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2 내 와이프를 소개한다 =========================================================================
“결계가 안 써져. 너한테 보호막이 걸려 있어야 쓸 수 있는 건가 봐.”
괴수의 방어막을 취소하고 그 힘을 흡수하는 보호막 결계는 퍼플 결정체의 힘이다. 그런데 퍼플 결정체는 둘의 몸에 각각 나누어 깃들어 있다. 당연히 그 혼자만 있으면 발동이 안 되는 것 아닐까?
대강 설명을 들은 정효주도 놀라워하면서도 이내 납득했다.
“하긴, 나도 보호막 안 받으면 근접 궁극기를 못 쓰잖니? 그 생각이 맞는 거 같아.”
“젠장,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했지.”
아기 걱정은 안 하고 전장까지 달려온 와이프가 야속하긴 했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부부싸움은 잠시 묻어둬야 할 때. 이런 거 보면 아무래도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은데?
“아무튼 대략적인 건 남 국장님한테 들었어.”
“그 양반, 돌아가면 내가 가만 안 둬.”
“왜 엄한 사람한테 그러니?”
“아니, 집에서 산후조리 해야 할 임산부한테 왜 그런 위험한 이야기를 한 거야? 애 떨어지게? 그 이야기만 안 했어도 네가 여기 안 왔을 거 아니야?”
“웬 산후조리? 아직 애 안 낳았거든? 그리고 나 안 왔으면 과부 됐을 건데?”
“어쨌든! 그 양반 가만 안 둘 거야!”
정효주가 보기에는 괜한 투정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투정이 고마웠다. 남자로서, 자기 애를 가진 여자가 위험한 곳에 자기 때문에 왔다는 게 싫은 것이다. 그런 마음을 괜히 남기철에게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진짜 이게 뭐야. 결계쯤은 혼자서도 쓸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는 괜히 투덜거렸다. 저런 녀석쯤이야 혼자서 처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 임신 중인 와이프까지 이곳에 달려오지 않았나.
“뭐 어때서? 난 우리 둘이 같이 있어야 힘을 쓸 수 있다는 게 좋은데.”
“뭐가 좋아? 불편하기만 하지.”
“하지만 그래서 우리 못 헤어지잖아. 난 안심이 돼.”
“헤어지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거 없어도 우리가 헤어질 일이 뭐가 있어?”
쪼개진 퍼플 결정체는 아무래도 합쳐져야 작동하는 것 같다. 그래서 따로따로 있으면, 정효주든 유지웅이든 간에 누구도 2차 궁극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편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깊은 구속이다.
그는 구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모양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그를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에게 구속된다는 것이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어쩌면 그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왔잖니? 이제 빨리 처치하자.”
“너 보호막만 받고 절대 나서지 마. 탱킹한다고 나서면 진짜 나 화낼 거야.”
“안 나서. 애 안 낳았어도 나도 엄마라고.”
“그리고 나 화 풀린 거 아냐. 레이드 끝나고 각오해. 어디 임산부가 위험한 곳에…….”
진짜 화낼 거라고 해놓고, 또 화가 풀리진 않았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아무래도 레이드 끝나고 꽤나 많이 달래줘야 할 것 같은데.
브라우니가 고장 난 헬기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았다. 이미 불원숭이와 거리는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남은 헬기 편대가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공격 중이었지만, 불원숭이는 여전히 유지웅을 쫓고 있었다.
“저 놈 이상해.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리고 멀리 있었는데 갑자기 날 보고 쫓아 왔어.”
“혹시 퍼플 결정체를 느낀 건 아닐까?”
“나도 그런 거 같아. 먹어 치우고 더 강해지려고 쫓아오는 걸지도 몰라.”
“그럼 혼내줘야지. 너 따위가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자신 있게 웃어 보인 그녀는 전방으로 손가락을 뻗으며 힘차게 외쳤다.
“브라우니! 가서 물어!”
―키에에엑!
녀석이 신이 난 듯이 힘차게 날개를 펄럭이더니 쏜살처럼 날아갔다. 결정도 이만과 결정도 만삼천의 괴수가 그렇게 맞붙었다. 본래라면 만삼천짜리가 내빼야겠지만, 만삼천짜리는 오만짜리 두 주인 연놈을 믿고 덤벼들었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가는 법 아닌가. 까짓 결정도 몇 천쯤이야.
