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귀족이다-243화 (243/1,550)

00243  거인의 움직임  =========================================================================

그냥 좀 편하게 연구자와 기술자를 고용하려고 추진한 일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끌시끌해졌다. 언제나 유지웅을 예의주시해왔던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서특필했다. 특히 언론은 기술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이공계 기피 현상 등과 중점적으로 엮어서, 공학을 천시하는 사회 풍조의 문제점을 역설하는 등 꽤나 구체적이고 밀도 있는 기사를 쏟아냈다.

「기술자와 연구원의 재취업에 제한을 두는 것은 기업, 특히 중소기업의 기술 유출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두는 제약이다. 특히 대형 기업이 중소기업의 핵심 기술을 빼내기 위해 무차별 헤드헌팅을 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또한 고부가가치 기술을 개발한 연구원에 대한 인센티브가 미흡한 것도 심각한 문제다. 노력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일정에 쪼이는 철야 근무, 생색내기 성과급 지급 정도가 다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공계 천시 풍조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생산적인 의견만 개진한 건 아니다. 단순히 말초적인 부분만 건드리며 불붙은 데 기름을 끼얹기 주력한 언론사도 있었다. 이들은 유지웅에 대항한다기보다는 단순히 유명인을 흠집 내고자 하는 파파라치에 불과했다.

「기술자에 대한 제약 해지는 결국 유 모 씨가 자기 연구단지에 쓸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손쉽게 고용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 사람의 입맛, 이기심을 위해 오랫동안 이 나라의 기술 시장을 보호해온 법률을 뜯어고치는 것은 개그가 아닌가? 어떤 부패한 정치가도 이렇게까지 막나가지는 않는다.」

사실 그 기사를 보고 유지웅은 뜨끔했다. 자기 속마음을 정확히 맞춘 기사였기에. 그래도 그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다행히 기술자와 국내 이공계 대학생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고 있었다.

약간의 이기심 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그거 때문에 누군가는 박대를 벗어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다른 이도 아닌 사회적 약자라면, 불순한 본의에서 시작한 일이라 해도 끝까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진 않아도 될 것 같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기본 4개월 이상 야근을 합니다. 자정이 넘어야 그때부터 야근 근무라고 쳐줍니다. 자정 경에 퇴근하는 것은 정시 근무나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새벽까지 일하고도 다음날 칼같이 출근해야 합니다. 하루에 2, 3시간씩 자며 일만 하는 생활을 몇 개월씩도 넘게 합니다. 그게 다반사입니다.”

“로봇이 좋아서 공학에 오긴 했는데, 나중에 내 자식은 절대로 공대 안 보낼 거예요.”

“그냥 치대 붙었을 때 거기 갈 걸 그랬어요. 약대도 붙었었는데 그래도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 때문에 이 길로 왔는데…….”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 그간 억눌려 있던 이들이 한꺼번에 터진 듯 울화 섞인 목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정치권도 여론이 거세게 불붙자 화들짝 놀랐다.

공인, 그것도 사회적인 영향력이 막대한 인물의 행보는 언제나 주변의 예의주시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런 거물의 발언 하나, 발걸음 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진의를 해석하기 위해 애쓴다.

나비가 일으킨 바람도 태풍이 될 수 있는데, 거인의 행로가 지반을 흔드는 건 왜 못하겠는가. 흑석동 저택까지 찾아온 젊은 기업가들을 그렇게 상대해주고 난 뒤, 가만히 있는데도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여야에서는 발 빠르게 기술자 처우를 개선하는 수정 법안을 내놓았고, 거기에 맞춰 또다시 여론이 불이 붙었다. 한국 전체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형, 이 법이 통과되면 우리 일성에는 좋은 거 아니야?”

이재형은 사촌동생인 이현준의 질문에 혀를 찼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일성그룹에 입사한 이현준은 똑똑하기는 했으나, 아직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았다.

“법만 놓고 보면 그렇지.”

“법만 보면? 다른 게 있어?”

“이대로 통과만 되면 우수 인력을 우리가 독점할 수 있어. 어디까지나 세종시 연구단지가 없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일성전자라 할지라도 제니스가 가진 영향력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아니, 제니스가 아니라 제니스 오너 한 명이 바로 그렇다. 이대로 법 개편이 이뤄지면 대기업이 기술 인력을 빼내오기 쉬워지겠지만, 제니스에 비한다면 일성전자도 중소기업 취급을 받는다는 게 문제다.

