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귀족이다-154화 (154/1,550)

00154  걸어다니는 결정체  =========================================================================

동창회는 취소되었다.

정효주한테 이야기를 들은 유지웅은 바로 직원을 구금하고 남기철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동창회를 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친구들은 아쉬워했지만 그의 사정을 이해했다.

남기철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수사 인력을 끌고 온 것이다.

“일단 집 전체를 폐쇄하고, 상주 직원 전부를 상대로 심층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임시지만 경호측까지 전부 정부 사람들로 교체되었다. 경호원 및 직원들은 뜻밖의 조치에 당황했다. 그러나 스파이가 있다는 말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회유된 직원이 갖고 있던 휴대용 감정장비는 원격으로 데이터를 송출하는 방식이었다. 감정장비 자체에는 데이터가 남지 않도록 되어 있어, 분해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암시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모델이었기에 증거도 찾지 못했다.

즉 직원을 회유한 이들의 목적은, 정효주의 신체 결정도 수치를 스캔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미국.’

유지웅은 대번에 미국을 의심했다. 정황상 이런 일을 할 이들은 미국 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때 녹서스의 돌이 정효주에게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니라고 인정했는데?’

그게 딜레마였다. 설마 사과를 한 게 연극에 불과했던 걸까?

의심가는 주체는 미국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미국은 그럴 동기가 없었다. 미국은 녹서스의 돌이 휴스턴을 날린 레드 몹 개체에 흡수되었을 거라 인정했고, 둘에게 거듭 사과 신청을 해오고 있었으니까. 만약 미국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이해가 안 가는군요. 무슨 위험 장비도 아니고 결정도 감정 장비를 왜 들여온 걸까요?”

녹서스의 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남기철은 엉뚱한 쪽으로 추리를 전개했다.

“혹시 정부 몰래 블루 결정체를 집에 보관하고 있는 게 있나요? 그걸 훔치기 위해서 감정장비를 반입했다면 납득이 가긴 합니다만…….”

“하나 있긴 하죠. 하지만 그건 쓸모가 없어요.”

“전기혁한테 귀속된 결정체 말씀이시군요.”

프라임 공격대 시절, 첫 레이드에서 외국의 사주를 받은 전기혁이란 딜러가 실수인 척 블루 결정체를 자기에게 귀속시켰다. 그게 발각돼서 조사 받는 중에 자살했지만 말이다.

그 뒤로 쓸모 없어진 블루 결정체는 유지웅이 그냥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말이 보관이지 내팽개쳐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쓸모가 없잖아요. 귀속자가 죽어버렸으니 그냥 돌멩이나 다름없는데.”

“그렇지만 감정장비를 반입해서 이 집에서 뭔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남기철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유지웅과 정효주는 난처해서 마주 보았다.

‘어떡하지?’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녹서스의 돌이 목적 같은데…….’

‘하지만 남 국장님은 그걸 모르잖아? 그러니까 엉뚱한 오해만 하고 있어.’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다. 놔두면 남기철은 엉뚱한 방향으로 짚고 조사를 할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남 국장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결국 유지웅은 결심을 굳혔다. 미국, 혹은 미국이 아닌 누군가가 녹서스의 돌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다면, 더 이상 정부에 마냥 숨기고 있을 순 없다고 말이다. 적어도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귀띔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휴스턴에서 칼리타를 잡을 때 효주가 칼리타한테 먹혔다가 살아난 건 알고 계시죠?”

“그럼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죠.”

“그때 이후로 효주 몸에 변화가 일어났어요.”

“……무슨 변화죠?”

바보가 아니기에 남기철은 바로 직감했다. 이번 직원 회유 사건 뒤에 뭔가 다른 게 있음을.

“자세한 건 저희도 잘 모르기에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다만 우연히 감정장비를 실수로 사용했는데, 효주 체내에서 결정체 에너지 반응이 나타났어요.”

“몸 속에 결정체가 있다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우리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결정체 반응이 검출되었다는 것뿐이에요.”

“그 수치가 얼마죠?”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블루 결정체 수치 정도는 돼요.”

남기철은 가볍게 신음했다. 유지웅은 정말 최소한으로만 정보를 알려준 것이다. 딱 초능력 관리본부에서 헛방향을 짚지 않고 제대로 대책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아마 신체 변화와 관련된 사항이다 보니 신중함을 지키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회유 세력측에서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겠군요. 회유된 직원이 감정 장비를 사용했고, 그 데이터가 전송되었으니 말이죠.”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계속 숨겼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책을 세워 보죠.”

굳은 얼굴로 끄덕인 남기철이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말했다.

