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0 재주는 불곰이 넘고 =========================================================================
“대본 쓴 사람이 누구라고요?”
“김정진 비서입니다. 회장님의 대외 연설문 작성은 일차적으로 전부 그 친구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잘 써줬어요. 훌륭해요.”
“전해두겠습니다. 그 친구도 좋아할 겁니다.”
“보너스도 특별히 챙겨주세요.”
“예.”
메이를 설득하기 위해 유지웅은 많은 것을 준비했다. 그가 한 말도 그가 생각한 게 아니다. 비서진에서 준비한 원고대로 연습을 했을 뿐이다. 비서진은 단지 대본을 쓰는 걸 넘어서, 강조 포인트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까지 관여했다.
연설문을 쓸 때 비서진은 그의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같은 백지수표라 해도 어떤 말을, 어떻게 하며 제시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법이다.
유지웅은 원래 살던, 레이더 거주구역에 매물로 나온 고급 주택을 사서 메이에게 선물했다. 넓은 정원이 딸린, 건물 면적만 100평이 넘어가는 4층 주택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선물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쉔은 조금 부담스러워 했지만, 100억 달러를 받은 상황에서 이까짓 집을 가지고 그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메이는 새 집이 신기하고 좋은지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유지웅 앞에 와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집이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군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또 얼굴을 붉힌다. 쉔은 걱정스러웠다. 이 남자는 유부남인데 괜히 동생이 마음에 상처를 받진 않을지…….
동생 마음이 이해는 갔다. 그가 백지수표에 0을 두 개 더 추가해서 돌려주었을 때 그는 감동했으니까. 돈이라는 게 요물인 줄만 알았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감동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남자인 자신도 이럴진데 여자인 동생은 어떻겠는가. 재력은 속물적인 게 아니라 사람의 매력 중 하나이다. 동물도 암컷을 유혹할 때 먹이를 내세우는 게 자연의 법칙 아닌가.
저녁이 되자 유지웅은 메이 남매를 자택으로 초대했다. 흑석동 저택의 규모에 메이의 눈이 또 한 번 휘둥그레졌다. 가정부장이 신경 써서 준비한 만찬을 앞두고 주눅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지웅이 계속해서 신경을 써주자 밝아졌다.
식사를 마치고 유지웅은 쉔과 단독 면담을 가졌다. 고급 양주를 기울이며 둘은 이야기를 나눴다.
“메이는 제니스 종신 대원입니다. 레이더로서의 평생은 내가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쉔, 당신은 아니죠.”
“……예.”
유지웅이 계약을 한 당사자는 메이이지 쉔이 아니다. 유지웅이 그들 남매에게 베푼 모든 것은 메이에게 귀속된다. 쉔은 메이의 오빠이자 법정대리인일 뿐이다.
“하지만 희소 능력자가 아니라 해서 쉔, 당신을 내칠 마음은 없어요. 당신에 대해서도 알아봤는데, 상당히 훌륭한 탱커더군요. 그래서 당신을 제니스 대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받아주신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쉔은 기쁘면서도 덤덤하게 수락했다. 세계 최강 공격대라는 제니스에 영입된 것도 메이 덕분이지만, 동생에게 미안하기보다는 고마웠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제니스는 규모 증대에 한창입니다. 40명씩 6개의 예비대를 두어 총 240명의 대규모로 꾸릴 계획이죠. 아직까지는 완편 예비대가 2개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제3예비대 소속 탱커가 될 겁니다.”
“메이의 지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원래는 제1예비대에 넣으려고 했습니다만, 남매는 아무래도 같이 있는 게 좋겠죠? 메이도 제3예비대에 넣죠. 뭐, 메이한테는 어느 예비대 소속이냐는 의미가 없긴 합니다만. 그녀는 제니스 대원 중에서 가장 특별하죠.”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두 분을 위한 장비도 최고로 맞춰주겠습니다. 아, 물론 선물이니 금전 염려는 하지 말아요. 미국이 아니라 제니스를 택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습니다.”