이재형은 머리가 아팠다. 그렇지 않아도 연구소의 핵심 인력들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유지웅이 공시한 연구 조건, 환경이 너무 좋기 때문이다. 특히 회사 소속으로 개발한 특허를 연구소가 소유하기는 해도, 일정한 비율에 따른 로열티를 계속 지급한다는 조건이 충격적이었다.

“이대로는 우리 일성 연구소도 위험해. 대체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  *  *

새롭게 사명을 재단장한 ‘일성결정체’의 부사장으로 취임한 이희연은 고급 세단 뒷좌석에서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화장도 점검했다.

스물네 살. 여자 나이로서 한창 아름다울 나이. 좋은 혈통을 타고 난 덕에 그녀는 예뻤고, 또 집안도 좋았다. 국내 제일의 대기업인 일성그룹의 손녀란 타이틀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만나러 가는 상대는 그런 자신도 쉬이 약속을 잡기 어려운 거물이었다. 지위나 권한, 그런 거 없이 사람 그 자체에서 나오는 영향력으로 치면 아마 현 세계에서 제일가는 인물이지 않을까?

‘유 회장은 아직 젊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2년 전, 할아버지는 그렇게 스치듯이 내비치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철혈 기업가로 유명한 할아버지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2년 전만 해도 여기저기 혼담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 뚝 끊겼다. 그녀도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주변을 정리하고 행동거지를 반듯하게 했다.

젊은 여자가 남자를 멀리하고 홀로 인내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보통의 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인 자신보다, 일성가의 손녀인 자신을 더 중요시했다. 여느 여자와 달리 그녀에게는 커다란 야망이 있었다.

‘나도 할아버지 손녀는 맞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유부남이긴 하지만, 인생을 걸고 공략해볼 만한 대단한 남자를 이미 봐버렸다. 이미 안다. 그래서인지 시시한 남자는 흥미가 사라졌다.

무턱대고 접근하는 게 아니다.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며, 적당히 가까운 곳에 차분히 머무르는 것이다. 성급한 접근은 상대의 경계심을 사고,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하다.

언젠가는 그도 질릴 것이다. 권태기도 올 것이다. 그런 때가 찾아오면, 누구보다 빠르게 낚아채기 위해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가장 정숙하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면서.

아직도 그녀는 그를 만나기 직전이면 가슴이 떨린다. 크게 숨을 고른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안녕하셨어요?”

“오셨나요?”

공격대 사무소에 있던 유지웅은 친절하게 맞이했다.

“좀 비좁죠?”

“아니에요. 참 보기 좋아요.”

“에이, 그래도 좀 좁은 건 사실인데요. 그래서 이사나 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예 이참에 공격대 사옥을 새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고…….”

지금 공격대 사무소가 임대한 건물도 꽤 좋은 위치에 신축한 지 얼마 안 된 깨끗한 건물이다. 임대료도 상당히 비싸다.

유지웅은 얼마 전에 일 관계로 비서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비서팀을 만들었다. 비서팀이 일할 장소가 필요하다 보니 공격대 사무소 한편에 자리를 마련했다.

비서팀은 유지웅의 손발이 되어 모든 자잘한 일을 도맡아 한다. 근데 그 자잘한 일이라는 게 정부 및 대외 교섭 창구, 외부 인사 스케줄 조정, 공격대 및 업무 관련 자금 집행 같은 게 포함된다는 게 문제다. 뻑하면 정부 인사, 외국 대사, 그리고 자문단이 드나들고 있어 공격대 사무소가 너무 난잡해졌다.

오늘도 그 문제로 방문한 상태였다. 장태준이 지원팀 본연의 일을 하기 어수선하다고 호소했기 때문이다.

“제가 듣기로는 연구단지에 따로 공격대 사옥을 짓는다고 했던 거 같은데요?”

“그랬는데 그게 언제가 될 지 한참 멀었잖아요. 그동안 근무 환경이 이렇게 난잡해서야 될 일도 안 되죠.”

“그래도 새로 사옥을 사는 건 너무 낭비 같은데요.”

