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우리 휴가 중인데요? =========================================================================
6시간 이상 걸려서 잡는다면 전 제니스 대원 눈에는 답답해 보일 것이다. 게다가 제니스는 39명까지 인원이 줄자 기다렸다는 듯이 분배제를 재도입했다. 탈퇴자 입장에서는 놓친 떡이 더 커보일 수밖에 없다. 아니, 실제로 더 컸다.
하지만 유지웅은 대원을 더 늘릴 생각이 없었다. 방어장비가 아니어도 레이드는 너무 쉬워졌다. 지금의 인원이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분배제를 재도입했지만 프라임 때와는 달랐다. 그때 그는 면세되는 금액의 70%만 챙겼다. 그러나 지금은 면세금의 전부를 챙기기로 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정책이 바뀌었다. 대표적으로 사망보험금이 축소되었다.
현재 제니스 대원이 사망할 경우, 보험재단(그가 설립한 것)에서 200억을, 그리고 그가 사비로 200억을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사비 200억 지급이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수당제가 아니기에 거기까지 그가 책임을 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제니스가 탑을 달리고 있는 가운데 다른 정공도 야금야금 레드 몹을 사냥했다. 덕분에 한국의 블루 결정체 공급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증가폭이 적었다. 방어장비를 정부에서 일괄 통제하고, 레이드 능력자에게 팔지 않기 때문이었다. 옐로 몹보다는 몇 배나 엄격하게 정부의 통제가 닿아 있는 셈이다. 단지 레이드의 위험성 때문만이 아니라, 초반부터 블루 결정체의 유통을 철저하게 통제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보였다.
제니스는 블루 결정체 독점 공급의 위치를 잃었다. 하지만 보호막 능력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블랙 몹의 존재 때문에 정부는 예전보다 더욱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처음 그의 사주를 의심했으면서도, 그를 체포하거나 직접 조사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내가 정부한테 너무 심하게 했나 보다.”
유지웅은 나름대로 반성했다. 좀 억울하긴 했는데 정부 입장이 이해가 안 갈 건 아니었다. 남의 눈치 안 보고 자기 욕심대로 일을 처리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래도 남에게 직접 피해는 안 끼쳤으니 됐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또 그게 아니었다.
그냥 정부가 뭔가 요구할 때마다 들어줄지 말지 꼼꼼이 따져서 결정하고, 들어준다면 그만큼 챙길 거 다 챙기려 했을 뿐인데. 그게 어려워 보였단 말인가?
그래도 어쨌든 오해가 해결되어서 다행이었다.
* * *
“잘 지냈어?”
정효주가 쓰다듬자 브라우니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브라우니의 목깃을 어루만졌다.
“브라우니를 다른 사람들도 길들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남기철이 못내 아쉬움을 표시했다.
브라우니는 정효주의 말만 듣는다. 유지웅의 말을 듣기도 하는데 그게 옆에 있는 정효주 눈치를 봐서 그러는 건지 아닌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녀 말만 듣기 때문에 다른 이가 브라우니를 레이드에 써먹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시킨 대로 이곳 군 기지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왜 정효주 씨 말만 듣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유지웅 부부는 뜨끔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몸 속에 흡수된 녹서스의 돌, 즉 퍼플 결정체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말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브라우니 입장에서 보자면 둘 다 결정도 5만의 괴수다. 거기다가 몇 차례나 실컷 얻어맞고, 항거 불능이라는 것을 단단히 깨달은 상태. 녀석은 굽히고 들어가는 게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여전히 아무 것도 안 먹나요?”
“예. 결정체를 먹여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그건 관두었습니다. 그래도 배가 고파하는 건 없습니다.”
브라우니는 신기하게도 먹지 않아도 살아 있었다. 단지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굶주리지 않은 것처럼 멀쩡했다.
아무래도 괴수라서 결정체만 먹는 모양이다. 근데 굳이 먹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도 여러 모로 연구감이었다.
“그럼 브라우니, 앞으로도 여기 사람들 말 잘 듣고 있어. 다른 데 가지 말고. 알았지?”
―끄으응…….
“그래. 착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정효주는 일어섰다. 훈련이 없어도 이렇게 주기적으로 얼굴을 비치며 주인이라고 확실히 각인해주는 게 필요했다.
둘은 세스토 엘레멘토를 타고 군 기지를 나섰다. 곧장 서울 공격대 사무소로 향했다. 오후에는 공격대 지원팀 미팅이 있었다.
“난 적당히 외곽에 내려줄래? 택시 타고 먼저 집 갈래.”
“왜? 같이 들렀다 가지.”
“이 차 2인승이잖니. 혜주까지 태울 순 없잖아.”
“혜주는 왜?”
“올 때 같이 집에 데려 와. 저녁 해주기로 했어. 난 먼저 가서 준비해놓을게.”
“응. 알았어.”
유지웅은 방향이 틀어지는 길목에 그녀를 내려주고 혼자 공격대 사무소로 향했다.
