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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130화 (130/1,550)

00130  니 안에 뭐 있다  =========================================================================

느닷없이 장비가 못 쓰게 돼버리자 난리가 났다. 장비 센터 소장은 제품에 하자가 있는 건 아닌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재계에 이형준 회장이 있다면 레이드계에는 유지웅이 있다. 그런 인물에게 하자 있는 제품을 권한 셈이니, 애간장이 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장비에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여기 다른 제품이 있으니…….”

“소장님.”

어쩔 줄 몰라하는 소장을 유지웅이 급히 불러 세웠다. 다행히 소장이 직접 안내를 하는 중이어서 다른 직원은 없었다.

“제 일행이 탱커라서 힘이 굉장히 세요. 아마 그래서 부순 것 같아요.”

“네?”

“살짝 힘을 준다는 게 그만 부서뜨렸네요. 이 장비는 우리가 사는 걸로 하겠습니다.”

소장은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해준다면야 보고 올리기도 편하고 자기야 좋다.

“그래주시면야…….”

“우리 책임이니 우리가 변상하는 게 당연하죠. 우리가 사는 걸로 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소장은 순간 정말로 부서진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곧 그렇게 납득했다. 자세히 살펴본 것도 아니었고, 탱커가 장비를 부숴먹는 거야 이상한 일도 아니니.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선뜻 변상하겠다고 구매할 리가 없지 않은가?

“장비가 부서진 건 혼자만, 아니 그냥 잊어버리세요. 우리는 멀쩡한 장비를 구매해서 만족한 겁니다. 아셨죠?”

“예.”

짚이는 곳이 있는지라 둘은 그렇게 마무리짓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장비를 변상하고 일을 마무리지은 것은 사건이 확대되기를 원치 않아서였다. 만약 하자품 처리를 위해 사건 그대로 보고했다가는 여기저기 정보가 새게 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둘은 참았던 긴장을 내뱉었다.

“흡수된 거 아니야?”

“결정도! 결정도 재보자!”

“감정장비 어딨니?”

“어디 뒀더라? 분명히 여기 어디 뒀는데?”

집안을 뒤져서 감정장비를 찾아냈다. 스위치를 작동하는 손길이 미미하게 떨렸다. 정효주도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감정 센서를 그녀의 몸에 댔다.

「50,060」

“……늘었어.”

“……그것도 딱 30.”

“그 장비, 결정도 30짜리로 만든 거라고 했지?”

“응.”

“아제로스의 쌍날검도 결정도 30짜리로 만든 거라고 했고.”

정황이 너무 분명하다. 유지웅이 신음하듯이 말했다.

“녹서스의 돌이 결정체를 흡수하는 것 같아…….”

“나만 녹서스의 돌이 있는 건 아니잖아. 너도 마찬가지 아니니? 시험해봐야 하는 거 아니니?”

“뭘로? S급 장비로?”

“안 돼! 왜 그 비싼 걸로 시험해?”

사실 시험할 필요도 없다는 것은 둘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해보나 마나다. 유지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체내에 흡수된 녹서스의 돌이 다른 결정체를 흡수하는 게 분명했다. 상황이 너무 분명하지 않은가.

“일단 응급처치부터 하자.”

“무슨 응급처치?”

“장비 이리 벗어 봐. 조심해. 결정체 만지지 말구.”

정효주는 어디서 구했는지 수술 장갑에 고무장갑까지 끼고 두 개의 S급 장비에 뭔가 손질을 시작했다. 한참을 뚝딱거리더니 이윽고 끝났는지 장비를 내밀었다.

“이제 됐어. 비싼 거니까 조심해야지.”

대단한 건 아니었다. 결정체 부위를 투명한 막으로 감싸서 손이 닿지 않게 만든 것이다. 노출된 부위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작업으로도 가능했다.

“이거 나한테 귀속된 건데 설마 흡수될까?”

“시험해볼 거야?”

“……아니.”

