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7 니 안에 뭐 있다 =========================================================================
히카리가 일본으로 되돌아가긴 했으나 아직 한국의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제니스 공격대는 소집 해제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부산에 대기해야 했다. 사망한 이정희 딜러의 장례식이라도 참가하려 했으나, 부산을 떠날 수 없었기에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유지웅은 이미 유족에게 지급한 600억 원 외에도 따로 200억을 추가로 지급했다. 보험사가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하니 자기 돈으로 그냥 줘버린 것이다.
이정희는 서른 살의 미혼모였다. 이제 막 다섯 살 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유지웅은 어린 아들 명의로 800억을 예금한 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자에서 월 300만 원만 지급되도록 만들어놓았다. 추가 지출이 필요할 때에는 법원이 결정하도록 법원에 모든 관리를 맡겼다.
그러자 다른 친척들이 난리가 났다.
“돈을 줄 거면 그냥 주지, 왜 멋대로 묶어둔 겁니까! 이거 혹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이정희의 오빠이자 보상금 수혜자의 삼촌이라는 자들이 부산까지 찾아와서 항의했다.
“당신들이 돈 탕진할까 봐 안전장치를 해둔 건데요?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아무도 그 돈에 손 못 대요. 그리고 이자에서 월 300씩 나오는 거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충분하죠.”
“뭐요? 우리가 돈을 탕진한다고?”
“당신! 우리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우리가 조카 돈을 빼앗을 사람으로 말이야! 엉!”
“네. 그런 사람들로 보여요.”
유지웅은 솔직하게 말했다.
“난 이정희 씨 아들에게 보상금을 줬지 당신들 쓰라고 보상금 준 게 아니에요. 나중에 이정희 씨 아들이 크면 내가 한 조치에 고마워할 걸요? 그리고 그때 가서 꼭 말해줘야지. 너 어렸을 때 삼촌들이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이봐! 세상 그렇게 살지 마!”
그들은 게거품을 물며 고래고래 소란을 부리다가 결국 소득없이 돌아갔다. 이미 법원이 재산 관리에 들어간 터라 친척들이 숟가락을 꽂을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800억의 보상금은 원금이 전부 동결되었다. 연 5%의 이율로 계산했을 때 월 이자는 약 3억 3,333만 원. 그 중 아이의 양육비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월 300만 원뿐이다. 아이를 양육하는 친척에게 월 300만 원이 지급되는 것이다.
병원비나 등록금, 혹은 집을 구하는 비용으로 추가 지출이 필요할 때에는 법원의 결정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양육자는 월 300씩 지급된 양육비의 모든 사용 내역을 꼬박꼬박 보고해야 한다.
법원에 관리를 맡긴 것으로도 모자라 유지웅은 법무법인 킴벌리에게 감사위탁을 맡겼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몇 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둔 것이다.
원금 및 이자를 포함한 보상금 전액은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처분권을 가지게 된다. 그 전까지는 단지 소유권만 갖고 있을 뿐이다.
“엄마의 소중한 상속 재산인데 한 푼도 새지 않고 아이에게 돌아가게 해줘야죠.”
알음알음 유지웅의 조치를 전해들은 대원들은 감동했다. 동료의 죽음에 확실하게 보상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동료가 남긴 아들의 장래까지 생각해서 철저한 보장책을 갖춰주었으니.
“죄송합니다. 저희 측 계열사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일성그룹 본사에서 황 실장이 직접 부산까지 내려와서 허리를 굽히고 사죄했다. 일성생명에서 보험금을 주지 않은 것 때문에 유지웅은 화가 나서 모든 거래를 끊었고, 뒤늦게 그룹 본사는 그사실을 인지하고 부랴부랴 수습을 위해 나섰다.
“아뇨. 직원분이 일처리를 아주 제대로 하시던데요. 판례상, 그리고 계약 조항상 보험금 안 주는 게 맞더라고요.”
“실무진의 실수였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아니에요. 보험금 받을 권리가 없는데 달라고 요구한 제가 너무했던 거죠.”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황 실장은 애가 탔다.
계열사 실무진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고지식하게 규정대로만 행동한 것 때문에 일성생명의 가장 큰 고객이 빠져나갔다.
물론 유지웅이 내는 보험료는 일성생명의 전체 매출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험료가 다가 아니다. 세계 유일의 블루 결정체 독점 공급자라는 지위는 절대적이다. 심한 말로, 그는 일성전자를 하루아침에 망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보험금은 즉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제가 대신 줬으니까요.”