―키에에엑!
―캬아아아!
두 괴수가 서로 맞부딪쳤다. 믿는 구석이 있는 브라우니는 비록 녀석이 자신보다 쬐끔 강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조금도 주저 없이 달려들었다.
부리로 어깨를 쪼려고 하자 녀석이 주먹을 내리쳤다. 부리와 주먹이 동시에 상대에게 적중했다. 서로의 방어막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굉음이 울리고, 흙먼지가 비산하며 천둥 치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브라우니가 시간을 끌어주는 이때가 바로 기회였다.
“헬기는 언제 도착하죠?”
「금방입니다.」
잠시 후 기지에서 출발한 예비 헬기가 도착했다. 유지웅과 정효주, 쿤겐은 예비 헬기로 옮겨 탔다. 멀리서 천둥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새로 대장기가 된 헬기는 유지웅 커플을 태우고 전장으로 접근했다.
두 괴수가 서로 얽혀서 싸우는 바람에 주변 대지가 초토화되고 있었다. 이건 뭐 개싸움이 따로 없었다. 원숭이와 새가 싸워도 개싸움이 될 수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키에엑!
싸움 자체는 브라우니가 약간 밀렸다. 아무래도 결정체 에너지에서 끗발이 달리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래도 일방적으로 밀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불원숭이는 불원숭이 나름대로 새로 나타난, 결정도 만삼천짜리 녀석한테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어딜 봐도 자신보다 분명히 약하고 또 충분히 몰아세우고 있다. 때려 눕혀서 먹기만 하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상공에 호버링한 헬기에서 바라보며 정효주가 살짝 질린 듯이 말했다.
“저게 결정도 이만짜리라고?”
“정확히는 20,150.”
“원래 6,000이라고 하지 않았니?”
“그랬어. 그런데 레이드 도중에 갑자기 결정도가 변했어.”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레드 몹은 아니다. 사용하는 공격 기술도 그렇고, 가공할 만한 강력함도 그렇고. 이건 난이도로 치자면 블랙 타입인 히카리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럼 더 강해질 수도 있다는 거네?”
“그럴지도 모르지.”
“어쩌면 블랙 몹은 아닐까?”
그건 유지웅도, 그리고 이제는 장태준도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있는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그것을 발설하지 않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2만이면 이미 블랙 몹 수준 아니니?”
“……글쎄. 하지만 녹서스의 돌은 결정도 10만이 되었을 때 융합되면서 보라색으로 변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인위적인 융합이니까 그렇지. 자연적인 조건에서는 얼마부터 보라색으로 되는지는 알려진 게 없잖니?”
최초의 퍼플 결정체인 녹서스의 돌은 결정도 10만을 돌파하는 순간 색 변화를 일으켰다. 그래서 미국은 물론이고 유지웅도 ‘결정도 10만부터 블랙 타입 괴수.’라고 막연하게 추정할 뿐이다. 추정이라는 것은 계속 유지될 수도 있고, 또 뒤집힐 수도 있다.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때려잡자.”
“근데 지금 결계 쓰면 브라우니까지 타격 입는 거 아니니?”
“피하라고 해야지.”
유지웅은 정효주에게 보호막을 걸었다. 정신을 집중하니 짜릿한 감촉이 가슴을 쓸고 지나가는 게 느껴진다. 주의하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하고 넘어갔을 감촉이다. 아마 이것이 쪼개진 퍼플 결정체가 서로 이어졌다는 증거인 모양이다.
“브라우니! 피해!”
정효주가 외쳤다. 큰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로터음에 가려서 잘 전달될지 걱정이었다. 그런데 용케 알아들었는지 브라우니가 움찔하더니 슬슬 빼기 시작했다. 저 녀석, 귀가 엄청나게 밝은 게 틀림없다.
브라우니가 힘차게 솟구쳤다. 불원숭이는 한창 엉켜 싸우던 상대가 날아오르자 바짝 약이 올랐다. 힘껏 점프 했지만 브라우니가 옆으로 방향을 틀자 허공만 후려 갈겼을 뿐이다.
