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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181화 (181/1,550)

00181  우리 휴가 중인데요?  =========================================================================

워낙 바빠서 잠시 잊고 있기는 했지만, 쿤겐은 제니스로서 놓칠 수 없는 인재였다. 딜도 딜이지만, 탱커로서 그 단단한 맷집은 중요한 보험이었다. 위험한 레이드일수록 그녀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유지웅은 공항까지 쿤겐을 직접 마중 나갔다. 청바지에 흰 면티, 선글라스를 낀 평범한 나들이 차림으로 그는 공항게이트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쿤겐의 모습이 보였다. 자기 몸집보다 큰 여행 가방을 아무렇지 않게 질질 끌고 나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신기했는지 연신 그녀를 흘끔거렸다.

목을 살짝 덮는 커트머리의 백금발과 하얀 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은 그림에서 걸어 나온 듯한 엘프 미소녀였다. 사내아이 같은 헐렁한 캐주얼이 살짝 아쉽긴 했지만, 그런 옷차림으로도 그녀의 미모를 감출 수 없었다.

“여기예요.”

“써.”

그를 알아보고 쿤겐이 얼른 달려왔다. 앞에 선 그녀는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중요한 때에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미국 간 일은 잘 해결 됐나요?”

“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 때문인지……?”

“아, 별 거 아니었습니다. 할아버님이 약혼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헛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주고 왔습니다.”

“그,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그럼요. 예전에야 경호원 뚫을 힘이 없어서 할아버님 뜻대로 살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방어능력만큼은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육탄전으로 그녀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유지웅은 갑자기 그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불쌍해졌다.

가만, 그러고 보니 쿤겐은 여자가 아닌가?

“혹시 약혼 상대가……?”

“제이스 록펠러입니다. 아직도 포기 안 했더군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쿤겐은 이가 갈리는지 두 팔로 자기 옆구리를 껴안았다. 가녀린 미소녀가 그러고 있으니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유지웅은 록펠러를 마냥 탓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정효주가 없었다면 자신도 그녀에게 구애했을지 누가 아나? 아니, 아직 열세 살 밖에 안 됐으니 좀 더 기다렸다가…….

‘이게 무슨 생각이냐.’

그는 얼른 자기를 탓하고는 쿤겐을 안내했다.

“묵을 데는 있나요?”

“없습니다. 호텔을 구해야 합니다.”

“그럼 일단 우리 집에 머무는 건 어때요? 방은 많으니까.”

“영광입니다.”

인천공항 헬기 이착륙장에 들어선 쿤겐은 시동을 걸고 있는 V-23을 보고 무척 감동했다.

“역시 써의 재력은 대단합니다. 존경합니다.”

“나도 선물 받은 거예요.”

V-23에 탄 건 좋았다. 근데 타고 나니까 미처 몰랐던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뭐냐 하면 V-23은 바로 부부 전용이라는 것이다. 즉 탑승 공간이 침실처럼 꾸며져 있다. 무슨 모텔 분위기까지는 아니지만 사적인 침실 같은 곳에 쿤겐 같은 미소녀와 단둘이 있으니 괜히 긴장이 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쿤겐의 미모가 어디 보통인가? 그녀 또한 탱커라 정효주와 막상막하를 이룬다. 정효주가 정통 동양 미인이라면, 쿤겐은 정통 서양 미인. 그것도 탱커 보정을 받은 사기적인 스펙의 소유자.

괜히 더워지자 유지웅은 부채질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아참, 쿤겐. 탱커도 리타이어 된다는 거 알아요? 나 그거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 알고 있었어요?”

“빛 공격을 4, 5번 정도 쓰면 저도 리타이어 됩니다. 그럼 보통 사람 힘 정도 밖에 못 냅니다. 그래서 제가 하루에 3번으로 제약을 걸고 있는 겁니다.”

“그래요?”

“예. 리타이어 되지 않기 위한 최대 공격 횟수가 3회이기 때문입니다.”

쿤겐은 단단한 탱커이지만, 딜을 할 때에는 원거리 딜러 형태로 공격한다. 탱커가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는 방어막을 뚫고 딜을 괴수 신체에 충격을 가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어그로를 끌지 못하는 것이다.

딜러의 공격은 강력하지만 탱커처럼 방어막을 뚫지는 못한다. 대신 방어막을 빠르게 중화해서 없애버린다. 방어막이 완전히 벗겨진 괴수는 거대한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도착했네요.”

“정말 빠르군요.”

쿤겐은 여행 가방을 끌고 내렸다. 무겁지도 않은지 가볍게 들어 올린다. 착륙장에서 기다리던 정효주가 둘을 맞이했다.

“왔어요, 쿤겐?”

“오랜만입니다, 미세스 정.”

정효주를 보고 쿤겐은 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엄격하다 싶을 정도로 정중한 태도였다.

“이 방을 쓰세요.”

정효주는 미리 골라 놓은 2층의 방으로 안내했다. 20평 정도의 원룸처럼 갖춰진 널찍한 방이었다. 욕실, 간이주방 등 갖출 것은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50인치 벽면 TV와 노트북까지 있었다.

