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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180화 (180/1,550)

00180  우리 휴가 중인데요?  =========================================================================

“어, 안녕?”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

박효리가 냉큼 옆에 앉았다. 유지웅은 반가우면서도 이래도 되나 불안해졌다. 곧 효주가 나올 텐데?

“아, 그게……. 나 와이프가 이 학교 다니잖아. 그래서 놀러온 거야.”

“맞다. 우리 과라고 했죠? 이름이 뭐예요?”

“그건 말 못해.”

“에이, 왜요? 그게 뭐 큰 비밀이라구. 진짜 못 알려줘요?”

“프라이버시도 있잖아.”

박효리는 조금 아쉬운 눈치였으나 별로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근데 오빠, 요새 왜 오우 잘 안 들어와요? 오빠도 세기말이라고 재미 없어졌어요?”

“뭐, 그것도 있고. FM이 재미있어서.”

“FM 나도 같이 해도 돼요?”

“어, 안 돼. 친구랑 둘이 하는 거라서.”

같이 하는 건 문제 없는데, 돈이 될까?

유지웅은 내심 효주가 걱정이 되었으나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설마 이런 거 가지고 오해하겠어? 효주가 그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 그나저나 이 학교 입학하면 박효리도 효주와 부부라는 거 다 알게 텐데 어쩌나?

“오빠 와이프는 그럼 어디 있어요? 지금 기다리는 중이에요?”

“어. 총장실에 잠깐 볼 일 있어서.”

“나도 기다렸다가 보고 싶은데 지금 급해서요. 빨리 이거 갖다 줘야되거든요. 오빠,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응. 잘 가.”

서류뭉치를 안고 일어선 박효리는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종종걸음으로 뛰는 모습이 귀여웠다. 흐뭇해서 보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쿡 찔렀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니?”

정효주였다. 그는 순간 뜨끔했다.

“봐, 봤어?”

“응.”

“어디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다.”

“…….”

“쟤 그 오크전사지? 박효리라고 하던?”

유지웅은 식은땀을 흘리며 끄덕였다. 팔짱을 낀 정효주는 심문하는 눈초리로 응시했다.

“쟤 이쁘지 않니?”

“에이, 너보단 못하지.”

“진짜?”

“뭐야? 너 설마 오해해? 막 내가 쟤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거 같아? 아니거든? 나 눈 높거든?”

그 말에 정효주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런 걸 보면 여자는 여자인 모양이다.

“올라가자.”

“응.”

둘은 총장실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조용히 문을 열고 정효주가 먼저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 정효주 학생. 어서 와요.”

총장은 반존대를 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뒤따라 들어온 유지웅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같이 온 학생은 누구지? 친구인가요?”

“아, 학생은 아니구요. 학교에 놀러왔는데 놀러온 김에 교수님한테 인사드릴까 해서요.”

원래 학생이 이런 용무로 총장실을 방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정효주는 지금 학생 자격으로 방문한 게 아니었다. 반쯤 손님 자격으로 온 것이다.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기여 입학을 하는 이는 학교 측에서 보자면 일종의 ‘고객’이니까.

“안녕하세요. 유지웅이라고 해요.”

“유성찬입니다. 총장이죠.”

인사를 나누면서도 총장은 반쯤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지웅? 유지웅? 왠지 귀에 익은 이름인데…….

“학교를 둘러봤는데 참 좋은 학교 같아요. 학생들 표정도 굉장히 밝고, 건물도 깨끗하고 멋지고요.”

“좋게 봐주시니 이거 기분이 좋습니다.”

총장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천천히 유지웅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정효주가 거액의 기부금을 내고 들어오기는 했으나 몸가짐이 반듯하고 교수에 대한 예의는 잃지 않는 학생이다. 보아하니 애인 사이 같은데 겨우 애인을 소개시켜주려고 총장실을 방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옷차림은 평범하다. 하지만 총장은 유지웅이 손목에 차고 있는 고급 시계를 놓치지 않았다. 그도 시계에 관심이 있어서 저게 얼마나 비싼 모델인지 안다. 못해도 수천만 원은 넘는 물건이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차고 다니는 것만 해도 눈앞의 청년이 보통 재력가가 아님을 말해준다.

‘같은 정공 소속인가?’

정효주는 제니스 소속이다. 총장은 열심히 생각했다. 제니스에 유지웅이라는 사람이 누구더라?

‘아!’

순간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총장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혹시 제니스 공격대장 되십니까?”

“네, 맞아요.”

“세상에. 반갑습니다. 이거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총장은 하마터면 허리를 굽힐 뻔했다. 나이고 뭐고 없다. 비록 어린 청년이지만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다른 거 다 접어두고 40조 원의 재력가라는 것만 해도 이미 비교 자체가 안 된다. 이런 학교쯤은 입김만 불어도 날릴 수 있는 인물 아닌가.

“혹시 효주 학생과는……?”

“부부예요.”

“아! 그렇군요.”

총장은 놀란 정신을 수습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왜 방문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했다. 혹시?

“저도 내년에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은데, 가능한가 해서요. 사실 제가 공부를 손에서 놓은 지 좀 돼서…….”

“물론 가능합니다! 유지웅 씨라면 충분히 특례입학 요건 충족이 되고말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특례입학은 기부금을 낸다고 끝이 아니다. 정효주는 기부금도 많이 냈지만 그보다는 제니스 대원이라는 것이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세계 제일의 정공 대원을 학생으로 받아들이면 관련 학과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신원은 비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떠들썩하게 학교 홍보용으로 이용되지 않았으면 해요.”