―키에에엑! 키아아악!
약을 올리듯이 브라우니가 날개를 퍼덕이며 소리를 질렀다. 꼬리 깃털이 살랑거리는 게 어지간히 기분 좋아 보인다.
―캬아악!
헛손질만 하고 땅에 쿠웅 착지한 불원숭이는 화를 견딜 수 없는지 마구 포효했다. 가슴을 터트릴 듯이 세차게 때려댄다. 지금이 기회다. 유지웅은 결계를 쓸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모, 목표 결정도! 또 다시 증가합니다! 3, 3만 돌파!」
막 결계를 쓰려던 유지웅은 긴급 보고에 딸꾹질을 할 뻔했다.
「5만 돌파! 6만! 7만!」
유지웅의 결정도는 5만. 그제야 그는 왜 저 녀석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달려들었는지 완벽하게 납득이 갔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달려들었으리라.
어쨌든 이쪽 입장에서는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결정도 이만도 완벽히 개방한 게 아니었다니. 저거 진짜 블랙 등급 아닌가?
“지웅아! 어서!”
정효주가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유지웅은 정신을 차리고 바로 결계를 펼쳤다. 불원숭이는 브라우니를 쫓지 않고 다시 헬기를 발견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브라우니는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높이 상승 중이었다.
번쩍!
헬기를 중심으로 하얀 광선이 터져 나갔다. 백색 섬광은 촘촘한 그물을 이루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쳤다. 눈이 내린 듯이 흰 빛이 서리처럼 내려앉으며, 막 달려들던 불원숭이를 고정했다.
―크르르르…….
불원숭이는 눈에 핏발이 선 채 움직이려 애썼다. 그러나 움찔움찔 마비 반응만 일으킬 뿐,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마법 같은 놀라운 현상은 호크아이를 통해 남김없이 촬영 되고 있었다. 통제소에서 지켜본 장태준도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계에 집중하며, 유지웅은 생각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결계를 사용한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미국에도 즉각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스파이는 물론이고 위성을 통해서도 현장을 감시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때가 되면 당당히 드러내 보일 생각이었다. 적당한 힘의 과시는, 자신을 대하는 주변의 태도를 가다듬을 수 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
불원숭이를 덮은 하얀 빛의 선에서 파란 빛이 점점이 맺히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뻗어나간 흰 그물을 타고 파란 빛이 한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결계가 뻗어 나온 중심, 바로 유지웅이 탄 헬기였다.
퍼플 결정체의 효과, 보호막 결계는 범위 내의 모든 괴수 방어막을 무효화한다. 뿐만 아니라 그 힘을 흡수해서 유지웅이 원하는 대상에게 불어넣는다. 그럼 그 대상은 일시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효주는 안 되고, 쿤겐!’
가랏, 쿤겐! 당신의 힘을 보여 줘!
“써?”
“지, 지웅아?”
두 소녀가 기겁을 했다. 한 쪽은 유부녀지만 그래도 소녀처럼 생겼으니까 소녀라고 해두자. 왜 저러지 싶었는데 유지웅은 그들이 가리키는 대로 돌아보고 기겁을 했다.
“뭐야? 날개가 왜 여기 나 있어?”
빛의 날개가 자기 등에 나 있었다. 쿤겐에게 힘을 넣어주려고 했는데 뭔가 잘못된 모양이다. 아니, 그전에 왜 결계로 흡수한 힘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생각을 못했지?
“빨리 써! 저러다가 괴수 움직이겠어!”
“어, 어떻게 쓰는 거야?”
“그냥 써! 의지를 발휘해 봐!”
딜을 하듯이 하면 되나?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유지웅은 불원숭이에게 보호막을 건다는 느낌으로 힘을 방출했다. 이러다가 진짜 보호막이 걸리면 어쩌지?
번쩍 하고 빛이 터졌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휘황찬란한 광휘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대성보구의 진정한 사용법을 깨달았도다.
“대체 내가 저번엔 뭘 안 한 건데?”
―진명을 외치지 않았다.
“A 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