메이 남매의 처우에 관한 것도 대충 정리가 되었다.
쉔은 정말 제니스를 선택한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미국이 이만큼이나 대접해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이 전부는 제니스이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하나를 해결하고 나니 다른 하나가 신경이 쓰인다. 쉔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국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걱정이 되나요? 그래도 조국이라서?”
“솔직히 말해서 동료들이 걱정이 됩니다. 나라 일은 제 알 바 아닙니다.”
중앙 정부에 착취당한 것 때문인지 쉔은 적개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동료들에 대한 걱정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유지웅은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러시아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있죠.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들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마 상당수 레이더들이 외국으로 대거 흘러나가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다행이군요.”
쉔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중국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그가 들고 일어난 것은 부당한 레이더 대우 정책에 오랫동안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 또한 나라를 버리고 자기를 대접해줄 수 있는 다른 국가를 찾아 떠나려고 하지 않았던가.
“한국 국적을 원한다면 그 문제도 내가 처리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제니스에 뼈를 묻기로 결심한 이상 당연히 국적도 바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게 얼만데 그 정도 충성은 보여야 하지 않을까.
“제가 정부에 인맥이 좀 있으니 여러 가지 법적 문제를 처리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오늘은 편히 쉬시고, 내일은 제니스 사옥을 방문하는 게 어떨까요? 지원팀과 레이드 지원장비 시스템도 구경시켜 드리죠.”
“아, 감사합니다.”
* * *
「제니스 행동 예측 보고서」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남기철은 눈 밑에 검은 기미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컴퓨터 옆에는 빈 커피잔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얼마나 카페인을 들이부었는지 위장이 비명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며칠 꼬박 야근을 한 덕에 겨우 보고서를 완성했다. 사실 그는 왜 자신이 이 보고서를 작성해야하는지 억울했다. 그저 관료 중에서 유지웅과 가장 많이 부딪쳤다는 이유만으로 보고서 작성 임무에 치이다니.
상부에서는 남기철이 유지웅의 인물됨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에게 행동 예측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시킨 것이다. 탁상행정의 병폐라며 남기철은 거품을 물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유지웅이 어떻게 나올지, 어떻게 움직일지 가장 잘 아는 것은 남기철이다. 그러니까 정부 관료 중에서는 말이다.
어쩌다 보니 그는 국가 특급 기밀에도 접하게 되었다. 지금 책상에 휴지처럼 쌓여 있는 서류 중에는 특급기밀이란 붉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게 없었다. 유지웅이 걸어 다니는 국가기밀이다 보니 보고서를 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원님, 여기 보고서입니다.”
초췌한 몰골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그는 강우석 의원을 찾았다. 조만간 레이드 관리본부, 즉 ‘국가결정체산업자원 중앙관리통제본부’는 행정안전부에서 분리되어 장관급 부서로 개편된다. 강우석은 신임 장관에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수고했네. 살펴보기 전에 간단하게 요약해줄 수 있겠나?”
“예. 아마 처음부터 유지웅 회장의 목표는 메이라는 희소 능력자를 영입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부러 민간 항공기를 타고 중국 영공을 지나간 것도 중국의 납치를 유도해서 명분을 쌓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추측됩니다.”
“설마, 음모론 말대로 자작극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신짜우 부주석의 납치 기도를 알면서도 묵인했을 겁니다. 그래야 중국을 공격할 명분이 생기니까요.”
오해는 오해를 낳고, 또 오해를 부른다. 한국 정부는 메이 하나를 영입하려고 유지웅이 그 많은 일을 벌이고, 또 음모를 꾸몄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슬픈 것은 미국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점이다.
“목적한 바를 손에 넣은 이상 유지웅 회장은 더 이상 중국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중국이 흔들리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 아닌가?”
