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귀족이다-256화 (256/1,550)

00256  말하는 대로  =========================================================================

“전에 땅을 매입해주셨을 때 진작 찾아 와서 감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먹고 살 길이 막막하고 바빠서 못했습니다. 저 아쉬울 때가 되니까 찾아오는 게 정말 죄송하고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매달릴 데가 없어서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나서기 직전, 제발 한 번만 만나달라는 일부 농민들이 있었다. 유지웅은 어떨까 하다가 한 번 시간 버리는 셈 치고 그들을 만나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대체로 30대 초중반의 젊은 농부들이었다.

시위만 일삼는 이들을 보다가 이렇게 정중하게 찾아오는 이들을 보자 유지웅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여러분들도 반환을 요구하러 오신 건가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오셨죠?”

“지난 몇 달 간 생업 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막막했습니다. 할 줄 아는 건 농사뿐인데 땅을 잃어서 이도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회장님의 자비에 한 번 기대보려고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회장님.”

“한 번만 도와주세요.”

서른 명이 조금 안 되는 장년층 농민들은 애타게 부탁했다. 유지웅은 잠시 침묵하다가 비서실장을 응시했다. 그가 보고했다.

“고소인 명단에 없는 분들입니다. 시위대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얼굴입니다.”

적어도 앞에서는 항의하고, 뒤에서는 철면피 쓰고 안 그런 척 애원하는 부류는 아니라는 소리다. 농민들은 가벼운 전율감을 느꼈다. 제니스 회장은 자기에게 반발하는 농민들 리스트를 이미 확보해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여러분들은 진심이시군요. 사실 고소장 제출해놓고 뒤로는 찾아와서 안 그런 척 애원한 분들도 있었는데.”

농민들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유지웅은 잠시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애초에 농지를 매입해준 건 조금이라도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한 기부였어요.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도움을 청하는데 조금 더 도와주는 게 어려울 건 없지요. 일단 여러분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돌아가셔서 기다리시면 좋은 대답을 들려드릴 수 있을 겁니다.”

“땅을 다시 팔아주시는 건가요?”

유지웅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땅의 소유권은 자신이었다. 반환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팔아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게 맞다. 그 점을 조심하는 걸 보니 이들은 적어도 가치관은 제대로 박힌 인물들 같다.

“들으셨겠지만 호남평야에서 농사가 다시 가능해졌어요. 벼가 완전 생장을 하는데 일주일 정도 밖에 안 걸리고, 수확량도 배 이상 늘었고요. 성분 검사에서도 이상 없고 가축을 상대로 먹여봤을 때도 문제는 없지만, 그렇다고 당장 식용 허가가 나지는 않아요. 시간이 필요해요.”

농민들은 귀를 바짝 세우고 설명을 들었다.

“나중에 이상이 없다고 확실해지면 재판매를 해줄 생각입니다. 하지만 매입할 때와 동일한 면적은 기대하지 마세요. 식용에 문제가 없다면 땅의 가치가 그때보다 천문학적으로 증가한 셈이니까요.”

“무슨 염치로 옛날 면적을 바라겠습니까. 그저 회장님이 자비를 베푸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세요.”

“돌아가 보세요. 그리고 결정이 나는 동안에도 지원할 방법을 한 번 생각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농민들 전부가 시위하고 항의한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진심으로 허리를 낮추고 원조를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유지웅은 그들에게는 당근을 제시했다. 정효주의 조언을 들은 것이다.

“굽히고 들어오는 사람은 받아주자.”

과연 그 효과는 컸다. 매스컴에서 그 일을 보도하자 국민들은 젊은 거부가 마음도 넓다며 칭찬했다. 반사 효과로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농민들은 도리도 모르는 이들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시위를 하던 이들 중 뒤늦게 깨닫고 애걸로 태도를 바꾼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지웅은 고소장을 제출한 이들과 시위에 참가한 이들의 명단을 이미 확보해두었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칼같이 날선 태도로 대했다. 만나주지도 않았다.

여기에 정부가 쐐기를 박았다.

「제니스 회장은 결정체에 오염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된 농지를 자발적으로 매입해주었습니다. 농민들을 위해 선뜻 근 30조 원이나 되는 재산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연찮게 레이더로서의 능력과 결합하여 농지가 다시 활용 가능성을 찾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농지를 매입했다는 것은 근거 없는 음해일 뿐입니다.」

호남평야의 소유권은 유지웅에게 있다. 상황이 바뀌었다 해서 재산을 강탈할 수는 없다. 또한 애초에 매입 행위 자체가 농민들을 위한 선의로 30조 원을 내놓은 기부 행위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건 은혜를 저버리는 파렴치한 행위다. 그런 식으로 점점 여론이 형성되었다.

자포자기한 강경 시위대는 더욱 거세게 나왔다. 흑석동 저택까지 찾아와서 과격한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에서 전경을 파견해서 시위대와 대치했다.

“참 그 사람 주변에서는 소란이 끊이지 않아.”

“많은 걸 불러오니까요. 여러 가지 의미로.”

보물의 주변에 문제가 들끓은 것은 당연한 세상 이치다. 국내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호남 이슈를 놓고 해외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특히 CNN 등 미국 언론은 대규모 취재진을 파견하기도 했다.

「정부는 계속해서 피해 농민들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구제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니스 회장은 그 문제와는 전혀 별개입니다. 그에게 땅을 반환하라는 것은 강탈 요구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그가 실망해서 다른 나라로 떠나면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안전지대 설치자를 잃게 됩니다.」

그 부분을 거듭해서 강조하자 일반 국민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호남평야를 매입해준 것, 그리고 대규모 결정체 연구단지 설립 등으로 인해 제니스의 국내 인기는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를 독점하지 않고 적당히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거부라며 많은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었다.

