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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164화 (164/1,550)

00164  와이프 강화하기  =========================================================================

퍼플 결정체 결정도를 확인한 순간 몸이 딱 경직되었다. 대강 10만은 넘을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수치를 확인하니 덜컥 겁마저 났다.

“와…… 101,040?”

“이거 대체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야?”

“10조 원이 넘네. 이 조그만 거 하나가.”

장갑을 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결정체 하나가 단순 계산으로 유지웅의 전 재산에 버금간다. 유통이익을 환산하면 그의 재산쯤은 가볍게 찜 쪄 먹으리라. 게다가 세계 유일의 퍼플 결정체라는 프리미엄을 생각하면, 애초에 그 가치는 터무니없이 올라간다.

아니, 이미 이것은 가격이 의미가 없는 물건이었다. 돈 주고도 못 사는 물건이고 돈 받고 파는 게 말도 안 되는 물건이다.

미국이 이 결정체의 존재를 안다면?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알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절대 비밀로 해야겠다.”

처분할 수도, 사용할 수도 없는 물건. 그 가치가 너무 대단하다 보니까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유지웅은 3층 부부 침실에 있는 금고에 결정체를 보관하기로 했다. 둘 말고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장소이니 이 집에서 제일 안심이 되는 장소였다. 단단한 합금외벽과 납으로 된 내벽으로 된 이중 구조의 금고는 혹 스파이가 있더라도 감정 장비로 수색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그냥 보관만 할 거니?”

“아니. 일단 몇 가지 시험은 해봐야겠어.”

“시험? 어떻게?”

“브라우니 있잖아.”

유지웅이 씩 웃었다.

*  *  *

“브라우니, 먹어.”

브라우니는 끙끙거리며 자꾸만 고개를 피했다. 정효주는 한사코 퍼플 결정체를 내밀었지만 녀석은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했다. 전에 먹으려다가 체한 경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녀석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저 물건은 도저히 자기가 먹을 게 아니라는 것을.

물론 퍼플 결정체를 먹일 생각은 없었다. 브라우니가 정말 먹으려 들면 뒤통수를 후려칠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브라우니가 먹나 안 먹나 알아보려고 한 것뿐이다.

“그럼 이거는 먹을래?”

정효주가 블루 결정체를 내밀었다. 전기혁에게 귀속되었던 물건이었다. 블루 결정체를 보자 브라우니는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퍽!

그녀가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브라우니는 깨갱하며 머리를 움츠렸다. 그녀가 혼을 냈다.

“이건 먹는 게 아니야! 먹으라고 내밀었다고 낼름 그렇게 먹으면 어떡해?”

―끄응, 끼이잉…….

“자, 다시 해보자. 브라우니, 이거 먹을래?”

퍽!

“먹는 게 아니라니까. 다시, 자, 먹어.”

퍽!

몇 번 더 얻어맞고 나서야 브라우니는 결정체는 자기가 먹을 게 아니라는 걸 자각했는지 더 이상 고개를 들이밀지 않았다. 머리가 나쁜 녀석은 아닌데, 아니 오히려 영악한 녀석인데 왜 여러 번 맞아야 말을 듣는지 이상했다.

“전에 제대로 교육시켜놨는데 또 이러네. 머리가 나쁜 걸까?”

“아니야. 내가 보기에 이거 상당히 영리해. 어떻게든 틈만 나면 결정체 먹으려고 벼르는 거야.”

정효주가 그렇게 단정하며 결정체를 담은 캡슐을 챙겼다. 눈을 돌리자 브라우니가 입맛을 다시며 쳐다보다가 찔끔해서 얼른 머리를 숙였다.

“저거 봐.”

“……확실히 그렇네.”

“저 식탐은 사육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내가 옆에 있으니까 참는 거지, 만약에 없으면 죄다 먹어치웠을 수도 있어.”

“그래도 퍼플 결정체는 정말 싫은 것처럼 보였는데.”

“전에 먹으려다가 실패했잖아. 결정도가 너무 크니까 소화를 못 시키는 거 아닐까?”

“진짜 우리가 잘못 만졌다가 큰일 나겠다.”

여러 모로 애물단지였다. 어디다 팔 수도 없고, 써먹을 수도 없고, 함부로 만지거나 조사할 수도 없는 물건이니. 정부에 의뢰하고 싶지만 보안이나 정부의 분석 능력을 생각하면 그것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결국 당분간 봉인하는 수밖에.

브라우니 훈육을 마친 부부는 나란히 손을 잡고 한성산업으로 갔다. 회사 오너의 방문에 회사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바쁘게 일하던 최윤이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뭐라도 좀 준비를 했을 텐데…….”

“아니에요. 그나저나 회사가 이사하는 바람에 찾느라 좀 애를 먹었네요.”

“하하, 그러셨나요?”