정부가 나름대로 보안을 지킨답시고 노력했지만 사람의 입을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제니스 대원들도 타 정공 레드 몹 사냥이 어떤지 대강은 주워듣고 있었다. 어그로가 불안정해서 한 번 잡는데 6시간 이상 걸린다거나 하는 것 정도였다.
요즘 대원들은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역시 안 나가고 참기를 잘했어.
수십 여 명에 달하는, 탈퇴한 제니스 대원들이 다시 돌아오려고 기웃거리는 것만 봐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공격대 규모가 줄긴 했지만 그건 우리의 레이드 능력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지원팀과 사무소 규모는 예전 그대로 유지합니다.”
“남은 통신 장비는 어떻게 할까요? 대원들이 대거 빠져나가는 바람에 89개의 여벌 장비가 남았습니다.”
“그냥 갖고 있는 걸로 하죠. 장비 고장이나 교체 같은 걸 생각하면 여벌 수량은 어차피 필요하니까요. 중고로 매각해봤자 수익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알겠습니다.”
장태준과 이야기를 하다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정혜주와 눈이 마주 쳤다. 그녀가 다른 사람 몰래 눈웃음을 보냈다.
방학이 끝났지만 돈에 맛을 들인 정혜주는 주말에 일이 있을 때마다 공격대 사무소에 나와서 일을 도왔다. 평소에는 사무소도 주말에는 쉰다. 하지만 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와서 알바를 해도 벌이가 짭짤했다.
“혜주는 일 잘 하나요?”
“아, 네. 열심히 합니다. 매우 싹싹하고 밝아서 다들 좋아하고요. 게다가 이쁘잖습니까.”
본래라면 ‘이쁘잖습니까.’라는 농담 같은 것은 안 한다. 장태준의 태도 변화는 그만큼 상호 신뢰 관계가 깊어졌음을 의미했다.
원래 정효주는 공격대장 처제라는 걸 숨기고 일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사무소 직원들은 첫날 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정효주와 비슷한 이름에 얼굴도 닮았으니, 못 알아차리는 게 바보였다.
하지만 정혜주는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여타 알바생처럼 성실하게 일했다. 처음에는 공격대장 인척이라는 것에 조금 꺼려했던 직원들도 금세 그런 거북함을 잊어버렸다.
“아, 혹시 레이드 기록 누가 요구한 적은 없었나요? 레드 몹 레이드 때문에 아무래도 필요한 사람 많았을 텐데.”
“안 그래도 레이드 트라이 전부터 레이드 관리본부에서 한 번 요구했었습니다. 제 권한이 아니라고 거절했습니다만.”
“그랬나요?”
이상하다. 그럼 자기한테 와서 말을 해야지, 왜 그 뒤로 아무 말도 없었을까? 설마 장태준이 거절하니까 자신이 시킨 거라 오해하고 짐짓 뺀 건가?
“그럼 수고하세요.”
“네. 들어가십시오.”
사무소를 나온 유지웅은 차에 타기 전 정혜주한테 지금 나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타다다닥거리며 정혜주가 뛰어나왔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밝게 웃으며 와락 안겼다.
“형부!”
“야야, 사람들 오해하겠다.”
구김이 없는 건 좋은데 자기가 여자라는 건 좀 자각을 해줬으면 했다. 아니, 꾸미고 다니는 것을 보면 여자라는 자각은 철저한 것 같은데. 그럼 형부가 남자라는 자각이 없는 건가?
“언니는 집에 있어요?”
“응. 너 밥 해준다고 먼저 들어갔던데?”
“와, 기대된다. 오늘은 뭘 해주려나.”
즐거운 듯이 정혜주는 연신 밝게 웃었다. 안전벨트를 매다 말고 흘끔 그녀의 허벅지가 눈에 닿았다. 좌석이 낮은 데다가 짧은 핫팬츠를 입고 있어 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났다. 가을도 깊어가는데 안 춥나?
“너, 여자애가 옷이 너무 짧지 않아?”
“왜요? 요즘 다 이 정도는 입고 다니는데요?”
“안 추워?”
“안 추워요. 괜찮아요.”
친여동생이었으면 좀 더 따지고 들겠는데 처제다 보니까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오빠 동생처럼 지내왔던 사이라서 이 정도 핀잔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무소 나올 땐 짧은 치마나 핫팬츠 입지 마. 안 그럼 알바 안 시켜줄 거야.”
“그럼 형부 만날 땐 상관없어요?”
“나야 상관없는데, 언니가 가만 놔둘까?”
“앗, 맞다! 언니가 있지, 참.”
과장스럽게 호들갑을 떨던 정혜주가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아아, 제가 언니랑 바뀌어서 태어나야 했는데. 3년이나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최고의 신부가 될 기회를 놓쳤어요. 슬퍼라.”
“엄살은. 너도 좋은 남자 만나면 되지 뭐.”
“형부보다 좋은 남자를 무슨 재주로 만나요? 제가 전생에 행성을 구한 것도 아닌데.”
“나보다 좋은 남자는 널렸어.”
“돈 많으시잖아요.”
“돈 많은 게 전부는 아니지.”