“유지웅 대장님.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세요. 계열사 하나랑 좀 다퉜다고 일성그룹 전체를 색안경을 끼고 보진 않으니까요. 그냥 거기는 나랑 안 맞는 것 같아서 보험계약 해지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보험을 해지한 김에 유지웅은 그냥 무보험으로 남았다. 생각해보니 자기가 보험을 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보험은 갑자기 목돈이 필요한 사고를 대비해서 드는 안전장치인데, 이미 구좌에 현금을 쌓아두고 있지 않은가? 도박성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어디로 도망칠 일도 없다.
“정말 죄송합니다.”
결국 황 실장은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다. 다만 200억의 보험금은 한사코 유지웅의 계좌에 입금했다. 그는 진노한 이 회장을 어찌 진정시켜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곧 일성생명에는 피바람이 불어닥치리라.
“보험을 만들어야겠어.”
보험을 든다는 것도 아니고 보험을 만들어야겠단다. 정효주는 귀신같이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보험사라도 차리게? 왜 갑자기?”
“알아보니까 레이드 능력자들 대부분 일성생명이랑 한대해상에 보험 다 들어놨더라고.”
“그치. 거기가 우리나라 양대 보험사니까.”
“내가 누구야? 일성그룹의 가장 큰 손님 아니야? 근데 나한테도 보험금 못 주겠다고 뻗대는데 다른 능력자들한테는 어떻겠어? 아무리 조항이 그렇다고 해도, 보통 능력자들이 그런 거 알고 보험 들어? 그냥 레이드하다가 자기 죽으면 나오겠거니 하고 드는 거지. 저건 어려운 계약 조항으로 그 믿음을 배신하는 거라구.”
“그럼 어쩌려고?”
“레이드 능력자만 대상으로 하는 보험을 만들어야겠어. 내가 아니면 누가 그런 거 하겠어?”
정효주는 괜히 그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정희 씨 죽은 거 보고 생각 많이 했구나.”
“……내 잘못 같기도 하고. 만약 내가 보통 공격대장이었으면 아들한테 그렇게 보상도 못해줬을 거 아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인지라 유지웅은 법무법인 킴벌리와 의논을 했다. 회사의 가장 큰 개인 고객인지라 김장호 변호사가 수행 변호사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직접 내려왔다.
“저는 왜 자꾸 김 변호사님이 제 개인 변호사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그거 영광입니다.”
“이참에 제 개인 변호사 안 하실래요? 지금 있는 회사보다 연봉 높게 쳐드릴게요.”
“저도 그럴 수 있으면 영광입니다만, 회사 대표와 오랜 친구라서요. 대신에 유 사장님이 부르시면 금방 달려가겠습니다. 그럼 뭐 개인 변호사와 다를 바 없을 겁니다.”
“그래주실 거죠? 꼭 그래주셔야 돼요.”
레이드 능력자들만을 위한 보험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김장호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가 의견을 꺼냈다.
“변호사로서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사실 보험 자체가 공통 위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서로 위험을 분담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거죠. 예를 들어서 해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배가 부서질 경우 손해를 보전해주기 위해서 평소에 조금씩 돈을 모아서 기금을 만드는 게 기본 골자죠.”
“네.”
“원칙대로 하자면 그 보상기금은 한 푼도 남김없이 위험 집단 내에서 손해를 입은 자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민간 사업자가 끼어 들어서 수익을 추구하다 보니 구조가 이상해졌어요. 보상기금을 보험사업자가 자기 사유재산처럼 여기기 시작한 거죠.”
“저는 수익을 생각해서 하려는 게 아니에요.”
“자선복지성 사업을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런 건 잘 모르구요, 그냥 레이드 능력자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의논 끝에 레이드 능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보험사 혹은 보험재단을 만들되 수익은 전혀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보험주체를 유지할 최소한의 비용을 제한 나머지는 전액 보험사고를 당한 이들에게 주도록 한 것이다. 김장호는 유지웅의 뜻에 따라 곧바로 보험재단 창설 작업에 착수했다.
“제니스 공격대의 네임밸류가 있으니까 아마 레이드 능력자 보험 시장은 싹쓸이 할 수 있을 겁니다.”
보험사가 보험금을 주지 않자 유지웅이 사비를 털어 토탈 800억을 보상해줬다는 것은 이미 레이드계에 쫙 퍼졌다. 그가 레이드 능력자 보험재단을 만든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일성생명과 한대해상에 가입한 레이드 능력자들이 대거 이탈할 것이다.
그저 규정대로 행동한 일성생명의 한 실무진의 대응이 엄청난 폭풍을 불러 온 셈이다. 그러나 그 폭풍은 아직 태동기였다.
남들에게는 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제니스 공격대는 경건하게 보냈다. 워낙 정신이 없고, 또 딜러의 사망으로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탓도 있었다.
아직 소집 해제가 되지 않았기에 제니스 공격대는 부산에서 단체로 새해를 맞이했다.
