현주는 한때 집 앞까지 찾아와서 기다리기도 했다. 옛 생각에 유지웅은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제는 그러지 않나 보다.
“저는 솔직히 두 분이 사귈 줄 알았어요.”
“우리 그런 사이 아닙니다. 뭐, 제가 현주한테 호감을 품어서 공격대에 들어오긴 했지만요. 근데 영 발전이 없네요.”
“그래요?”
솔직히 의외였다. 김서웅은 최현주의 남자친구라는 자리를 뒤흔드는 잠재적인 적이었다. 헤어지고 난 뒤 당연히 둘이 사귈 줄 알았다. 그런데 진전이 없다니.
‘어장 관리는 아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피식거렸다. 최현주는 적어도 줄 듯 말 듯 살살 남자 약을 올리는 여자는 아니다. 화끈하게 주고 한 명에게 올인하는 스타일이다. ……가 맞던가?
자신과 사귀고 있으면서도 메인 탱커와 친밀하게 지내고, 또 김서웅과 화기애애하게 지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아! 최현주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긴 한가? 이거 헷갈린다.
“저, 그런데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이유리의 질문에 그는 끄덕였다.
“그러세요.”
“왜 정공에 참가하지 않으시고 막공만 다니시는 건가요? 막공이 편하긴 하지만, 정공에 소속돼서 뛰는 게 벌이나 안전성은 더 득이 될 텐데요.”
“저, 사흘에 한 번 꼴로 레이드를 나가요.”
“그 정도 로테이션 돌리는 정공은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 파라곤도 힐러진 참석이 확보되는 대로 돌리고 있고요. 유지웅 씨가 있으면 힐러 수요가 감소하니까 사흘 주기로 레이드 돌리는 건 충분히 가능해요.”
힐러가 3%밖에 안 된다는 건 어딜 가나 고질병을 야기한다. 정규 공격대라 해서 언제든지 레이드를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지웅은 눈치가 느리진 않다. 지겹게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지금 이유리는 질문 형식을 빌려 파라곤에 들어오기를 간접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곧 출발하려나 봐요.”
그는 좋게 화제를 돌렸다. 이유리는 하고 싶은 말이 굴뚝같은 눈치였으나 입을 다물었다. 김서웅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둘은 불편한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대형 수송 헬기 3기가 운동장에 하강했다. 제12공격대 대원들은 각각 3그룹으로 나눠서 헬기에 탑승했다.
헬기에는 그가 아는 얼굴도 더러 보였다. 이유리, 최현주, 김서웅, 박현정 등등. 내부는 묘하게 조용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그를 힐끔거리기도 했다.
“불안해.”
정효주가 드디어 조그맣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손을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 마. 우리는 가장 마지막에 투입된다잖아. 설마 죽기야 하겠어? 내가 너는 꼭 살릴 거야.”
“현주 말이야.”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유지웅은 뜨끔했다.
“현주가 왜?”
“내 느낌인데……. 이거 말해도 되나 모르겠어.”
“말해 봐.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어?”
“……너랑 다시 시작해볼 생각인 거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둘이 어떻게 헤어졌는데 다시 시작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정효주와 사귀는 걸 뻔히 아는데 말이다.
“설마. 그럴 리 없어.”
“……현주가? 아직도 걜 믿어?”
“아니. 내가.”
“…….”
“나, 현주랑 헤어질 때 자존심 손톱만큼만 겨우 챙겼다. 우리 첫 단추부터 잘못 꿰서 끝도 그렇게 엉망이었어. 그거 현주도 알고 나도 알아. 그리고 난 지금 너랑 사귀고 있고. 근데 뭘 다시 시작하겠어?”
입술을 꾹 다물고 듣고 있던 정효주가 다시 물었다.
“만약 현주가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어쩔 거야?”
“왜 자꾸 그런 생각을 해?”
“……불안해서 그래. 현주가 너 보는 눈빛, 너희가 사귀던 그때와 똑같아서…….”
괜한 불안이라 생각했다. 그냥 아쉬운 것이리라. 무능력을 원인으로 헤어진 애인을 레이드계의 혜성이 되어 재회했다. 최현주처럼 야망이 큰 여자가 그걸 아쉬워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다시 시작할 만한 어떤 기반도 없다. 둘은 깨끗하게 헤어졌고, 그 과정에서 그는 꽤 강한 비참함을 느꼈으며, 그때의 상처를 정효주를 통해 치유했다. 정효주가 지금 옆에 있는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이렇게 잘 아는 사실을 최현주라고 모를까. 그 이상으로 잘 알 것이다.
“너, 여자 예감 무시하지 마. 나 두 번이나 맞췄으니까.”
“두 번이나? 뭘?”
“네가 힐러로 각성했을 때, 곧 여자친구가 생기겠구나 하고. 너 여자 디게 좋아하잖아.”
“……안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그리고 두 번째는 뭔데?”
“네가 능력 저하 때문에 집에 틀어박혔을 때, 곧 헤어지겠구나 했지.”
“……그 정도는 누구나 다 맞추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뜨끔한 기분이 든다. 정효주가 꽤 옛날부터 자신을 이성으로 봐왔다는 건 지금은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런 옛날이야기를 할 때마다 움츠러들게 된다. 약점 안 잡히려고 일부러 최현주 앞에서 당당하게 군 건데, 혹시 그거 가지고 또 약점 잡히는 건 아닌가? 자기가 최현주를 다시 어떻게 해보려고 그랬다는 오해를 사는 건 아닌가?
「도착했습니다. 모두 내리시기 바랍니다.」
수송 부대가 동해 묵호항에 도착했다. 12척의 수송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발아 단계는 이른바 줄기 세포 단계 같은 겁니다. 이 단계에서 탱커나 딜러, 힐러 클래스가 결정되는 거예요. 이 단계는 그만큼 불안정하고 위험한 대신, 굉장히 짧게 지나갑니다. 몇 시간도 안 걸린다는 설정입니다.
..우리 히로인께서는 이 단계에서 뭐가 잘못 되는 바람에 탱도 아니고 딜도 아니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날씨가 더워서 저녁 7시인가 퍼졌어요. 지금 일어났네요. 올리고 다시 잘 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