유지웅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5,000억짜리 장비를 갖고 그런 모험을 할 수는 없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왜 이렇게 됐는지 의논했다.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한 끝에 그럴 듯한 추리를 얻었다.

“괴수들이 서로 잡아먹으면서 결정체가 합쳐진 것처럼, 녹서스의 돌도 다른 결정체를 잡아먹는 것 같아.”

“결정도가 오만이 넘는 녀석이니까 결정도 20, 30 되는 것들은 껌으로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네. 결정체 잘못 만졌다가는 또 그 꼴 날 테니까.”

“이 현상이 알려지면 미국이 다시 우리를 의심할 테구.”

다리를 뻗고 정효주가 넋두리처럼 말했다.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좀 맘 편하게 레이드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편안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세상이 둘을 가만히 놔두질 않는 것 같다. 정효주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안 된 마음이 든 유지웅이 가만히 그녀를 안았다.

“걱정 마. 잘 될 거야. 몸에 딱히 이상이 있는 건 아니잖아?”

“불안해 죽겠어. 어디 가서 맘 편하게 검사도 못하고.”

“일단 사는데는 전혀 이상 없잖아?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안슐한테 부탁해서 휘버 박사 단서도 계속 추적하고 있으니 결국 다 잘 될 거야.”

“넌 어쩜 그리 태평하니?”

“그럼 나까지 끙끙 앓을까?”

눈물을 글썽거리던 정효주는 그의 허리를 안으며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만약 잘못 돼서 나 아기 못 가지면 어떡하지?”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런 걱정을 했었다. 역시 여자라서 그게 가장 걱정되는 건가?

“걱정 마. 설마 이거 때문에 안 생기겠어? 마법도 제때제때 오는데 뭐가 걱정이야?”

“……너 내 생리주기 알고는 있니?”

“아니.”

뭐 자랑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지. 정효주는 그게 얄미웠다. 피임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건가?

“못 됐어. 피임은 내 책임이란 거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그냥 빨리 애 갖고 싶은 거지.”

“그럼 레이드는 어떡하고?”

“뭐, 쉬던가. 출산휴직.”

“치. 정말 그런 마음도 없으면서.”

그녀가 살짝 어깨를 꼬집었다. 유지웅은 민망한지 머리를 긁으면서 대답했다.

“근데 내 쪽에서 하려면 콘돔 써야 되는데, 그건 너도 별로잖아? 아님 나 오늘부터 쓸까? 너가 쓰라면 쓸게.”

“됐어. 안 해도 돼.”

“거 봐. 너도 싫지? 그리고 네가 약 먹는 거는 사실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너 대신 내가 먹어줄 수도 없는 거고.”

“누가 뭐라니? 그래도 같이 날짜 챙겨주고, 약 먹는 것도 신경 써주고 그러면 좋다는 거지.”

“그게, 달라?”

“당연히 다르지!”

“뭐가 달라?”

“……아무튼 달라.”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거 언제 키워서 남자 만들지?

녹서스의 돌이 체내에 흡수되었다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둘은 일단 일상 생활로 돌아갔다. 레이드도 정상적으로 진행했다. 이미 레이드에서 별 탈이 없었다는 건 검증되었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정효주는 망가진 장비 대신 다른 장비를 새로 대여해서 레이드에 참가했다. 이번 목표는 보행성 괴수 중의 하나인 흰반점늑대였다. 늑대처럼 생겼는데 이마 중앙에 크고 하얀 반점이 있는 게 특징이었다.

「메인 탱커, 투입!」

반달처럼 휘어진 장검을 쥔 정효주가 달려나갔다. 그녀의 접근을 알아차린 흰반점늑대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하앗!”

그녀는 높이 점프하며 장검을 내려쳤다. 이쯤에서 레드 몹이 화를 내며 반격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깨갱!

어디서 강아지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흰반점늑대는 깨갱깨갱거리며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굳었는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깨갱! 깨애앵!