한성산업은 거침없는 성장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회사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졌고, 서울 중심가 고급 빌딩의 4개 층을 임대해서 들어왔다. 따로 사옥을 지을 계획이라는데 그때까지 사용할 작정이라고 한다.

충전 장비는 1개 팔 때마다 1억 넘게 이익이 남는다. 만들면 만드는 대로 날개 돋친 듯이 팔리는 제품이었다. 세계 시장은 넓었고 보조 힐러는 많았다. 그런 제품을 독점 장사하고 있으니 회사 규모가 날로 커질 수밖에.

유지웅은 한성산업의 지분 51%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 지분은 창업 멤버 5명이 골고루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유지웅은 단순 투자자가 아니었다. 사업 초기에는 충전 장비 임상 사용을 지원해 주었고, 500억 원을 투자해 경영 안정화를 도왔으며, 일성투자에 거저 뺏길 뻔한 것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당연히 최윤은 유지웅을 볼 때마다 마치 집안 큰어른을 모시듯이 깍듯하게 굽혔다. 나이는 그가 훨씬 많지만 유지웅도 이제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사업은 어떤가요? 잘 돼가나요?”

“그럼요. 물건이 없어서 못 팔고 있습니다. 그린 결정체 공급량이 대폭 줄었거든요.”

“그래요?”

“네. 일본 시장이 붕괴되는 바람에 아시아 결정체 시장까지 한파가 몰아쳤습니다. 에너지원과 소재 쪽으로 돌리는 물량도 벅차서 장비 제작에는 상당히 발동이 걸린 상태입니다. 결정체 값도 다시 뛰어오를 조짐이 보이고요.”

결정체 시장이 형성된 초기에는 결정체 값이 무지하게 비쌌다. 결정도 20짜리가 40억이 넘기도 했으니. 그러다가 국제적으로 시장이 안정화되면서 결정도 1당 1억 원까지 떨어졌고, 더 떨어질 조짐도 보였으나 일본 시장이 무너지면서 다시 폭등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결정체 수급이 예전 같지 않아서 큰일입니다.”

“블루 결정체로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한 개를 통째로 쓰지 않고 분할해서 쓰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겁니다. 같은 출력이라도 결정체 등급이 다르니 성능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고요. 단지 블루 결정체는 수급이 어려워서…….”

최윤은 말을 흐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회사 오너가 블루 결정체 공급자인데 무슨 상관인가요? 제가 한 번 손을 써보죠.”

“감사합니다.”

최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성산업을 나선 둘은 초능력자 관리본부로 향했다. 연락을 받은 남기철이 정문까지 둘을 마중하러 나왔다. 대충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유지웅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S급 강화 장비를 만들고 싶어요.”

남기철은 바로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의 사무실에 셋 말고는 아무도 없음에도 워낙 중요한 이야기인지라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혹시 전기혁 씨한테 귀속되었던 결정체입니까?”

“네. 미국이 한 말이 사실인지 시험도 할 겸 해서요.”

미국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가지고 온 블루 결정체는 주인이 없는 상태로 초기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강화 장비로 만들어 미국이 한 말을 확인할 참이었다.

“하지만 강화 장비는 이미 갖고 계시지 않나요? 아, 혹시 보조성 강화 장비로 만들려는 생각이신가요?”

“아니요. 효주가 쓸 건데요.”

“정효주 씨가요?”

의외의 말에 남기철은 조금 놀라워했다. 강화 장비는 딜러 전용 물건. 탱커가 쓸 수는 있으나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고 남기철은 금방 납득했다.

“블랙 몹에 대비하기 위해서군요.”

“네. 레드 몹 상대로는 효주가 그동안 강화 장비가 필요 없었는데 블랙 몹은 안 되겠어요.”

지금까지 정효주가 A급 강화 장비를 사용한 이유는 레드 몹을 상대로 충분히 통했기 때문이다. S급 장비를 사용하나 A급 장비를 사용하나 효율이 똑같았기에, 굳이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블랙 몹은 그녀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탱커가 방어막을 뚫지 못하면 어그로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유지웅 부부는 S급 강화 장비를 갖출 필요성을 느꼈다. 확신할 순 없지만, 효주가 S급 강화 장비를 든다면 블랙 몹의 방어막도 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버리는 셈 쳤던 블루 결정체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겸사겸사 귀속 반응 해제 현상도 확인할 겸 말이다.

“전례가 없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일리는 있군요. S급 강화 장비를 든 탱커라면 블랙 몹의 방어막을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이 일을 맡겠습니다.”

“결정체는 여기 있어요.”

정효주가 블루 결정체를 내밀었다. 혹시나 해서 이미 그녀가 결정체를 만진 상태였다. 만약 귀속 반응이 정말로 해제되었다면 그녀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다. 원석 단계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장비로 가공해야 했다.

