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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72화 (72/1,550)

00072  나는 탱커다  =========================================================================

쌍날검을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유지웅은 처음으로 레드 몹 레이드를 결심한 것을 후회했다. 그냥 적당히 벌고 옐로 몹 레이드나 갈 걸 그랬나 하는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하앗!”

정효주가 힘차게 뛰어나갔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단숨에 접근한 그녀는 헥스톨의 발목에 쌍날검을 찔러 넣었다. 방어막을 뚫고 단숨에 들어간 칼날에 헥스톨은 고막이 터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때입니다! 쿤겐, 이탈하세요!」

쿤겐은 재빨리 물러났다. 헥스톨은 홰를 치듯이 날개를 퍼덕이며 정효주를 쪼았다. 그녀는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날카로운 부리가 허공만 꿰뚫고 지나갔다. 공격이 빗나가자 더욱 화가 났는지 헥스톨은 날개를 힘껏 휘둘렀다.

정효주는 땅을 박차며 뒤로 점프했다. 아슬아슬하게 날개 끝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헥스톨은 쿤겐을 도외시하고 정효주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뛰어! 뛰어! 제길! 왜 안 되는 거야!’

그것을 보면서 유지웅은 이를 갈았다. 아무리 손을 뻗고 힘을 써보지만 보호막이 안 나갔다. 리타이어 상태인 것이다.

사람의 몸은 만능이 아니다. 초능력도 마찬가지. 일정 이상 체력을 소모하면 쉬어줘야 한다.

“효주야!”

“대장님! 빨리, 빨리요!”

서브 탱커 박달식이 그를 낚아채듯이 업고는 전장을 빠른 속도로 이탈했다. 다른 대원들도 이미 최대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전장에 남아 있는 것은 정효주와 쿤겐뿐이었다.

쿤겐에게 힐을 주던 힐러들도 사정거리를 이탈했다. 정효주에게 힐을 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보호막이 없이는, 한 대라도 맞았다가는 즉사할 테니까.

스키너와 마이카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유지웅의 리타이어가 불러온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처참함이었다. 아마 누군가는 괜히 왔다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유지웅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하늘에 전투기 및 헬기 편대가 비행하고 있었다. 독일 정부가 출격시킨 지원부대였다.

원을 그리듯이 최대한 헥스톨을 그 자리에 붙들어두기 위해 움직이던 정효주가 그만 부리 공격에 스쳤다. 그녀는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스친 공격이라 겨우 일어섰지만 비틀거리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 유지웅은 뛰어나갈 뻔했다. 박달식이 그를 꽉 붙잡았다.

“안 됩니다! 안 돼요!”

“효주가! 효주가!”

지금 들어가 봤자 개죽음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애인의 위기에 몸이 멋대로 반응했다. 그것은 이성이 어찌할 수 없는 반사작용이었다.

슈웅! 콰앙! 콰아앙!

낮게 비행하던 헬기가 로켓을 날렸다. 로켓은 순식간에 헥스톨에게 틀어박히며 폭발을 일으켰다. 덕분에 정효주는 후속타를 피하고 재빨리 물러설 수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게 멀리서도 위태로워 보였다.

그때였다.

번쩍!

거대한 붉은 섬광이 단숨에 수평을 그었다. 섬광은 헥스톨의 꼬리부터 관통해서 머리를 날려버렸다. 투명한 액체가 피처럼 사방으로 튀며 혈무를 그렸다.

머리를 잃은 헥스톨은 부들부들 경련을 하다가 쓰러졌다. 거목이 쓰러진 듯이 땅이 크게 울리며 먼지가 일어났다.

단검을 집어넣은 쿤겐이 두 손을 모았다. 그의 온몸에서 불덩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앞으로 뻗자 거대한 불덩이가 하늘을 날아 쓰러진 헥스톨에게 달려들었다.

“또 되살아날지도 몰라요! 바로 지금입니다! 모두 극딜하세요! 극딜!”

흠칫하던 대원들은 장태준이 지시를 내릴 팀도 없이 반사적으로 장비를 쥐었다. 원거리 딜러진에서 엄청난 딜의 폭풍이 쏟아져 나왔다. 위협 수치를 도외시한,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단숨에 모든 힘을 뽑아낸 딜이었다.

원거리 딜러뿐만이 아니었다. 근접 딜러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들어서 헥스톨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간간이 원거리 딜의 충격파에 얻어맞는 이들도 있었지만, 힐러진에서 쏟아 붓는 힐 샤워를 통해 견디며 헥스톨을 마구 찌르고 베었다. 대기조 딜러들까지 일제히 가세했다.

“죽어! 죽으라고!”

“죽으란 말이야!”

서브 탱커들도 나섰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딜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듯 광분하듯이 헥스톨을 힘껏 공격했다.

