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귀족이다-281화 (281/1,550)

00281  대항해 레이드  =========================================================================

레이드에서 최고 권위자라면 누구나 유지웅을 꼽을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인물을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가 퇴치 불가능하다고 단정한 괴수는 정말로 불가능하다.

해로 봉쇄 사태는 해양 괴수 때문에 빚어졌다. 당연히 정상들은 유지웅이 회담에 참가하기를 원했다. 참가 요구를 받고 고민하던 유지웅은 마음을 정하고 회담 자리에 나갔다.

이중에는 유지웅 실물을 보는 게 처음인 정상도 많았다. 그들은 체면을 사리는 와중에도 연신 눈을 흘끔거리며 조금이라도 더 그의 모습을 망막에 담아두려 애썼다.

“제니스 공격대장입니다. 여러 정상들과 이렇게 자리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각 정상들이 대동한 통역관은 유지웅이 한 말을 신중하게 통역해서 전달했다.

“뜻 깊은 자리에 참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일 뿐입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본론이 시작되었다. 영국 수상이 제일 먼저 물었다.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해양 레이드는 가능한 일입니까?”

공격대는 바다에서는 당연히 힘을 못 쓴다. 지금까지 잡은 해양 괴수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가뭄에 콩 나듯이 한두 마리씩 잡은 것은 어쩌다가 해변까지 밀려와서 해변 모래사장을 ‘밟고’ 잡은 것이다.

영국 수상이 그럴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혹시나 제니스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것이다.

“수중 레이드는 불가능합니다.”

“저런, 그렇군요.”

영국 수상이 뼈아픈 표정을 짓고 물러나자 이번에는 일본 총리가 다급히 물었다.

“제니스는 브라우니를 이용해 레드 몹 이하의 괴수들을 억제할 수 있음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도 그렇게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브라우니가 다른 괴수를 위협할 수 있는 범위는 겨우 반경 5km 이내입니다. 그에 비해 바다는 끝없이 넓습니다.”

“하지만 대규모 선단과 함께 움직인다면, 항로 전체를 커버하지는 못해도 선단을 커버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브라우니는 세상에서 단 두 사람 말만 듣습니다. 총리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려면 제가 모든 일을 손에서 놓고 매번 선단과 함께 이동해야 한다는 건데,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소 차가우리만치 무뚝뚝했다. 총리는 어렴풋이 그가 적개심을 보이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자리에서 날 선 반응을 보일 수 없으니 사무적이고 무뚝뚝하게 대하는 것이다.

새삼 극우 세력이 원망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극우 세력이 눈앞의 청년을 건드려서가 원인이 되지 않았던가. 마음 같아서는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져서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과연 쳐다봐주기나 할까?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북태평양 항로가 막힌 지금 일본은 아사 직전이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굶는 사람이 없지만 비축식량이 얼마 되지 않아 정부가 물량 통제에 나섰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퍼지고 있었고, 일본을 탈출해 내륙 지방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 뒤로도 여러 나라에서 몇 가지를 질문했고, 유지웅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부분 해양 괴수의 퇴치나 억제 수단 등에 관한 전술 및 전략적인 기획을 묻는 것이었다.

“미스터 제니스.”

마지막으로 미합중국 대통령, 빌클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과연 세계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국가 위상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가 입을 열자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묵직하게 흐르는 짧은 침묵 속에서 유지웅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선박에 안전지대를 설치하는 것은 가능합니까?”

각 정상들의 표정이 대변했다. 어떤 이는 마침내 고대하던 질문이 나왔다는 반응이었고, 어떤 이는 그런 발상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놀라워하는 모습이었다.

유지웅은 한동안 뜸을 들였다. 빌클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중압감을 담은 시선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모릅니다.”

드디어 그의 대답이 떨어지자 정상들은 한꺼번에 긴장이 풀리며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실망한 표정, 안도한 표정, 의아한 표정 등 가지각색이었다.

빌클런은 침착하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실험을 해볼 수 있습니까?”

*  *  *

북태평양 항로 사용 불능은 한국에 바로 영향을 끼쳤다. 원자재 수입이 늦춰짐에 따라 기업들이 손해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항로 우회가 가능했기에 시일이 늦춰지는 선에서 그쳤지만, 사태가 장기화되거나 악화되면 경기에 심각한 타격이 올 거라는 예측은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 불안감은 바로 증시에 반영되었다. 너도 나도 돈을 빼서 현물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실상은 투자가 아니라 사재기였다. 시장에서 식량과 원자재 값이 폭등하며 물량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대로 간다면 최악의 경우 과거 1차 해금현상이 반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1차 해금현상은 단기간에 끝났지만 세계적으로 1억 명 이상이 아사한 비극을 낳았다.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은 게 아니라 식량이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굶어죽은 것이다. 당시에는 엄청난 희생을 감안하고 안전한 대항로를 빠르게 발견해서 사태가 진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해금현상도 그처럼 운 좋게 해결된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식량이다. 많은 국민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쌀 자급률은 100%에 가깝지만 그 외의 것은 바닥을 치는 수준이다.」

「가축 사료나 식료품 재료로 쓸 옥수수와 콩을 비행기로 실어 나를 것인가? 그 값이 얼마쯤 될지 상상해보면,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빵 한 줌 먹기도 끔찍할 것이다.」

국내 저널리스트들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지만, 정부라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서울에 모인 국제 정상들도 해결책을 내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말이다.

