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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257화 (257/1,550)

00257  말하는 대로  =========================================================================

“김철희입니다. 클래스는 탱커입니다. 레드 몹을 사냥한 경험은 세 번 있습니다. 메인 탱커로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서브 탱커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면접 자리에서 김철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최종 면접에는 공격대장인 유지웅과 탱커장인 정효주, 딜러장인 쿤겐, 힐러장인 박현정 등 10여 명의 제니스 대원들이 참가했다.

“사람은 참 좋아 보여요. 경력도 괜찮은 편이고. 장비 상태도 괜찮고요.”

어느 딜러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유지웅 등 면접관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유를 아는 까닭에서다.

‘안 됐네.’

유지웅은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탱커나 근접 딜러는 여자만 뽑는다는 게 철칙이었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공격대 내부에서는 자연스럽게 눈치 채고 있었다.

탱커를 하다 보면 맨살이 드러나는 것은 다반사다. 유지웅은 정효주의 속살을 다른 남자들이 보는 게 싫어서, 제니스를 긴축하는 과정에 근접 딜러 및 탱커진을 전부 여자로 교체했다. 공격대장의 권한을 남용한 것이지만 어차피 사설 소유나 다름없는 공격대이니 무슨 상관일까.

그래도 남들에게 알려지면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해서 1차 심사에서는 자유롭게 선발하지만, 최종 면접에서는 여자만 남기고 다 떨어뜨리는 식으로 뽑기로 한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결과 있기 바랄게요.”

유지웅은 덤덤하게 말했다. 김철희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자리를 가릴 줄 아는 모양이다.

면접을 마치고 유지웅은 따로 김철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형이야.”

「아, 형.」

반가워하는 기색이 묻어난다. 들떠 있는 게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면접장에서 너 봐서 깜짝 놀랐다.”

「그렇게 놀랐어?」

“응. 니가 지원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난 아직 제니스에 지원할 레벨이 안 될까?」

“그런 말이 아닌 거 알잖아.”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지만,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매번 만나는 사이였다. 어렸을 적 같이 자란 기억이 있는 고향 동생이기도 했으니.

“레이드 열심히 했구나. 경력 보고 솔직히 놀랐다.”

「형이 사준 장비 덕분이지. 진짜 형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 없었을 거야.」

“스펙 보니까 몸 하나는 정말 튼튼하던데. 왜 서브 탱커를 하고 있어?”

「막공은 좀 운영을 해봤는데 정공은 어찌어찌 운영하는 게 안 되더라. 같이 다니던 고향 친구들도 다 흩어졌거든. 이익 문제도 서로 부딪치고 해서 그냥 편하게 따로 레이드하고 있어. 지금은 그냥 친구로서만 만나.」

김철희가 갓 레이드에 발을 내딛었을 때에는 힐러가 더 우대받는 게 당연시되었다. 그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건 당시 김철희로서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향 친구 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갈등이 더 심해졌을 수도 있었다. 차라리 일찍 갈라서서 따로따로 레이드를 한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건 잘했네.”

「솔직히 옛날에 프라임 공격대 바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형이 안 불러줘서 조금 아쉬웠어. 근데 시간 지나고 보니까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더라.」

“내가 바로 너 프라임에 투입해줄 수도 있었어. 근데 그랬으면 너한테 오히려 해가 됐을 걸?”

「응. 형, 진짜 나 지금은 준비 완벽하게 됐어. 제니스에 들어가도 다른 사람 신세 안 지고 내 몫 해낼 자신 있어.」

자신 있게 말을 하자 유지웅은 더욱 미안해졌다. 근접 딜러진과 탱커는 같은 조건이라면 무조건 여자를 쓴다. 그 방침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우리 집에 올래? 효주도 너 한 번 초대하고 싶어 하던데.”

「지금?」

“바빠?”

「아니. 바로 갈 수 있어.」

전화를 끊자 정효주가 다가와서 팔짱을 꼈다.

“누구랑 이야기했어?”

“철희. 우리 집에 초대했어.”

“어머, 지금? 그럼 바로 가서 준비해야겠네.”

정효주는 가볍게 호들갑을 떨었다. 둘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철희 많이 씩씩해졌더라. 이제 어엿한 탱커던데?”

“그래. 떨어뜨려야 하는 게 미안할 정도야. 아쉽기도 하고.”

“왜 떨어뜨려?”

“알잖아. 탱커랑 근접 딜러진 남자 안 쓰는 거.”

배우자의 적당한 소유욕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자기 알몸을 딴 남자에게 보이기 싫은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정효주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철희를 떨어뜨리는 건 너무 아쉽던데…….”

“걔도 남자는 남자야.”

“너, 철희가 어렸을 때 나 졸졸 따라다닌 거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지?”

“맞다고 해두지 뭐.”

“뭐니. 재미없게.”

“아무튼 난 딴 남자가 니 가슴 보는 건 못 봐줘. 철희는 고향 동생이니까 더더욱 안 돼.”

“겨우 레드 몹 잡는데 내 맨살 보일 일이 뭐 있니? 방어장비도 있겠다, 레드 몹은 그냥 우리 둘이서도 잡겠다, 그럴 일이 없잖니?”

“…….”

유지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그랬다.

“하지만 만약 블랙 몹 잡을 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내 맨살 보이는 게 문제니? 한 명이라도 더 유능한 탱커를 써야지.”

“음…….”