“유지웅 대장님.”

“네?”

“조금은 정부를 믿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부서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저희 초능력자 관리 본부만큼은 국내 레이드 능력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강우석 의원님께서도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주시고 있고요.”

뼈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은 감동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 저는 초능력 관리본부가 부패했다고 경계하는 게 아니에요. 정부 부서 중에서 규모가 크면서 제일 깨끗한 기구이기도 하고요. 그런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럼…….”

“그냥 좀 일하는 거 보면 답답해서요. 불안해서 뭘 맡기지를 못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남기철의 어깨가 더 축 쳐졌다. 결국 무능해서 못 믿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몇 날 며칠 동안 조사를 거듭한 결과 회유된 직원은 그 한 명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다른 직원들은 다시 원래 직무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유된 직원은 형사 처분을 받아야 했다.

“안타깝게도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심문 결과 회유된 직원에게 접근한 사람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확증은 결국 얻지 못한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루딘은 불같이 화를 냈다. 직원들은 그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쩔쩔 맸다.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들여 공작 중인데, 망할 놈들!”

한참을 씩씩거리던 루딘은 또 참지 못하고 결국 책을 집어 던지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CIA!”

CIA는 과거 공작을 한 번 제대로 실수하는 바람에 이 일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심지어 그 책임을 지고 국장이 교체되기까지 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머리에 든 거라고는 총질밖에 없는, 존재 의의가 불확실한 집단.’이라는 독설까지 했을까.

그래서 유지웅 관련 공작은 루딘 책임 하에 관할이 개편되었다. 그리고 이제 막 뭔가를 좀 해보려고 하는 찰나였다. 그런데 또 CIA가 끼어든 것이다.

“그 멍청한 로버트 국장이 뭐라고 하던가?”

“그게, 아직 대답이 없습니다.”

“후우……. 좋아. 그럼 우리측에서 조사한 건? 대체 그 머리에 총질하는 거 말곤 든 게 없는 빌어먹을 CIA가, 왜 미스터 유의 저택 직원을 회유한 거지?”

사건이 벌어지고 낌새를 눈치챈 게 얼마 되지 않은 지라, 루딘은 아직 핵심 줄기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CIA가 어떤 목적을 위해 유지웅 저택 직원을 회유했는데, 그것이 발각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당연히 요원도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뭐 좀 알아낸 게 있어야 대답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얼마 후 백악관 호출이 왔다. 루딘은 왠지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형대에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비장한 각오로 준비를 마쳤다. 부하 요원들이 그를 안쓰럽게 봤다.

백악관 회의실에는 이미 주요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대통령을 필두로 CIA 신임 국장 로버트, 국무부 장관, 결정체 주무부서인 미 자원에너지국 국장, 이렇게 넷이 모여 있었다.

루딘은 득의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로버트를 노려봤다. 저 녀석 때문에 우리 부서 공작을 망친 걸 생각하면!

“사태가 시급하네.”

다들 자리에 앉고 대통령이 말을 꺼냈다. 이미 뭔가 보고가 들어갔는지 대통령의 안색은 자뭇 심각했다. 루딘도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휘버 박사 사건 이후로 CIA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통령이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뭔가 대단한 것을 알아냈다는 것 같았다.

“여기 모인 분들에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군. 로버트 국장, 말하게.”

“예.”

로버트는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CIA는 동아시아 결정체 시장에 오랫동안 여러 공작을 통해 관여해 왔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작년 일본의 대한국 공작의 실패 사건이었습니다.”

“대한국 공작의 실패?”

“프라임 공격대 첫 레이드 이후, 일본은 블루 결정체를 획득하기 위해 프라임 공격대 딜러 중 한 명인 전기혁을 회유해서 강제 귀속시켰습니다. 하지만 전기혁의 서투른 대처로 한국 측에서 눈치를 챘죠.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기혁은 일본에 나라를 팔았다는 매국노 소리를 듣는 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더 이상 자세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 사건을 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결정체를 통제한다는, 자원에너지국 국장이 의문을 드러냈다.

“CIA는 어떻게 그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까?”

“당시 우리도 프라임 공격대에 공작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그런 움직임을 포착했던 것이죠.”

“정말 자살이었습니까?”

일본이 손을 쓴 것은 아니냐는 물음. 로버트 국장은 피식 웃음을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루딘 국장이 불쾌한 낯빛을 억지로 감추며 말을 꺼냈다.