그린 결정체 공장이라 불리던 중국이 흔들리고 있다. 경제 봉쇄를 당하고, 각 거대 자치구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며 일어서고 난리도 아니다. 독립을 진압하려 해도 러시아가 북경을 점령한 채 칼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이니, 다른 데 눈을 돌릴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손을 대면 중국은 사분오열돼서 여러 개의 중형 국가로 쪼개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변 국가는 어마어마한 이권을 챙길 수 있다. 대표적인 게 힐러다. 140만 명이 넘는 엄청난 힐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야말로 줍는 게 임자다. 한국도 숟가락을 얹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게 바로 유지웅이다. 중국이 뒤집어지고 파헤쳐진 것은 전부 그의 뜻 때문이다. 헌데 그는 가장 큰 과실을 취할 수 있는 시점에서 쏙 빠져 버렸다.
메이를 얻었으니 다른 것은 일절 관심이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메이가 다른 어떤 것보다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아무튼 범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 포부가 크다.
“쓸데없는 물질적인 이익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취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그 외의 것은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중국이 분열되면서 흘러나올 이권이 엄청나긴 하지만, 그 사람 눈에는 거추장스러운 짐덩이일 뿐입니다. 중국을 뜯어먹으려고 달려드는 나라들을 하이에나라고 비웃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자가 뜯어먹고 남긴 먹이에 달려드는 하이에나. 미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하이에나로 비유될 수 있다니. 강우석은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럼 우리 정부가 협조 요청을 해도 소용없겠군.”
“예. 더 이상 귀찮은 일은 하지 않으려 들 겁니다.”
“괴수 섬멸 협조 요청에는 꼬박꼬박 참가해주는 게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군.”
“괴수는 돈이 되니까요.”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나?”
“애국심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감당할 수 없는 괴수가 나온다면, 그래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면 아마 레이드를 피할지도 모른다. 남기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은빛 광택이 번쩍거린다. 손목에 착 감기는 금속의 감촉이 차가우면서도 흐뭇했다. 시계를 볼 때마다 칠드그린은 미소가 나오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부하 요원의 등을 자연스럽게 두드리며 물었다.
“보고서는 아직 멀었나?”
“아닙니다, 부국장님. 거의 다 되어 갑니다.”
“수고해주게.”
가볍게 격려하고 돌아서려던 순간 칠드그린은 요원의 넥타이를 보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안색이 굳은 그는 얼른 주변을 살피고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자네, 이게 뭔가?”
“예?”
“이 넥타이 말일세. 이거 5천 달러가 넘는 명품 아닌가? 이런 걸 매고 출근하면 어쩌자는 건가?”
“네, 넥타이 하나 가지고 문제가 됩니까?”
칠드그린은 불같이 화를 냈다.
“당연히 문제가 되지! 일개 정보 요원이 수천 달러짜리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데, 그 예리한 국장이 그냥 넘어갈 것 같나? 당연히 의심을 품고 감사를 지시할 걸세!”
“죄, 죄송합니다.”
요원은 얼른 넥타이를 풀어서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칠드그린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명심하게. 아직 때가 아니야. 큰돈이 생겼으니 쓰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절대 티를 내지 말게. 국장이 그런 냄새는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잘 맡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내가 오랫동안 섬긴 사람이라서 누구보다 잘 아네.”
“알겠습니다……. 저, 근데 부국장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얼마 전에 시계를 바꾸셨던데…….”
시계 매니아인 부국장이 새로 산 시계는 파텍필립 제품으로 경매에서 200만 달러에 낙찰된 물건이었다. 부국장이 그런 시계를 떡하니 차고 다니니까, 5천 달러짜리 넥타이쯤은 괜찮지 않을까 해서 시도를 해본 것이다.
“시계는 괜찮네.”
“예?”
“국장은 시계를 전혀 모르니까. 참 재미없는 남자지.”
설령 알려진다 해도 상관없다. 매수된 스파이가 200만 달러짜리 시계를 대놓고 감고 다닐 거라 누가 생각하겠는가? 아마도 모조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명심하게. 집, 차, 의류, 커피, 구두, 안경, 심지어 고가품 전자기기 같은 것도 일절 안 되네. 국장이 그런 쪽으로는 해박하니까. 딱 하나, 시계만 괜찮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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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도 멋을 낼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