“식사는 우리와 같이 하면 돼요. 우리가 없거나 혼자 먹고 싶을 때는 고용인들에게 부탁해요. 고용인들을 부르고 싶을 땐 여기 벨을 눌러요. 그리고 1층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해도 되는 공간이니 부담 갖지 말고요.”

“감사합니다.”

쿤겐은 너무 예쁘다. 그래서 정효주도 처음에 여자라는 걸 알고 긴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다. 설마 열세 살 짜리한테 남편이 흑심을 품겠는가 하는 믿음이 있었다.

나이를 알고 나자 오히려 그녀를 볼 때마다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타지 생활이 만만치 않을 텐데. 호텔이 마냥 편한 곳도 아니고 말이다.

그날 저녁은 정효주가 솜씨를 부려 셋이서 만찬을 했다. 쿤겐은 생긴 것 같지 않게 먹성이 대단히 좋았다.

“정말 맛있습니다. 호텔 음식은 비교도 안 되는군요. 매일 이런 것만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해놨으니 마음껏 들어요.”

항상 의젓한 모습만 보이던 소녀가 먹을 걸 눈앞에 두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아이는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정효주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쿤겐, 괜찮으면 당분간이 아니라 아예 여기에 계속 머무르는 건 어때요? 방도 많은데.”

“예?”

그 말에 쿤겐이 놀라서 멈칫 했다. 푸른 눈동자가 잠시 좌우로 구른다. 그 모습도 귀엽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두 분 한창 신혼이신데, 제가 있으면 방해가 되진 않을까요?”

“우리 둘만 사는 집도 아니고 고용인들도 몇 십 명이 넘는데 괜찮아요.”

시댁 친척이 같이 사는 것은 부담스럽다. 시댁 식구는 아무래도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겐이 산다 해서 눈치를 볼 일은 없다. 즉 신혼 생활에 타격은 없다.

“저야 그렇게 해주시면 좋습니다만…… 써가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보니까 물건도 건실하신데 괜히 저 때문에 부부생활에 타격이라도 오면…….”

“괜찮아요! 난 괜찮으니까 그냥 여기 묵어요!”

유지웅은 기겁을 했다. 아니, 전에 보니까 물건이 건실하다니? 누가 들으면 대체 무슨 오해를 하려고!

“그럼 감사히 묵겠습니다.”

밝게 웃으며 쿤겐이 인사하고 다시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유지웅은 한시름 놓았다는 눈으로 정효주를 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쿤겐은 자기 방에 올라갔다. 부부도 3층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운 유지웅이 아내를 부둥켜안고는 슬슬 어루만졌다. 못된 손은 벌써 자기가 알아서 그녀의 옷을 한 겹씩 벗기고 있었다.

“너 공항 간 사이 남기철 씨가 나한테 전화 했어.”

“내가 아니고 너한테?”

“응. 미국 레드 몹 이야기 꺼내던데.”

“안 간다니까 그러네. 막말로 우리 미국 갔는데 미국이 안 보내주면 어쩌려고 그러지? 대비책도 없잖아.”

순수한 폭력에 항거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폭력뿐이다.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그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 일단 미국의 의사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데, 미쳤다고 들어가나?

“정부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번 정권은 속이 음흉하기로 소문났다. 그쯤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남기철이 자꾸 전화하는 이유는 뭘까.

어느새 정효주의 옷을 다 벗겨냈다.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을 슬쩍 문지르자 그녀가 더욱 바짝 안겨 왔다. 인사하듯 입술을 가볍게 몇 번 부딪치고는 다리를 교차하며 단단히 끌어안았다.

“시험 언제부터야?”

“다음 주부터 공부해야 돼.”

“그전에 섹스 많이 해둬야겠다.”

“치. 언제는 시험 기간에 놔둔 것처럼 말한다?”

“그 정도면 진짜 많이 양보했지. 하루에 두 번 밖에 안 했는데…….”

“시험 전에 레이드 몇 번 가자.”

“그러자.”

여체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몸이 뜨거워지며 점점 말수가 줄었다. 눈빛만 봐도 서로가 무얼 원하는지 안다. 매끈한 육체 위로 몸을 실으며 입술을 찾았다.

*  *  *

완성된 충전 장비를 박문수 사장이 직접 들고 찾아왔다. 유지웅은 일단 1층 접객실로 그를 맞이했다. 정효주가 차를 내오고는 그의 옆에 앉아 관심을 보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팔찌 형태 장비는 유지웅이 착용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였지만, 착용 부위 색이 달랐다. 정효주는 장비를 집어 들고는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거 바쁜 분이 이렇게 올 필요는 없었는데. 제가 찾아가려고 했거든요.”

“아닙니다. 제가 직접 찾아와야 할 일이지요.”

박문수는 예전보다 더욱 유지웅을 어려워했다. 셋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정효주는 박문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손목에 착용한 팔찌에만 관심을 보였다.

“회사는 잘 되나요?”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 문제없이 돌아갑니다.”

“다행이군요.”