“에이, 얼마나 한다고요.”

이희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재벌가 손녀였지만, 고작 몇 개월 잠깐 쓰고 버리자고 빌딩 한 채를 사겠다는 발상은 안 한다.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아, 이번에 발의하신 정책 법안 때문이에요.”

“그건 왜요?”

“발의하신 취지는 저도 공감하지만…… 몇 가지 염려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사실 기술자 스카웃과 기술 빼내기는 별개로 떼어놓을 수 없거든요. 실제로 타기업 기술을 빼낼 목적으로 연구원을 영입하는 경우도 많고요.”

이희연은 지난 2년 간 열심히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해서 지금은 유지웅과 그런 ‘나라 걱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들끼리 사석에서 나라 걱정, 정치 걱정하며 열변을 토하듯이 말이다.

물론 겨우 나라 이야기나 하자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 그의 진의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큰 힘이다. 오늘의 만남은 일성의 기본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중요한 방향책이 되어줄 것이다.

“아,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어요.”

“어디서 들으셨어요?”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살짝 궁금해졌다. 자문단이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HD테크인가? 그런 중소기업에서 사장이 사무소로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읽어 봤는데 참 사연이 구구절절했어요.”

“저도 들어볼 수 있나요?”

“회사에서 투자해서 유학도 보내주고 해서 연구원을 육성했는데 대기업에서 쏙 빼갔다고 하더라고요. 육성에 투자한 돈도 돈이지만 사활을 걸고 개발 중이던 신기술 연구 인력이 사라져서 부도가 날 뻔했다더라고요. 게다가 주요 기술을 아는 연구원들이 대기업에서 그 기술을 완성했대요.”

그녀는 조금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도 2년 간 지켜봐온 덕에 유지웅이란 인간을 남들보다 꽤나 잘 안다. 그는 특별한 사명감이 있는 거물이 아니다. 한국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졌으면서도, 사고방식은 그 나이대의 청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게 더 무섭고, 특별한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힘이 사람을 변화시키듯이, 갑작스럽게 얻은 막대한 부와 권력은 평범한 청년을 평범한 청년으로 남아 있지 못하게 만든다.

헌데도 그는 여전히 보통의 22세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돈의 힘, 권력의 힘을 휘두른다. 그 생각 없는 칼질에 고생하는 것은 나이 많고 이룬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은 기존의 주류층이었다. 그게 일반 국민들이 그를 질시하지 않고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다.

“확실히 그런 문제도 있지요. 그럼 그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

“그 대기업처럼 하는 곳, 망하게 만들어야죠.”

“네?”

“세상에 법이 전부인가요? 기업 윤리라는 게 왜 있겠어요?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편법을 써서 남의 피땀을 갈취하는 건 상도가 아니죠. 그런 짓을 하면 망할 정도로 과징금을 엄청 때려버리고 경영진도 전부 형사 처벌해야죠.”

유지웅은 그게 이해가 안 됐다. 기술 유출을 막으려고 기술자의 자유를 제한한다? 그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더 약한 자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뿐이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체념하고 책임을 아래로만 전가하는 것이다.

나쁜 짓을 하는 강자를 처벌하지 못하니까, 자꾸만 약자를 찾아 책임을 떠넘기는 식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희연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그것이 사회에 가져올 여파는 장난 아니다. 그리고 일성도 그 흐름에서 비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해왔는지 이해가 안 돼요. 기업 윤리에 어긋난 짓을 하는 대형 업체를 때려잡으면 되는데, 왜 약한 기술자만 쥐어짜는 건지 답답하더라고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일성가의 손녀인 그녀 입장에서는 마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지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하는 김에 그런 문제도 처리하려고요. 그게 사회 주도층의 도덕적 의무 아니겠어요?”

“……괜찮으시겠어요? 대기업 카르텔은 우리나라에서 막강한 힘을…….”

“괜찮아요. 제가 더 쎄요.”

“……외국 다국적 기업의 개입도…….”

“그래도 제가 더 쎄요.”

사회 주도층의 도덕적 의무 운운했지만, 원래 그가 직접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 친구와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다.

모든 것은 친구의 조언대로.

============================ 작품 후기 ============================

흔한_부자의_일상파트.TX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