“일본은 완전 초토화됐군요.”
“그러게요.”
정부군과 쿠데타군의 내전, 거기에 히카리의 폭주와 다른 괴수들까지 끼어 들어 난동을 부리니, 일본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이 사태가 겨우 수습된다 하더라도 국가 경제 순위가 대폭 하락하리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할 게 없는지라 유지웅은 룸에 틀어박혀서 정효주와 뒹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질리면 컴퓨터로 온라인 게임을 하기도 했다. 게임이 질리면 다시 정효주를 안았다.
간간이 일성보험에 칼바람이 불어닥쳐서 경영진 및 실무진이 대거 잘려나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우리 괜찮을까? 녹서스의 돌 말이야.”
한창 그를 받아들이다 말고 그녀가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몰라. 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넌 어쩜 그렇게 태평하니?”
“괜히 불안해서 벌벌 떠느라 심력 낭비하는 것보단 낫지. 몸에도 별다른 이상 없고, 효주 넌 히카리를 물리치기도 했고, 그러니까 좋게 좋게 생각해야지. 안슐한테 부탁하긴 했지만 솔직히 나도 별 기대는 안 해.”
록펠러 그룹 및 온갖 미국의 부호들과 미 정부가 결탁해서 추진한 것이 녹서스의 돌 프로젝트였다. 아무리 안슐이 대단한 거부라 해도, 정보를 파헤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일. 결국 이대로 경과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딱히 몸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온몸에서 기운이 넘쳤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도 레드 몹을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였다. 한창 나이라 해도 이런 정력은 사기 수준이다.
“난 히카리나 빨리 어떻게 정리 됐음 좋겠어. 언제까지 부산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근데 시골 집은 다 지어졌다니?”
“응. 돈이 좋긴 좋네. 그 큰 집을 벌써 다 짓다니.”
“우리 집은 어때?”
“올라가는 속도가 장난 아니던데? 내 생각에 내년 가을까지 기다릴 것도 없을 것 같아. 사람을 24시간 풀로 투입하니까 장난 아니더라.”
섹스하면서 나누는 대화는 둘에게 이제 일상적인 것이었다. 하얀 어깨를 꽉 잡은 그는 부르르 경련하며 그녀의 안에 힘껏 파정했다. 가느다란 다리가 허리를 강하게 감싸며 튜브를 짜내듯이 바짝 조였다.
파정을 마친 그는 그녀의 위에 축 늘어지듯이 엎드렸다. 수고했다고 말하듯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에 기분이 좋았다.
“황 실장이란 분이 나 좀 보자던데.”
“너를? 왜?”
“몰라. 보험 때문에 할 말이 있나 봐.”
“결국 보험금 나한테 물어줬잖아? 근데 뭐 더 할 이야기 있어?”
“넌 그렇게 끝날지 몰라도 거기는 아니지. 네 눈치 엄청 보고 있던데.”
“보든지 말든지.”
일성그룹과 한대그룹에서는 유지웅의 행보를 잔뜩 긴장한 채 주시하고 있었다. 레이드 능력자 보험시장은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거대한 풀이다. 제니스 공격대가 진출한다면 그 명성에 끌린 능력자들이 대거 이동할 것이다.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으리라.
“근데 있지. 고재혁 씨 유족 이야기 들었니?”
“그 사람은 왜?”
고재혁은 초능력자 부대에서 파견되었다가 사망한 인물이었다. 유지웅은 그 이야기를 왜 하는지 의아했다.
“보상금이 8억인가 나왔대. 그래서 유족들이 들고 일어났나 봐.”
“뭐? 8억? 겨우?”
“이정희 씨 아들이 800억 받은 거랑 너무 비교가 되니까 가족들이 못 받아들이겠던가 봐. 꽤 난리가 났던데. 너한테는 아직 별 말 없었니?”
“난 못 들었는데?”
입맛이 썼다. 같은 소속은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싸웠던 사람인데,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니 기분이 저조해졌다. 초능력자 부대는 사실상 군인 신분. 사망하더라도 민간 정공 대원에 비하면 헐값이나 다름없는 보상금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딜러 자리가 없어 초능력자 부대에 많은 딜러들이 모이고 있는 형국이었다. 충전 장비가 등장하면서 나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딜러는 천민이었다.
“나라도 도와줄까?”
“어떻게? 네 돈 준다고 하면 난 반대야.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네 책임이 아닌데 네가 물어줬다가는 다음 번에 너만 곤란해져. 프라임 시절 잊지는 않았지?”
“꼭 돈 주는 것만 전부는 아니잖아.”
“그럼?”
“나라를 좀 쪼지 뭐. 보상금이 그게 뭐냐고.”
유지웅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유족들보다는 내가 갈구는 게 좀 귀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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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정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