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2 말하는 대로 =========================================================================
OCCD 회원국의 적극적인 보이콧에 중국 결정체 수출 판로가 봉쇄되었다. 중국도 손실이 크지만 결정체 수입을 중국에 의지하는 OCCD 회원국의 손해도 만만치 않았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선진국일수록 많은 결정체를 필요로 했고, 자국 생산량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서 해외에서 수입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지웅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지만 그 손실을 방치해서 좋을 게 없다. 하여 청와대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비축 물량을 중국 대신 공급합니다.”
“하지만 대통령님, 비축 물량은 국가 비상사태를 위해서 비축해놓은 물량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그 물량을 쓰기 위한 비상사태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대통령은 참모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비축 물량을 중국 대신 OCCD 국가에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부족한 물량 문제는 한국이 비상 비축 물량을 풀면서 임시적으로 해소되었다.
유지웅 또한 장식용으로 보관 중이던 결정도 1,000 대의 블루 결정체를 기존 중국 판로에 의지하던 OCCD 회원국에 연료 목적으로 공급했다. 843개나 되니 결정도로 따지면 무려 843,000이나 된다.
어쨌든 한국 정부가 절묘한 도움을 준 덕에 유지웅도 부담을 덜었다.
“1차 제재는 이걸로 일단 됐고.”
과연 중국이 얼마나 버틸까? 국제 사회가 그렇게 관심을 갖는 와중에 유지웅은 후속 제재 방법을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덕분에 자문단만 바빠졌다.
중국 정부는 수출 판로를 뚫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줄기차게 외교적 노력을 가했지만 소용없었다. 군사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공산당 내부 목소리도 높았지만, 괴수 때문에 국가 간 전쟁이 사실상 금지된 현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중국 정부는 유지웅과 직접 면담을 갖길 원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 * *
정효주는 임신 3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임신한 티가 전혀 안 난다. 알몸을 봐도 배가 별로 부풀었다는 느낌도 없다. 임산부 특유의 예민한 반응이나 입덧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탱커는 참 좋은 거 같아.”
그녀를 품에 안은 그가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가볍게 눈을 흘긴 그녀가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서 너도 탱커 되고 싶니?”
“아니. 내가 탱커인 거보다 탱커 와이프 데리고 사는 게 훨씬 낫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는 탱커와 결혼한 남자라는 말이 있다. 유지웅은 백 번 들어도 옳다고 생각했다. 직접 데리고 살아보니까 체감한다.
예쁘지, 건강하지, 밤일도 잘하지, 몸도 튼튼하지. 육체 강화형 인간들이라서 그런지 부지런하기도 하다. 남편에게 뭔 일을 시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다른 주부 탱커들도 그런지는 아직 확인 못 해봤다. 설마 효주가 유독 그러나?
“힐러 아내가 사준 집에 살고, 딜러 아내가 해준 요리를 먹으며, 탱커 아내와 같이 자는 게 남자로서 가장 큰 행복이래.”
“그건 또 뭐니?”
“힐러는 부자잖아. 딜러는 천민이고. 탱커는…… 말 안 해도 알지?”
정효주가 찌릿하며 노려보자 그는 피식피식 웃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도 표정을 풀고 그의 목을 껴안았다.
“이렇게 한가해도 돼?”
중국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일단 결정체 수출 봉쇄는 들어갔으니까 당분간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지.”
“중국을 어떻게 할 건데?”
“……글쎄.”
막상 그런 질문을 받자 할 말이 없어졌다. 중국이 납치하려고 든 게 괘씸해서 보복을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 보복해야하겠다고 선을 그어둔 게 없다.
“상황 봐서 그때그때 움직이지 뭐.”
“너, 가끔 보면 조금 대책 없는 거 같아.”
“대책 없어도 돼. 나 돈 많잖아.”
“그래도 조금은 주변을 돌아보고 움직여. 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얼마나 큰 의미를 두는지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중국 보복 조치를 통해서 유지웅이 본격적으로 결정체 자본가로서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관점이 나왔다. 유지웅 입장에서는 다소 어이없는 해석이었다.
유지웅은 사업가가 아니다. 일개 레이더일 뿐이다.(그 영향력과 위세는 잠시 별론으로 치자) 하지만 그 일개 레이더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국내 레이더를 대상으로 최대 규모의 보험 재단을 운영하고 있고, 한성산업의 옛 최고주주였으며, 또 수십 조 원 규모의 결정체 연구단지를 꾸미고 있다. IACP와도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으며, 미국에도 대농지를 보유하고 있다.
레이드로 번 돈을 통해 사업가로서 변신을 꽤한 레이더는 많다. 찾아보면 그런 사례는 널렸다. 유지웅의 행보도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제니스 공격대장은 다국적 결정체 유통업체인 SC컴퍼니처럼 국제 결정체 유통망을 쥐고 흔들려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유지웅의 음모’라는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중국 문제는 때마침 좋은 구실이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안 그래도 울고 싶었는데 중국이 때마침 뺨을 때려주었다는 것이다.
“너 음모론이 나도는 건 알고 있니?”
“음모론?”
“중국이 납치 시도를 할 걸 알면서도 네가 일부러 중국 영공을 지나는 항공기에 탔다는 거야.”
“재밌네. 그걸 사람들이 진짜 믿어?”
예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된다고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음모론을 들으니 재미있다. 정효주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말하면서 키득거렸다. 둘 다 예전보다 한결 성장했다는 증거이리라.