“현재 미스터 유 및 제니스 공격대 공작 담당은 우리 EIS 관할입니다. 헌데 왜 CIA가 이 사건에 나선 것인지 그에 대한 해명이 먼저 필요합니다. 벌써 일 년이 되어가는 옛날 일을 새삼 꺼내는 이유도 알 수 없군요.”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기혁 딜러의 회유 사건을 짚지 않고는 이번 일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는 대통령은 물론이고 루딘 국장까지도 의문을 나타냈다.

“계속하게.”

“예, 각하. 당시 유지웅 공격대장은 전기혁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기명 채권으로 공격대에 분배를 해줬습니다. 그리고 전기혁이 사망해서 쓸모가 없게 된 블루 결정체를 보관해왔죠. 본래라면 폐기해야 할 물건인데 말입니다.”

“흐음, 그래서?”

“블루 결정체 귀속주가 사망해서 결정체가 못 쓰게 된 경우는 그것이 세계적으로 처음이었습니다. 못쓰게 된 결정체 활용 방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굳이 한 명을 꼽자면 유지웅 공격대장일 겁니다.”

“…….”

“일본에서는 그 뒤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관련 분야 연구를 해왔습니다. 최근 일본 동경대 결정체학 연구소에서 우리가 빼낸 극비 실험 결과에 따르면, 귀속된 블루 결정체의 귀속 반응을 해제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고 합니다.”

정보를 다루는 인물로서 루딘 국장은 누구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의 눈이 치켜 떠졌다.

“설마?”

“귀속주가 사망하면 결정체는 귀속 반응을 잃고 처음 주인 없는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다시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말에 대통령 이하 모두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로버트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그 실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보다 확실한 데이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CIA는 유지웅 공격대장 저택 내에 있는 블루 결정체를 찾으려고 공작을 벌였던 겁니다.”

로버트 국장의 목소리에는 일본의 극비 자료까지 자기들이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한편 루딘 국장은 놀라움을 벗고 불쾌한 어조로 따졌다.

“그렇다면 관할 담당인 우리 EIS와 사전에 어떤 협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덕분에 일선 요원들 간에 혼선만 빚어지고 한국 정부에 경각심만 주게 됐습니다.”

“루딘 국장 말이 맞네. CIA가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지. 공을 세우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잘못을 상쇄할 만큼 커다란 공적도 아니고.”

대통령이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말했다. 루딘 국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통령은 아직 EIS의 편이다.

헌데 로버트 국장의 표정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쯤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는 듯이.

“각하, 블루 결정체를 수색하는 과정 중에 우리 CIA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것은 신중함을 기한답시고 지금까지 시간과 예산만 낭비한 EIS로서는 절대로 세우지 못할 공적이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뭔가?”

루딘 국장의 낯빛이 가라앉았다. 이 망할 자식이 지금 자기의 소중한 EIS를 까고 있단 말인가? 동아시아에서 CIA를 밀어내고 최고의 정보 기관이 될 EIS를?

“우리는 수색 작업을 위해 탐지 범위가 반경 3미터에 달하는 감정장비를 개발, 공작 임무에 투입했습니다. 그 결과 유지웅 공격대장의 저택에 결정도 50,060짜리 결정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0,060이라고!”

대통령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 말에는 루딘 국장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버트 국장이 어떠냐는 듯 득의만만하게 루딘 국장을 쳐다 보았다. 마치 ‘우리는 이런 대단한 것도 알아냈다. 너희는?’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특히 대통령이 자기를 쳐다봐줘야 하는데 루딘 국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버트 국장은 당황했다. 어, 뭐지?

“루딘 국장, 자네의 가설이 옳았군.”

“그렇습니다. 각하.”

“미시즈 정의 몸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게 녹서스의 돌이 아니라 해도, 자네가 세운 가설대로 결정 에너지가 농축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속히 그 부분에 관해서 자세히 알아낼 수 있도록 해보게. 아! 절대로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하는 건 잊지 말고. 망할 누군가처럼 대놓고 공작했다가 들키거나 하면 안 되네.”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게. 많이 바빠질 거야.”

“네, 각하.”

루딘 국장이 일어나고, 주섬주섬 회의가 끝나는 분위기였다. 자신만만하게 회의 소집을 요구했던 로버트 국장은 어이가 없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목소리가 다 떨렸다.

“아니…… 우리 CIA가 알아낸 사실인데…… 우리 요원들 공적인데…….”

안타까운 중얼거림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그냥 개그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 CIA는 더한 삽질도 했다는 게 판타지. 이래서 현실은 소설보다 더 판타지라는 말이 있죠. 나름 현실 풍자임.

미국의 정글러 루딘은 CIA가 싸지른 설사를 치우러 다니느라 오늘도 매우 바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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