“근접 딜러는 사실 인재풀도 넓으니까 상관없어. 근데 탱커는 힐러만큼은 아니어도 워낙 수가 적어서 그게 안 돼. 그중에서 센스 있는 탱커를 선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탱커는 전체 레이더 중 3% 밖에 되지 않는다. 힐러와 비슷한 수치지만 공격대에는 힐러가 더 많이 필요하기에 탱커는 평민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그건 수치상으로 그렇고, 탱커 중에는 힐러보다 더 귀족 대우를 받는 계층이 존재한다. 레이드 전투 센스에서 그게 갈리는데, 사실 힐러는 누구를 써도 고만고만하고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반면 탱커는 풋내기와 노련한 탱커 간의 차이가 엄청나게 두드러진다.

레이드는 탱커에서 시작하고 탱커로 끝난다. 그만큼 탱커의 역할이 중요하다. 심지어 힐러들은 막공을 갈 때 메인 탱커가 누구인지를 제일 중요하게 본다.

“그럼 너는 탱커는 실력만 있으면 남녀 가리지 말고 받아들이자는 거야? 남자한테 니 몸 보여줘도 상관없어?”

“그게 아니라 철희 정도 되는 애를 떨어뜨리기는 아깝다는 거지. 경력 같은 거 보니까 탱커장 입장에서 참 아깝던데. 어차피 레드 몹 레이드할 때는 맨살 보일 일 없고, 블랙 몹은 위험한 레이드니까 맨살 보일 걱정보다는 안전성을 더 따져야 하잖니?”

“……생각은 해볼게.”

안전성을 짚고 넘어가자 유지웅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근접 딜러는 인재풀이 워낙 커서 남자를 금지해도 유능한 대원을 선발하는데 크게 문제가 없다. 하지만 탱커진은 인재풀도 좁고, 또 잘하는 탱커는 더 적다는 문제가 있다.

정효주도 실력 좋은 탱커라면 남자든 가리지 말고 뽑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현실을 부각시키면서, 김철희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싫은데…….’

다른 남자가 와이프 알몸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원천봉쇄하고 싶은 게 남편의 마음 아닐까.

*  *  *

“누나!”

정효주를 보자마자 김철희는 애처럼 반가워하며 달려들었다. 와락 안기려는 것을 그녀가 얼른 손으로 제지했다.

“철희야. 누나 이제 유부녀야.”

“헉. 형이 질투가 심한가 봐?”

“장난 아니거든.”

“와, 그럼 그 소문 사실이었어?”

“소문? 무슨 소문?”

“제니스는 근접 딜러랑 탱커는 남자를 절대 안 뽑는다고 소문이 좀 있었어. 그래서 걱정했었거든.”

정효주와 유지웅은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니, 김철희가 알 정도로 그렇게 소문이 나돌고 있었단 말인가?

사실 레이드계에서 제니스는 화제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사소한 현상 하나하나가 전부 레이더 간에 이슈로 부각된다. 근접 딜러와 탱커가 전부 여자라는 것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자기들끼리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좋아. 너니까 사실대로 말할게.”

김철희는 바짝 긴장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효주 때문에 근접 딜러와 탱커, 남자 안 뽑는 거 맞아. 탱커하다 보면 옷 찢어지는 거 다반사인데 내 여자 몸 다른 남자가 보는 거 싫거든.”

“역시 형은 효주 누나 엄청 좋아한다니까.”

“그런 이유에서 네가 최종 면접에 왔을 때 디게 미안했어. 어차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 역시 안 되는구나.”

김철희는 좀 아쉬운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각오하고 있었는지 별로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효주랑 의논해서 생각을 바꿨어.”

“정말?”

김철희는 급반색을 했다.

“그래. 레드 몹 잡을 때는 어차피 이제 맨살 보일 일도 없고, 블랙 몹 잡을 때는 위험하니까 센스 있는 탱커풀을 충분히 갖추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렇다고 아무나 막 뽑을 건 아니야. 너 정도 되는 애를 떨어뜨리는 게 아까워서 그래.”

“고마워, 형. 나 진짜 열심히 할게. 누나, 고마워.”

대외적인 시선을 고려한 것도 있었다. 김철희를 뽑으면 남자는 안 뽑는다는 의혹의 눈초리를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향 동생이라는 유대관계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점도 있다. 아마 더 이상 남자 탱커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예비대 운영하는 거 알지?”

“응.”

“너 아마 제2차 예비대에 소속되게 될 거야. 레드 몹 레이드를 하는 데는 별 문제 없을 거야. 하지만 블랙 몹 레이드를 할 때 반드시 투입된다는 보장은 없어.”

김철희를 받아준 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보험이다. 즉 필요한 순간에 투입할 수 있는 탱커풀을 확보해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 탱커, 근접 딜러진이 블랙 몹 레이드에 참여하는 것은 가급적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위급한 순간이 되면 남자고 뭐고 그런 게 없다. 그런 순간에 투입할 수 있는 인력풀이 확보되어 있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안전하다. 보험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더 안심이 되지 않던가.

“괜찮아. 형이 시키는 대로 할게. 나 열심히 잘할 수 있어.”

“잘해 보자.”

“응. 근데 형 집 진짜 좋다. 나도 레이드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솔직히 불가능할 거 같은데. 이 집 짓는데 얼마 들었는지 알아?”

“얼마?”

“2조 좀 넘게 들었던가? 아무튼 그 정도.”

김철희는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워했다.

“진짜? 와, 나는 엄두도 못 내겠다. 그냥 가끔 형 집에 놀러오는 것으로나 만족해야 될 거 같아.”

“자주 놀러 와.”

오랜만에 만난 고향 동생이 반가워서 술상도 차려서 셋이 밤새도록 놀았다. 물론 임신 중인 정효주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김철희는 자기가 레이드를 하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담과 고충을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너도 고생 많이 했구나.”

이 녀석이 여자였으면 오히려 더 좋았을지도.

============================ 작품 후기 ============================

지연은 어디에나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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