“시위대 너무 염치없는 거 아닌가? 오염된 땅이 옥토로 변해서 배 아픈 건 알지만 떼쓰듯이 내놓으라는 건 좀 아니잖아.”

“그것도 제니스 회장이 자기 능력으로 땅 성질을 바꾼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무슨 근거로 반환을 요구하는 거지?”

“차라리 먹고 살기 힘드니까 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간청하는 게 나았을 거다. 그럼 제니스 회장 성격상 너그럽게 주었을지도 모르지.”

“맞아.”

“시위에 참가 안 하고 처음에 재빨리 찾아가서 애원한 사람들이 정말 현명한 거지. 거 봐, 얼마나 마음이 넓어. 진심으로 부탁하니까 도와주겠다고 하잖아.”

“이제 스물두 살 아냐? 젊은 사람이 그 나이에 세계 제일의 부자로 자수성가했으면 그렇게 마음이 넓기 쉽지 않은대.”

“와이프가 그러자고 했다던데?”

“천사네.”

강경파 시위대는 정부, 국민, 어느 쪽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점차 고립되어갔다. 국민들은 이번 일 때문에 제니스 회장이 심기가 상할 것을 우려했다.

“과거 스케이트 메달리스트를 러시아에 뺏긴 것으로 족하다. 더 이상 나라의 자랑인 인물이 이 나라에 실망하게 만들지는 말자.”

사방에서 격려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만약 유지웅이 굽히고 나온 이들의 애원을 외면했다면, 이렇게까지 지지율이 상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선뜻 도움을 베풀기로 결정했기에 국민들이 감동해서 든든한 지지층이 되어준 것이다.

유지웅은 새삼 주변의 인식, 그리고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실감했다. 특별한 책임 의식을 갖고 도움을 베푼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회를 생각할 줄 아는 거부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영미권 부자들이 이 맛에 기부를 하는 건가?”

안슐이 그랬다. 기부도 하다 보면 재미있고, 보람되고, 중독이 된다고. 전에는 보람이 된다는 건 이해가 가는데 재미있고 중독이 된다는 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뜨거운 반응을 겪고 보니 비로소 그 말이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정부에서 강경층 시위대를 달래기 위한 긴급 예산을 편성해서 발표했다. 궁지에 몰렸던 강경층 시위대로서는 숨통을 트이게 하는 구명줄이었다. 그 덕에 항의도 점차 줄며, 호남평야를 놓고 둘러싼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  *  *

진심으로 허리를 숙인 농민에게 유지웅은 약속했다. 안전성이 확인되면 땅을 다시 판매해줄 거라고. 땅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겠지만 그들의 재정을 고려해서 적당한 가격을 책정해줄 거라고 말해주었다. 단 생산성 증대를 고려해서 판매 면적이 줄어들 거라고는 미리 상기시켰다.

대충 계산을 하면 최종적으로 호남평야의 10% 정도의 면적이 재판매 대상에 들어간다. 즉 그는 여전히 90% 이상의 땅을 보유하게 되는 셈이다. 사실 안정성만 입증되면 10%라 해도 어마어마한 생산성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재판매 수혜를 받는 농민 수도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90% 이상의 땅을 계속 갖기로 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부모님 때문이었다.

“이럴 때 한 번 효도해야지.”

전에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부모님은 땅 정말 다 돌려줘야 하냐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걱정했다. 평생 농사만 지은 분들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지웅은 부모님을 생각해서 90% 이상을 계속 보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부모님은 질겁했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 넓은 땅을 다 농사 지어?”

“엄마도 참. 요새 기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 그리고 사람 쓰면 되잖아. 아예 농업 법인 설립해줄까?”

“아이구, 무슨 법인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은근슬쩍 기대하는 게 다 보였다. 그래서 유지웅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석학들을 긁어모으고, 다방면에 걸쳐 임상 실험에 착수해 안전성을 빨리 증명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한편 제니스 제2차 예비대 인원 모집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꺼번에 인원을 늘릴 수는 없기에 일단 제2차 예비대로 40명을 모집했는데, 지원자 수가 수만 명을 거뜬히 넘어갔다. 1차 합격자를 걸러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유지웅은 먼저 1차로 합격자를 선발하고, 2차에서 면접을 통해 40명을 최종 선발하기로 했다.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다면 1차 합격자 중에서 제3차, 제4차 등등의 예비대 인물이 나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면접 대상자는 레이더가 아닌 사람들에게 선발을 맡겼다. 편견과 알력으로 불합리하게 탈락하는 사람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대신 면접은 그가 직접 주관했다. 비록 예비대라고는 하지만 비상시에는 본대에 합류하는 사람을 뽑는 작업이다. 공격대장으로서 한 명 한 명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면접장에서 유지웅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어? 김철희?”

“아시는 분입니까?”

“고향 동생이에요. 쟤도 제니스에 지원했구나…….”

1차 선발진에 들었다는 것은 국내 레이더 중 상위 5% 안에 든다고 봐도 좋다. 간간이 레이드를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2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 정도로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

유지웅은 김철희의 이력 내용을 자세히 살폈다. 아주 유명한 정공은 아니지만, 서열 15위 안에 드는 정공에서 서브 탱커로 꾸준히 활약한 경력이 있었다. 메인탱커는 보통 공격대장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팀의 에이스인 셈이다.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얼굴로 만날지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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