뱀 앞에 얼어붙은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몸이 얼어붙었는지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이번에도 역시 저러네요.”

“그러게요.”

“…….”

지원팀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대화했다. 레드 몹이 쫄아드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이거 매번 이러니 이쯤 되면 정효주를 의심해보는 게 맞지 않을까?

“저는 지금까지 레드 몹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네요.”

“레드 몹이 메인 탱커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건 말이 안 돼요.”

“그럼 왜 히카리는 무서워하지 않았던 거죠?”

“히카리는 특별히 강력한 녀석이었잖아요. 그러니 그런 거 아닐까요?”

“레드 몹도 약한 녀석은 아니죠. 아니, 옐로 몹도 마찬가지에요. 전 옐로 몹이 탱커를 무서워해서 제대로 반격도 못하고 딜러진에 썰려나갔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

어색한 침묵만 맴돌았다. 어느 팀원이 상황 정리를 했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요? 안전하고 쉽게 잡을 수 있게 됐으니.”

그 말이 정답이다.

레이드는 무탈하게 끝났다. 흰반점늑대는 정효주의 맹공에 얼어붙어서 제대로 반격도 못한 채 딜러진의 공격에 썰렸다. 딜러들은 모처럼 어그로 걱정을 하지 않고 신나게 딜을 했다.

괴수가 쓰러지고 시체가 결정체로 되돌아갔다. 결정체를 캡슐에 수습한 정효주는 그 자리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얼른 달려온 유지웅이 물었다.

“왜? 피곤해?”

“그냥 맥빠져서.”

“레드 몹이 저러는 거…… 아무래도 그거 때문이겠지?”

근처에 다른 대원은 없지만 그래도 야외인지라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그녀도 수긍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레드 몹의 결정체는 보통 결정도가 5천에서 7천 사이다. 그러나 정효주가 품은 결정체는 무려 5만이 넘는다. 레드 몹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10배로 강한 개체로 인식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쪼그라드는 건지도 모른다.

“저기, 나 그럼 몸도 튼튼해진 거 아닐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히카리 때 떡…… 다른 탱커보다 탱킹이 안 됐잖아.”

하마터면 ‘히카리 때 떡실신했잖아?’라고 말하려다가 얼른 말을 바꿨다. 생각없이 그리 말했다가는 오늘밤 혼자 자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서운한 듯이 말했다.

“뭐야? 그럼 딜이 는 것도 아니고, 몸이 튼튼해진 것도 아니고, 겨우 레드 몹 겁 주는 게 다야?”

“모르지 뭐. 품고만 있고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아직 모르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아, 이게 그럴 듯 하네.”

“차라리 원리 같은 거 정확히 알고, 내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으면 레이드에도 도움이 되고 걱정도 안 될 텐데.”

“의지가 부족해서 그래. 의지만 있으면 다 돼.”

“때론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것도 있어.”

정체 모를 결정체를 체내에 품고 있어서 불안하지만, 당장 손 쓸 수 있는 방도가 없기에 둘은 그렇게 그럭저럭 예전 생활로 복귀했다. 일단은 나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점이 있었다. 레드 몹이 정효주만 보면 겁을 먹고 움츠러든다는 것 말이다.

나쁠 것은 없다. 미국은 녹서스의 돌이 둘에게 없다 생각하고 있고, 게다가 둘을 억류한 것 때문에 아직도 화해를 못해서 안달이다. 히카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으며, 일본의 정치 상황도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아, 일본이 안정되는 것은 좋은 게 아닌가?

아무튼 주변이 평화로운 가운데 어느덧 봄이 무르익으며, 둘의 결혼식날이 껑충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퍼플 결정체가 흡수된 건 사실이지만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전과 레이드 능력이 달라진 건 없습니다. 레드 몹이 겁을 먹으니 레이드하기는 편해졌지만요.

그리고 안수르가 기뻐 날뛰고 있습니다. 결혼 선물을 줄 날만 오매불망 기다렸거든요. 사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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