박문수는 가끔 후회를 한다. 차라리 방어장비에 대해서 솔직히 털어놓고 그의 처분을 구했어야 옳았을까? 순순히 한성산업을 놔준 것을 보면, 아마 그는 사익을 위해서 방어장비를 사장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의 의중을 멋대로 짐작하고 일을 추진한 것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내쳐진 건 아닐까?

“최윤 사장님이 회사를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예.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분을 모두 청산하겠다고 해서 프리미엄을 얹어 사주었습니다.”

“그랬나요?”

그건 몰랐던 유지웅은 조금 놀랐다. 한성산업의 지분은 앞으로 가치가 더 뛰어오를 황금종목이다. 프리미엄을 얹었다 해도 지금 처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최윤은 당장 현금이 많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한성산업과 완전히 갈라섰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랬던 걸까?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저희는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요.”

“……예.”

박문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결국 꺼내지 못했다. 방어장비를 실용화하면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유지웅의 지원이라는 가장 큰 힘을 잃었다. 하지만 상대는 한성산업에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것만 재차 확인했을 뿐이다.

“마음에 들어?”

“응. 이게 있으면 이제 리타이어 걱정 없이 마음껏 근접 특수기술을 쓸 수 있다는 거지?”

“왠지 우리 둘이서도 레드 몹 잡을 수 있을 거 같지 않니?”

“설마. 힐러는 몰라도 딜러는 있어야 돼.”

“아부다비에서 한 마리는 거의 우리 둘이서 떡실신 시켜놨었잖아. 그것도 두 마리였는데. 그거 보면 가능성 있지 않나?”

“글쎄…….”

정효주도 반신반의하며 주저하는 눈치였다. 논리적으로는 그럴 듯한데 아무래도 힐러, 딜러 없이 둘이서 레드 몹을 잡는다는 것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다.

“사실 딜러가 많이 필요한 게 방어막 중화시키려고 그러는 거지, 방어막만 무시할 수 있으면 그냥 고깃덩이잖아? 근접 궁으로 방어막 아래 직접 타격 가하면 레드 몹이라도 지가 무슨 재주로 버티겠어? 아부다비에서도 한 번 했잖아?”

“그래도 좀…….”

“한 번 시험 삼아 몰래 가보자. 하다 안 되면 지원 요청 하면 되지 뭐. 시간 끄는 거야 주구장창 할 수 있으니까.”

“그럼 브라우니도 데려가. 쿤겐도.”

그날 정효주는 충전 장비에 비거를 전부 집어넣었다. 덕분에 리타이어 상태가 되어 남편한테 또 괴롭힘을 당했다. 탱커의 강인함을 잃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 몸이 비거 없이는 정말 연약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이 꽤나 거칠게 한다는 것도. 한 번만 했는데도 온몸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근데 남편은 그게 귀여워서 좋다고 계속 몰아붙였다.

다음 날까지 회복에 쏟아 붓고 그 다음 날 둘은 레이드에 나섰다. 혹시나 해서 브라우니와 쿤겐도 데리고 갔다.

“이 멤버로 레드 몹을 잡는 겁니까?”

쿤겐은 불안함을 나타냈다. 힐러가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딜러가 전혀 없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 시험해볼 게 있어서 그래요. 하다가 안 되면 바로 지원 요청할 거니까 괜찮아요. 버티는 거야 몇 시간이고 가능하니까 문제없어요.”

“저는 뭘 하면 됩니까?”

“일단 지켜보기만 해요. 내가 지시할게요.”

공개적으로 할 만한 레이드가 아니라서 장태준 등 지원팀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모르는 극비 레이드였다. 정부는 레이드 개시 전까지는 옐로 몹을 잡는 줄로 알고 있을 것이다.

목표는 스키너. 영리 목적으로 잡았던 최초의 레드 몹이다. 거대 전갈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바위틈에 숨어 살고, 강력한 꼬리 공격이 위협적인 공격형 레드 몹이다.

레이드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브라우니, 쿤겐이 나설 것도 없었다. 정효주가 쥔 장검이 빛을 뿌리며 가를 때마다 스키너의 사지가 터져 나갔다.

괴수 입장에서 탱커의 무기는 맹수에게 들이댄 바늘이나 마찬가지다. 조그만 녀석들이 바늘로 찔러봐야 아프기만 하지 무슨 목숨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바늘에 화약이 달렸다면 전혀 이야기는 다르다. 아프게 쿡쿡 찌르는 수준이 아니라 살점을 헤집고, 근육을 뜯어낸다.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으면 결국 죽게 되는 것이다.

“……와.”

정효주는 자기가 해놓고도 놀라서 얼떨떨했다. 힐러, 딜러 없이 둘이서 레드 몹을 잡았다. 모르는 이들이 들었다면 거짓말이라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쿤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끄으응…….

브라우니는 정효주가 쥔 블루 결정체가 먹고 싶은지 부리를 들이대며 연신 끙끙거렸다.

“안 돼. 비싼 거라서 못 줘.”

브라우니는 실망한 듯 머리를 축 늘어뜨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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