「안전지대 설치 : 선박에도 가능한가?」

그때 새로운 화제가 단숨에 국제 매스컴을 강타했다. 세계 시민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이미 안전지대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유일한 보호막 능력자인 유지웅만이 가능한 기적이다. 정화된 땅은 안전한 구역이 되어 레드 몹 이하의 괴수들이 접근을 하지 않는다.

만약 선박에도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해양 괴수 때문에 바다를 이용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은 사라진다. 국제 정상들도 거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실패했네요.”

국무총리가 직접 참관한 실험에서 선박에 안전지대를 설치하는 실험은 실패했다.

“30억짜리 열 개만 날렸네.”

유지웅은 아쉬워했다. 그러나 국무총리는 아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로또 당첨 용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 이럴 수가! 대체 왜 땅에는 되고 선박에는 안 되는 걸까요?”

“저도 모르죠.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능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 메커니즘을 밝히려고 결정체 연구단지를 설립한 것이기도 하고요.”

“아아!”

하늘이 무너진 듯이 안타까워하는 국무총리와 이하 수행진을 보니 자기 탓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근데 더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다. 만약 선박에도 안전지대 설치가 가능하면 더욱 더 영향력을 키울 수 있을 텐데.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가설을 내놓았다.

“재질이 문제가 아닐까요? 정화 능력은 금속이 아니라 특정한 토양 종류에만 융합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게 토양 같은 물질에 간섭하는 능력인지, 아니면 공간 그 자체에 간섭하는 능력인지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라면 좀 많이 무섭군요. 현대 물리학을 완전히 뒤흔드는 신개념 이론이 나올 수도 있어요.”

“어차피 괴수와 레이드 능력 자체가 현대 과학과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들 아닙니까.”

여러 차례 실험을 해봤지만 선박에 안전지대를 설치하는 것은 실패했다. 그 소식을 접한 국제 정상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하루빨리 다른 해결책을 위해 다시금 머리를 싸맸다.

주요 항로가 봉쇄되긴 했지만 순환 규모 자체가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우회 항로를 이용하면 물자 수송이 가능했다. 사태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일정에 차질이 빚었을 뿐이다.

하지만 각 국가들은 해상이 완전히 봉쇄될 경우를 대비해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너도 나도 수송기를 선점하느라 경쟁이 붙었다. 항공기 생산 업체는 대형 수송기 건조를 서둘렀다. 운송비용이 엄청나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그걸 감수하고 물자나 식량을 날라야 한다.

사태가 흘러가는 걸 유지웅은 반쯤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자신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바다에서 날뛰는 괴수를 무슨 수로? 브라우니를 동원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다소 막연하게 여겼던 그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뭐라고요? 완공 예정일이 연기돼요?”

“건설 물자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주요 항로가 막혔다 보니 시중에 건설 물자가 바닥이 났다고 합니다. 그나마도 사재기가 시작돼서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연구단지 건설에 차질이 생겼다. 항로가 막힌 타격이 드디어 그에게까지 온 것이다.

사회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침울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연구단지 건설 지연은 그에게 꽤 아픈 문제였다. 이건 심각한 일이다. 그 같은 부자가 ‘꽤 아프다’고 할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국제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대서양 항로 중 5번부터 18번에 걸쳐 괴수 출몰.」

「아라비아 해역, 운항 금지 판정. 수에즈 운하 사실상 무력화.」

「대서양과 인도양, 사실상 격리 상태 돌입.」

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항로가 전부 막혔다. 안전항로를 지나는 선박들이 잇따라 침몰됨에 따라 운항 금지가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아라비아 해역에서 괴수가 출몰하며 여객선 한 척이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지자, 수에즈 운하도 사실상 사용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즉 물리적으로 인도양과 대서양을 직접 연결하는 뱃길이 모두 끊어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 대통령은 급히 안보 회의를 열었다. 유지웅도 아침부터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집을 나서야 했다.

회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모두의 표정이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 있었다.

“여러분은 이 사태의 심각함을 먼저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 설명해 주세요.”

“네, 대통령님. 북태평양 항로가 막힘에 따라 그간 아메리카 대륙 쪽에서 들여오거나 그쪽으로 나가는 물자는 대서양 및 인도양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북극해를 통하면 되지 않습니까?”

“북극해를 통해서 해로를 설정하려면 결국 베링해를 거쳐 와야 하는데, 그쪽 항로는 이미 봉쇄된 북태평양 2번 항로에 포함된 항로입니다.”

“…….”

국무위원들은 일제히 흙빛이 되었다.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드디어 이해한 것이다.

비서실장이 핏기가 가신 채 철퇴를 가했다.

“인도양권, 그리고 서태평양권 국가는 아메리카 대륙과 연결된 해로가 완전히 끊어진 겁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단지 완공은 물 건너갔다.

============================ 작품 후기 ============================

호남 : 제가 한 번 아시아의 식량을 책임져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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