휘이이이잉! 휘이이잉!

곳곳에 얼어붙은 지면에서 냉기 바람이 흘러나와 헥스톨에게 몰리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현상이다. 냉기를 회수하면 저 녀석은 또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주어진 시간은 겨우 1분 남짓. 정효주와 쿤겐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준 기회였다. 어떻게든 이 시간 안에 녀석을 처리해야 했다.

“죽으라고! 쓰러지란 말이야!”

누군가의 외마디 부르짖음이 허공에 울렸다. 바로 그때였다. 얼어붙은 지면에서 흘러나오던 바람이 뚝 멎었다. 주변을 잠식하던 차가운 기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헥스톨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단말마처럼 이어진 경련이 멎자 헥스톨이 눈부신 빛에 휩싸였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지며 헥스톨이 흩어지듯이 사라져갔다.

그제야 대원들은 하나둘씩 장비를 떨어뜨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까지 최후의 힘을 짜낸 탓인지 모두들 땀으로 범벅을 하고 있었다.

“물러서세요. 힘들게 잡은 결정체가 못 쓰게 되면 안 됩니다.”

쿤겐이 헥스톨의 시체가 있던 곳에서 대원들을 몰아냈다. 대원들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몇 몇은 다소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군말 없이 물러섰다.

정효주가 비틀거리며 다가섰다. 그녀는 다리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끼고, 작은 집게로 결정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천 재질로 만들어진 보관 캡슐에 담았다.

“효주야!”

비틀거리며 달려온 유지웅이 정효주를 와락 껴안았다. 그저 눈물이 났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고마워.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 미안해. 미안해.”

정효주를 껴안고 그는 울 듯이 애타게 불렀다. 사과하고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그녀는 말없이 미소만 머금은 채 그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주변에는 쿤겐과 유지웅, 그리고 정효주뿐이었다. 대원들은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에 후방으로 물러간 것이다.

어려웠던 레이드 성공의 기쁨과, 정효주를 잃을 뻔했던 두려움을 그녀의 품에서 해소한 유지웅은 그제야 쿤겐을 돌아볼 여유를 찾았다.

“고마워요, 쿤겐.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아닙니다. 대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쿤겐이 아니었으면 아마 우리는 큰 위험에 빠졌을 거예요. 어쩌면 전멸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지도 몰라요. 쿤겐 덕분에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성공할 수 있었어요. 그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쿤겐은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정효주가 살짝 불안함을 담고 그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매번 이런 식이어서야 목숨이 남아나려나 모르겠어.”

베를린으로 향하는 수송 헬기 안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가볍게 투덜거렸다. 몇 몇이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몇 몇은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격대에 불만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지금?”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레이드가 힘들잖아요.”

“그럼 그 정도도 각오 안 하고 레드 몹 레이드 공격대에 들어온 거예요? 세계 최초로, 그것도 유일하게 레드 몹만 잡는 공격대인데 어느 정도 위험한 건 감수해야죠. 아마추어도 아니면서 다 알고 들어온 거 아니에요?”

“누가 몰랐대요? 그냥 너무 위험하다는 거죠. 매번 정말 힘들게 잡고 있는데, 이러다가 다음번에 사망자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있어요?”

“그래서요? 지금까지 사망자가 한 명이라도 나왔어요?”

유지웅과 정효주가 없는 헬기 안이라서 그런지 대원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논쟁을 벌였다.

“그만 두죠. 싫으면 공대 탈퇴하면 그만이잖아요.”

이유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모두를 잠재웠다. 그녀는 대기조 서브 탱커이긴 하지만, 파라곤 공격대장으로서 이들 중에서는 제일 영향력이 큰 탱커였다.

그녀가 중재하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서먹한 분위기를 둘러보며 그녀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갈등을 완전히 봉합한 것은 아닌 듯했다.

독일 정부는 프라임 공격대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시민들까지 동원해서 꽃을 뿌렸다. 그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베를린에 입성했다. 덕분에 대원들의 표정도 한껏 밝아졌다.

환영식에 참석한 한국 대사측 인물들의 표정도 밝았다. 프라임 공격대가 제대로 국가 위신을 세운 것이다.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독일이 골머리를 앓고 있던 레드 몹을 잡았으니 말이다.

유지웅은 지하크와 의논해서 가공한 결정체를 독일 정부에 매각하기로 했다. 독일 정부는 아직 결정체 양도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흔쾌히 10억 유로의 프리미엄을 지불했다. 1억 유로의 레이드 사례금도 함께였다.