“그래도 다른 거 다 덮고도 남을 만큼 정말 많으시잖아요. 여자를 때리는 것도 아니고, 바람 피우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성실함에 그 만큼 돈 많으면 어엄청 좋은 남자죠.”
어떻게 보면 속물적인 시선이긴 한데 너무 구김 없이 솔직히 터놓고 말하니까 귀엽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정효주가 동생 때문에 은근히 걱정하고 있던데,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언니는 남편이 돈이 많아 서울 한복판에 궁전처럼 집을 짓고 살고 있다.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그런 걸 봐오고 컸으니, 과연 웬만한 남자가 눈에 차기나 할까?
“나중에 커서 제가 결혼하면 아마 12평짜리 전세부터 시작할 텐데, 언니랑 너무 비교돼요. 슬퍼요.”
“왜 꼭 전세부터 시작하란 법 있어?”
“형부가 모르셔서 하는 말씀이에요. 남자 군대 1년 갔다 오고, 대학 4년 마치고 나면 보통 26살부터 사회 진출하죠? 한 달에 50씩 일 년에 600 모은다 치면 결혼 적령기를 30살로 잡고, 죽어라 모으면 3,000 정도 모으겠네요. 여자도 잘 쳐서 3,000 모은다 치면 6,000이잖아요. 그거 가지고 서울에서는 전세 한 채 못 얻어요.”
유지웅은 살짝 당황했다. 열 여덟 살짜리 여자애가 벌써부터 그런 계산을 하고 있나? 요즘 여고생들은 다 저래? 아니면 혜주가 특별한 건가?
“걱정 마. 부모님이 아무렴 결혼하는데 그냥 보내실까?”
“부모님 퇴직금이랑 노후 자금 뺏어 와서 집 사면 그 부담 나중에 다 돌아와요. 부모님도 힘들고 신혼부부도 힘들어요. 그런 건 손 안 대는 게 나아요.”
“설마 그래서 지금부터 돈 모으는 거야?”
“네. 형부, 이건 비밀인데요.”
뭐가 부끄러운지 정혜주는 몸을 배배 꼬다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매달 형부가 주시는 20만 원, 사실 다 저금했어요. 나중에 시집 자금으로 쓰려구요. 저 통장에 500만 원 있어요.”
열 여덟 살짜리 여자애가 용돈과 알바비만으로 500이나 모았다면 굉장히 많이 모은 것이다. 유지웅은 갑자기 처제가 다르게 보였다. 구김 없고 밝은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정효주 이상으로 야무지지 않은가.
“그건 쓰라고 준 용돈인데 그냥 쓰지 그랬어. 옷 사고 놀러다니는데 쓰고 그러지.”
“원래 아까워서 돈 함부로 안 써요.”
“걱정하지 말고 써. 나중에 결혼할 때 집 한 채 사줄게. 하나뿐인 처제인데 그 정도도 못해줄까?”
“그랬다가 저 언니한테 혼나요. 음……. 형부, 이건 진짜로 비밀로 해주셔야 돼요? 특히 언니한테요.”
“뭔데? 말해 봐.”
정혜주는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레 소곤거렸다.
“사실 저 언니 지갑 노리고 있어요.”
“언니 지갑을?”
“네. 시집 갈 때 언니한테 손 벌릴 거예요. 그래서 지금부터 열심히 돈 모으는 거예요.”
“손 벌릴 거면서 왜 돈을 모아?”
“아이참, 제가 시집 갈 때 한 사오천쯤 모았다고 해봐요. 십 대 때부터 꾸준히 모은 거라고. 그럼 언니가 기특해서 혼수 장만 크게 해줄 거예요. 언니 그런 성격이거든요. 아마 집 한 채쯤 해줄 걸요?”
그만 픽 웃음이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장기적으로 내다보는 거, 아무래도 자매의 특성 같다.
* * *
“언니!”
주방에서 요리에 한창인 정효주를 보자 정혜주가 달려들어서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무거워. 떨어져.”
“에이, 내가 뭐가 무겁다고? 탱커잖아.”
“저리 가. 앉아 있어.”
“나도 도와줄게. 나도 요새 솜씨 많이 늘었어.”
언니가 해놓은 요리를 차린답시고 혜주가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광경이다. 역시 처제는 발랄하고 톡톡 튀어야 제맛인 것 같다.
사실 사촌 형제들이나 친척을 봐도 그는 딱히 별로 해주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안 든다. 근데 처제는 볼 때마다 뭔가 사주고 싶고, 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아내가 예쁘면 남자가 그렇게 된다는데 정말인가 보다.
비싸고 신선한 식재료를 잔뜩 써서 만든 진수성찬이 식탁에 차려졌다.
“언니, 나 술 먹어도 되지?”
“이게.”
정효주는 가볍게 눈을 흘기고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조금만 마셔.”
즐거운 듯이 내민 잔에 유지웅이 포도주를 따랐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 1층 홈시어터 룸으로 향했다. 영화 대신 개그 프로그램을 틀고 깔깔거리며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남기철이었다.
“여보세요.”
「늦은 저녁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협조를 부탁 드릴 게 있어서…….」
“저 휴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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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