“이건 어때? 이참에 그 음모론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거야.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얘는. 그러지 마.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왜 그러니.”
“왜, 이참에 결정체 유통망까지 진출하면 돈 아주 갈퀴로 긁어모으겠네. 나중에 우리 금동이 돈 많이 물려주려면 지금부터 뼈 빠지게 일해야지.”
은근슬쩍 아랫배를 만지면서 그가 말했다. 금동이란 효주 뱃속에 있는 아이의 태명을 말한다. 정혜주가 지어준 이름인데, 뱃속에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있다고 해서 금동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어감이 좋아서 금동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그 뜻을 알고 바꾸려다가 그냥 말았다.
“예정일이 언제지?”
“3월 1일.”
“스물 셋에 엄마 아빠 되는구나, 우리.”
결혼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엄마 아빠라니. 왠지 감회가 새롭다. 보통 너무 젊어서 아이를 낳으면 불안한 마음도 크다던데 왜 그런 게 없지?
“방학 끝나기 전에 여행이나 한 번 다녀올까? 몰디브 어때?”
“가고 싶어.”
“그럼 내일 출발하자.”
초음속 전용 제트기가 있으니 역시 이런 게 좋다. 유지웅은 즉시 비서실장한테 전화해서 여행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하고 난 후 효주를 껴안고 다시 시시덕거렸다. 와이프를 품에 안고 있을 때면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잊는 것 같다. 그만큼 편안하고 안락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근심이 있긴 했던가?
그때 전화가 왔다. 강우석 의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유 회장님. 저 강우석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깐 뵐 수 없을까요? 긴히 드릴 말씀도 있어서요.」
아내를 안고 있으면 가지지도 않은 세상 근심을 다 잊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 말을 좀 더 보완해야겠다. 나라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없던 근심이 도로 생겨난다. 그것도 참 재주다.
* * *
자주 보던 한정식집에 리무진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유지웅은 요원의 안내를 받아 안에 들어섰다. 별채에는 먼저 도착한 강우석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강우석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건강하셨어요?”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고 유지웅도 자리에 앉았다. 정책 문제 때문에 자주 연락을 하긴 했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요새 꽤 요란하시더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정말 소문대로 국제 유통시장에 진출할 계획이십니까?”
강우석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동안 유지웅은 국내 결정체 유통시장에 관심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돈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큰 돈벌이가 되는 결정체 유통업에는 손도 대지 않은 게 이상했다.
하지만 파이가 너무 작아서 그랬다면 납득이 간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SC컴퍼니처럼 국제 유통업체를 노렸던 것은 아닐까?
“글쎄요.”
유지웅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회장님 소리도 꽤 자주 듣다 보니 이제 이골이 났다. 이럴 때는 확답을 하지 않는 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번에 유 회장님의 국제 파워를 크게 실감했습니다. OCCD 회원국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협조할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안전지대란 대단하군요.”
“꼭 저 때문만은 아니에요. 힘을 이용해 깡패짓을 하려는 국가를 응징하는 거니까요. 질서를 수호하는 국가라면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죠.”
강우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명분은 옳다. 하지만 명분대로만 세상이 흘러간다면 국제 사회의 약육강식이란 말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유지웅의 지금의 힘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과연 중국산 결정체 수입 중지라는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을까?
“국가결정체산업자원 중앙관리통제본부 재편성 계획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세부적인 구조도에 관해서도 청와대와 국회가 거의 합의했고요.”
“국가결정체산업…… 뭐라고요?”
“레이드 관리본부로 말하면 이해가 편하실 겁니다. 정식 명칭입니다.”
이름 한번 참 길다. 서너 번만 말해도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아시겠지만 결정체 관리본부는 현재 행정안전부 산하로 되어 있습니다. 국토개발부도 아니고 행정안전부 산하로 되어 있는 것 자체가 구조적으로 기형적이죠. 초기 도시 방위를 목적으로 설립된 기구가 점차적으로 거대해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랬나요?”
유지웅은 잘 모른다고 솔직하게 반응했다. 레이드 관리본부가 별개 부처이든, 국토개발부 산하기구이든, 아니면 행안부 산하기구이든 사실 알 바 아니지 않은가.
“이런 기형적인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그동안 결정체 관리본부를 별개 부처로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완편 구조에 관해서 좀처럼 합의를 이루지 못했죠.”
“어째서죠?”
“연간 원가만 200조 원을 넘는 국내 결정체 시장을 통제하는 거대 부서기 때문입니다. 돈을 다루는 곳에는 항상 이권 전쟁이 빠질 수 없죠.”
돈 문제라는 말에 유지웅은 이해가 갔다. 아마 자기 사람 심기라든가 뭐 여러 가지 지위를 놓고 진 빠지는 경합이 오고갔던 모양이다.
“청와대는 장관급 부처로 재편성하고, 내부에 민간 감시 기구를 두는 제도를 취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국회는 민간 감시 기구를 두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감시기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야 뻔하지 않은가. 돈을 좀 만져봐서 아는데, 돈에 관련된 사람들의 생각이란 게 사실 다 거기서 거기다.
“혹시 저를 보자고 하신 게?”
“국회를 설득해 주십시오.”
“알았어요.”
============================ 작품 후기 ============================
유재석, 아니 유지웅이 부릅니다.
"말하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