감정가는 5억 유로로 났다. IACP로부터 받은 5억 유로, 1억 유로의 사례금, 10억 유로의 프리미엄을 다 합해서 총 수입은 16억 유로가 되었다. 이 중 10억 유로는 유지웅 개인 프리미엄이었지만 그는 처음 결정대로 이번만큼은 다 같이 나누기로 했다. 모두 큰 고생을 하기도 했고.

“이번 레이드 이익금은 투입조와 대기조 모두 공평하게 분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막판에 대기조 딜러까지 총동원해서 한 명도 빠짐없이 싸웠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투입조는 내심 불만이었지만 내규를 위반한 것은 아닌지라 항의하지 못했다. 유지웅이 모르게 뒤에서 자기들끼리 투덜거렸을 뿐이다.

“그래도 고생은 우리가 더 많이 했는데, 우리를 좀 더 많이 줘야 되는 거 아냐?”

“내규가 그렇잖아. 어쩔 수 없지 뭐.”

“대기조는 좋겠네. 다 잡은 거 밥숟가락만 올려서.”

물론 투입조 중에서도 그런 불만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더 고생하긴 했지만, 막판에 투입조가 극딜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다시 재생했을지도 몰라. 그럼 돈이고 뭐고 우리 다 죽는 거였어. 이번 분배는 공대장님이 잘 생각하신 거야.”

“다 같이 고생했잖아. 사람 수가 한 둘도 아니고 개개인 노력한 거 저울질해서 분배하는 건 애초에 말도 안 돼. 그런 식으로 분배하는 방식은 옐로 몹 레이드에도 없어.”

그런 식으로 몇 몇 이들이 부딪치고, 알력이 생기고, 또 갈등이 조금씩 불거지기도 했지만, 전부 유지웅이 보지 못하는 시야 뒤편에서 이뤄졌다.

개인 당 약 1240만 유로가 돌아갔다. 원화로 치면 약 173억 원이었다. 16억 유로를 129명이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번만큼은 지원팀도 분배 없이 통상 수당에 특별 보너스를 받는 선에서 그쳤다.

―리타이어도 했는데, 이번만큼은 면세 금액 안 챙겨도 되는 거 아닌가?

유지웅은 면세금액의 70%를 자기 몫으로 챙겼다. 당연한 권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리타이어한 것 때문에 면세금액을 챙기는 것을 가지고 그런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물론 그와 정효주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공격대 운영 방식을 가지고 정면에서 항의할 수 있는 담 큰 대원은 없었다. 그는 프라임 공격대의 중심이자 전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유지웅은 큰 문제에 봉착했다. 레이드에 대한 회의감에 빠지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돈도 많이 벌었는데, 그냥 이제 안전하게 옐로 몹이나 잡으러 다닐까? 나 이번에 진짜 가슴 철렁했어. 효주 너 잃는 줄 알고.”

“좀 더 철저히 준비하면 될 거야. 그리고 S급 장비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면 쉽게 잡을 거라고 생각해.”

유지웅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S급 장비를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그런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됐으리라.

하지만 어떻게? S급 장비의 리미트 해제 요건은 쿤겐도 모른다고 했다. 어찌하면 리미트를 해제할 수 있을까? 대체 그 요건은 뭘까?

유지웅은 당분간 레드 몹 레이드보다는 S급 장비를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지금은 레드 몹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지하크에게 도움을 청해, S급 장비에 관해서 심도 깊은 조사를 시작했다.

독일 레이드를 마치고 귀국한 지 사흘이 지났을 때, 세계적으로 엄청난 일이 터졌다. 그 시발점은 바로 한국이었다.

「……이와 같이, 힐 시전이 늦다는 문제 때문에 보조 힐러들은 레이드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힐러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죠. 하지만 이 장비는 그런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딜 증폭 기능을 가진 장비 외에 다른 종류의 장비는 개발되지 않았다. 그것을 조그만 중소 연구 기업인 한성산업이 완전히 깨뜨렸다. 한성산업의 젊은 CEO, 최윤이 주최한 기자회견장은 내외신 기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우리 한성산업이 개발한 이 신형 장비의 특징은 바로, 초능력자의 능력을 충전지처럼 담아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장비에 충전한 능력을 방출할 때에는 시전 딜레이가 없습니다! 이 장비를 사용하면 보조 힐러도 자기 힐을 장비에 담아두었다가 레이드에서 일반 힐러들이 힐하듯이 힐을 시전할 수 있게 됩니다!」

힐러 비율이 3% 밖에 되지 않는 것 때문에 레이드계는 만성 힐러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윤은 이 충전식 장비가 보조 힐러들의 레이드 유입을 유도함으로써, 힐러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기염을 토했다.

============================ 작품 후기 ============================

겉보기에 잘 나가는 집단이라도 외부에서 알지 못하는 문제가 하나둘씩 싹트기 마련이죠. 특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돈이 많이 몰리는 집단은 조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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