“이해합니다. 그 점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부금 말인데요. 현금 기부는 뭔가 삭막한 거 같고, 효주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총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총장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는 아무래도 긴장될 수밖에 없다.

“도서관이 낡고 작아서 증축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거 하나 지어드리는 게 어떨까 해서요. 그게 보기에도 좋을 거 같고요.”

“정말 유익한 지원입니다. 학생들도 기뻐할 겁니다.”

총장은 감동했다. 도서관 새로 짓는 게 훨씬 비쌀 텐데.

*  *  *

“갑자기 웬 도서관? 그냥 기부금 몇 푼 내고 말지.”

“그래도 내가 4년을 다닐 학교인데 나 저런 도서관에서 절대로 공부 못 해.”

“공부 하긴 할 거니?”

“하는 척은 해야지. 학점은 뭐 알아서 잘 주겠지.”

“너, 그거 학과 비리인 거 아니?”

“너도 교수 일 도와주고 학점 잘 받았잖아.”

“……그, 그거랑은 다르지!”

“어쨌든 다음 학기부터 긴장해. 내가 24시간 붙어 다니면서 감시할 테니까. 어디 남자들 홀리고 다니는지 안 홀리고 다니는지 두고 보겠어.”

“내가 언제!”

화를 내는 척 하지만 정효주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오래 한 짝사랑에 비해 연애 시절이 너무 짧아서 나름 아쉬운 게 많았는데, 이렇게 연애 기분을 낼 수 있게 되었으니.

둘은 그대로 차를 돌려 한성산업으로 향했다. 빨간 페라리가 다가서자 경비원이 긴장했다.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대표이사님 이름으로 예약이 돼 있을 걸요. 확인해보세요. 유지웅이라고.”

“확인되었습니다.”

차단기가 들려지고 차가 진입했다. 본사 입구를 들어서자 연락을 받았는지 박문수, 이제는 사장인 그가 급히 뛰어나왔다.

“오셨습니까?”

사업적으로 갈라서긴 했지만 한성산업은 결코 유지웅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고품질의 블루 결정체는 여전히 제니스 공격대만이 공급할 수 있었다. 유지웅이 여러 모로 섭섭함을 품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박문수는 더더욱 고개가 숙여졌다.

“의뢰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이걸로 충전 장비를 만들어줬으면 해요.”

정효주가 블루 결정체를 내밀었다. 아부다비에서 획득한 결정체였다. 박문수는 공손히 그것을 받았다.

“이건 의뢰비입니다.”

유지웅은 5억짜리 수표 한 장을 건넸다. 박문수는 손사래를 쳤다.

“설비가동에 돈이 많이 들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받으세요.”

유지웅은 차갑지도, 매몰차지도 않게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박문수에게는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작용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수표를 받았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지웅은 끝까지 사무적으로 대했다. 박문수는 어렴풋하게 느꼈다. 만약 한성산업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예전처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한성산업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쳐나가야 한다. 조금 막막해졌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가볍게 끄덕인 유지웅은 정효주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 입구를 통과할 때 그녀가 말했다.

“사장이 너 많이 어려워하는 눈치던데?”

“어려워해야지, 그럼.”

“충전장비 만들고 나면 어떡할 거니?”

“어떡하고 자시고도 없어. 한성산업 놔줄 때 이미 정리됐으니까. 각자 서로 갈 길 가면 돼. 최윤 사장은 내 그늘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눈치 같지만.”

최윤 이야기가 나오자 정효주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맞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지 않니? 최윤 사장님도 돈 많을 텐데, 왜 굳이 네 투자를 받으려고 해?”

“자본이 모자라나 보지. 돈 많다고 자기 돈 다 사업에 쏟아 부을 순 없잖아. 자기 먹고 살 건 남겨야지.”

“그렇게 돈이 많이 들까? 뭔가 다른 거 있는 건 아냐?”

“글쎄……. 뭐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아이템이라도 갖고 있나? 그래서 나한테 기대려고?”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두고 보면 알겠지. 암튼 난 내 그늘로 찾아온 사람 내쳐낼 마음은 없어.”

정효주가 궁극기를 쓰면 비거가 소모된다. 블랙 몹의 어그로를 끌기에는 좋지만, 문제는 그녀가 일찍 리타이어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S급 충전장비를 만든 것이다.

블랙 몹과 싸우고 싶지 않다. 그렇다 해도 대응할 수 있는 준비만큼은 갖춰야 한다.

방어장비와 S급 충전장비, S급 강화장비로 무장했으니 충분히 메인 탱커로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남은 것은 블랙 몹이 부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해외 전화 같은데? 받아 봐.”

전화를 받자 씩씩한 소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써, 저 곧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쿤겐?”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반가웠다. 그리고 조금 미안했다. 사실 그는 그녀를 거의 까먹고 있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을 연달아 겪은 터라 그랬다.

“미국 갔던 일은 다 해결됐어요?”

「네! 해결됐습니다. 그리고 제니스 감원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저를 위해서 자리를 남겨놓으셨더군요. 정말 감동했습니다.」

“……아, 그거요?”

유지웅은 뜨끔했다. 현재 딱 39명이라서 쿤겐이 자기까지 포함해서 40명 체제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브라우니까지 해서 40을 맞춘 건데. 이거 알면 소녀의 감수성에 상처 입지 않을지 걱정이다.

============================ 작품 후기 ============================

혹 제가 지금까지 써온 글 중에 하렘물이 있다 해도, 그것은 제 안의 악마가 쓴 글입니다. 결코 제가 쓴 글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그 악마는 퇴치되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이번 작품만큼은 순애물입니다.

실탄의 ㅅ은 순정의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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