어차피 예전에 버리는 물건이라 사실 블루 결정체를 만지면서 흡수될 것도 각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블루 결정체는 그린 결정체와 달리 만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는 결정도가 그린 결정체에 비해 매우 높기에 흡수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추정했다.

아무튼 그렇게 남기철에게 장비 제작을 맡기고 둘은 비로소 귀갓길에 올랐다.

“차가 좀 많이 막히네.”

교통정체 현상 때문에 차가 나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유지웅은 신호등을 살피면서 오른손으로 슬금슬금 그녀의 허벅지를 만졌다.

“정말 세스토가 운다, 울어.”

시속 100km를 몇 초 안에 돌파할 수 있는 수퍼카면 뭐 하나. 이 나라에서는 속도를 낼 일이 없는데. 하물며 그에게 차는 정말로 서울 나들이 용이었다. 지방에 갈 때는 V-23을 띄우니. 그 편이 오히려 속도감은 짜릿했다.

“아, 맞다. 나 교수님한테 식사 대접 한 번 할 거 있는데 너도 같이 갈래?”

“남자 교수야?”

“응.”

“몇 살?”

“……서른 중반쯤?”

거기서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유지웅의 표정도 살짝 변했다.

“네가 왜 식사를 대접할 게 있어?”

“나 저번에 너 때문에 과에 소문 잘못 났잖아. 그거 바로 잡느라고 제니스 대원이라는 거 밝혔는데, 내가 나서서 말하고 다니면 자랑하는 거 밖에 안 되니까 교수님 통해서 은근슬쩍 간접적으로 밝혔거든. 그래서 보답하려고.”

“아, 그래?”

그제야 유지웅의 얼굴이 밝아졌다. 젊은 남자 교수라고 해서 괜히 걱정했는데, 그런 관계라면야 상관없으리라.

“뭐야, 질투했니?”

“조금? 넌 너무 예뻐서 밖에 내돌리기 불안했거든.”

“정 그렇게 불안하면 같이 학교 다니지.”

“안 그래도 생각 중이야.”

별로 기대 않고 말했던 그녀가 오히려 놀랐다.

“어, 정말?”

“좋아?”

“좋지, 그럼. 와, 같이 학교 다니면 재밌겠다.”

항상 누나처럼 의지가 되는 모습만 봐왔는지라 소녀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새삼 신기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유지웅은 정말 수능이라도 쳐야 하나 생각했다.

“근데 나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상관없어. 우리 학교 기여 입학 돼. 비밀 보장도 해 줘. 그럼 내년부터 바로 다니면 되겠다. 나 2학년일 때 너 1학년이네?”

“좋아. 그럼 너 졸업하고 난 다음에 나 혼자 돌아다니면서 신입생들을 꼬시면…….”

“너어!”

그녀가 화를 내는 척 하며 찰싹 때렸다. 그는 낄낄거리며 바뀐 신호등에 따라 액셀을 밟았다.

어느덧 정체 구간이 빠지고 차가 시원스럽게 달렸다. 그래봐야 시속 60km 정도였지만.

‘장 교수님……. 내가 괜히 예민한 거겠지?’

그녀는 주변의 시선에 민감한 편이다. 과에서 남자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사생활을 떠벌리기 싫어 결혼 사실을 밝히지 않지만, 왼손 약지에 커플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게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나 남자 있다는 티를 간접적으로 내고 다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은근히 대시하고 있었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느냐는 심리 같다. 신랑 말고 다른 남자에 관심 없는 그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런데 요즘 들어 은근히 장길수 교수가 신경 쓰였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장길수 교수가 자신을 이성으로 보고 대하는 것 같았다.

물론 뚜렷한 조짐은 없지만, 다른 여학생들을 대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났다. 그렇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설레발을 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그녀는 대접하는 자리에 자연스럽게 신랑을 데리고 나갈 생각을 했다. 만약 장 교수가 정말로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확실한 예방이 될 것이고, 아니라면 화기애애한 소개 장소로 끝나는데 그칠 것이다.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차에서 어때?”

“안 돼.”

차고 안이라서 어차피 볼 사람도 없는 터라 은근히 제안했지만 그녀가 칼같이 잘랐다.

“차고에서 안 나오는 거 고용인들이 보면 무슨 생각하겠니? 뭐 하는지 다 알지.”

“3층에서 안 나오는 거 보고도 같은 생각할 거 같은데.”

“다르거든?”

결국 아쉬운 마음을 접고 부부침실로 가야 했다. 둘이서 조그만 집에 살 때에는 담 안에만 들어서면 신경 쓸 게 전혀 없었는데, 집이 커지니까 이게 안 좋은 것 같다. 은근히 고용인들 시선도 신경 써가면서 움직여야 하니 말이다.

며칠 후 남기철이 장비가 완성되었다고 연락했다.

============================ 작품 후기 ============================

전기혁 결정체는 원래 이러려고 남겨둔 거임. 진짜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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