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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343화 (343/1,550)

00343  우정의 이름으로  =========================================================================

나미가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훈련은 급물살을 탔다. 괴수 링컨은 그녀의 뜻에 따라 새로 피즈라는 이름을 얻었다.

“허참, 신기하단 말이야.”

“그러게. 왜 나미 통제관만 저렇게 잘 따르는 거지?”

통제관들은 스스럼없이 따르는 피즈의 태도를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어쨌든 훈련이 잘 되어간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유지웅과 정효주는 정기적으로 세종시 연구단지에 들러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원래 연구단지를 세운 목적이 자신들의 몸속에 흡수된 퍼플 결정체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으니.

아직까지는 연구 초기 단계라 별로 진전은 없었다. 과학자들은 결정체 흡수 과정 원리를 밝혀낼 수만 있다면, 결정체학이 한 단계 더 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 보고 있었다.

유지웅은 가끔 ‘피즈의 집’도 방문해서 사육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참고로 피즈의 집은 나미가 붙인 이름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훈련 총책임자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그녀의 지위는 통제관 보조자에 지나지 않으나, 피즈에 끼치는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훈련소 간판 이름을 바꾸는 것쯤이야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참에 나미 씨를 괴수 전문 조련사로 양성해보는 건 어떨까?”

“나쁘진 않은 거 같애.”

“한 번 물어볼까?”

그러나 나미는 유지웅의 제안을 거절했다.

“저는 이 아이 외의 다른 괴수한테는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재능이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몇 번 더 설득을 해보았으나 나미는 분명하게 거절했다.

“나미 씨는 링컨…… 아니 피즈가 좋은 거 같아. 같이 있을 때 너무 행복해 보여.”

“그래? 뱀이나 악어를 키우는 사람은 그나마 이해가 가는데…….”

취향은 존중하라 했다. 무슨 동물을 좋아하는지는 개인의 개성이지만, 이거는 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대체 저 크고 흉측한 상어 레드 몹 어디가 좋은 걸까?

촤아악!

피즈도 신이 났는지 나미를 태운 채로 높이 점프를 했다. 푸른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무섭지도 않은지 나미는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항상 딱딱한 표정만 짓고 있던 그녀가 저렇게 행복해 하는 것은 처음 본다.

*  *  *

“설치해달라는 곳은 많은데, 몸은 둘 뿐이니. 그것이 문제로다, 문제야.”

세계 지도를 보면서 유지웅은 턱을 쓰다듬었다. 정효주도 옆에서 연신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여기 어때? 저번에 이만큼 설치했으니까 여기에 추가로 설치하면 밀집 진형이 완성되는데.”

“근데 여기 또 설치하면 영국만 8개야. 다른 나라들이 형평성 때문에 들고 일어날 거라고. 러시아 키틴 대통령이 엄청 서운해 하던데.”

“좋아, 그럼 이번엔 러시아에 가자.”

유지웅은 평균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안전지대를 설치해 주고 있었다. 지구상에 나라는 수백 개요, 그 중 중요한 대도시만 꼽아도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근데 한 달에 한 번씩만 설치하고 있으니, 안전지대를 원하는 나라들 입장에서는 복장이 미어터지는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카운터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줄이 점점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아니, 줄어들지 않는 정도면 양호하다. 주인 마음대로 강제로 뒤로 밀려나기도 하고 앞으로 당겨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속이 탈 수밖에 없다.

한때 1순위 설치대상국이었던 미국은 지금 한참이나 그 순위가 밀려났다. 미국은 여러 가지 파격적인 양보를 통해 그나마 관계를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지웅은 좀처럼 등급을 올려주지 않았다.

ISIR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International Safe Zone Installation Rating의 말인데, 국제안전지대설치등급을 나타내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안전지대 설치 순위를 수치화한 것을 말하는데, 현재는 영국이 1위, 러시아가 2위를 달리고 있었다.(한국과 UAE는 순위에 포함되지 않음)

특별한 공신력이 있거나 어떤 강제력,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급은 아니다. 잘 모르는 대중은 대단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진 등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냥 나랑 친한 데부터 설치해주자.”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유지웅은 순위를 매겼다. 일단 미국이 밀려난 까닭에, 그의 구단인 에버튼이 있는 영국이 자동적으로 1순위가 되었다. 러시아는 2순위가 되었다. 두 나라를 놓고 처음에는 고민을 했는데, 주사위를 던져서 그냥 영국을 1순위로 정했다.

그 뒤에 문제가 생겼다. 3순위부터는 순위를 매기는 게 애매해진 것이다. 애초에 안전지대 설치 순위 대상으로 고려해줄 만큼 인연을 맺은 나라가 몇 개 안 되었다.

그래서 유지웅은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아랫사람들에게 나머지 순위를 매겨보라고 지시했다. 상전이 시킨 일이다. 비서진은 난리가 났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순위 책정을 위해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갔다.

나라의 순위를 매기는 것. 보통 작은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방대한 자료가 필요했다. 해당국과 한국 간의 국제 관계, 제니스에 줄 수 있는 유무형적 이익의 크기 비교, 지리 및 역사적인 관계, 보이지 않게 얽혀 있는 이권, 장기적으로 설치료의 지불능력의 입증 등 고려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당연히 5명 남짓한 비서진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비서실장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국내 민간연구기관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덕분에 매스컴은 한때 난리가 났다. 쏟아지는 특종에 연일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앞 다투어 보도했다.

「제니스 회장, 안전지대 설치 등급 편성!」

「ISIR, 국제신용평가등급을 넘어서는 기준이 되나?」

「무디스, S&P 등 신용평가기관 비상 걸려.」

유지웅은 그냥 어느 나라부터 안전지대를 설치할지 정하기 어려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지시를 했다. 그런데 이게 전 세계적으로 파장을 불러온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ISIR이 국제사회에 끼칠 영향력에 대한 기고를 쏟아내었다.

「신용이란 채무를 제때 갚을 의사와 능력을 뜻한다. 복잡한 채권과 채무관계가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신용등급이란 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하다. 당장 무디스 등 3대 신용평가기관이 국가 등급을 낮추기만 해도 해당국의 경제가 휘청거린다. 그러나 제니스는 그들 3대 신용평가기관을 야심차게 밀어내고자 새로운 국가등급을 만들려고 한다…….」

「지금 세계적으로 괴수의 습격이 늘어나고 있다. 주요 해상로가 봉쇄되었고, 베링 해협만이 전 세계 바다를 잇는 중심지로 통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안전지대의 가치는 인명과 재산 보호를 넘어서, 장기적으로는 인류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 방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전지대의 설치순위에서 상위 등급을 차지하지 못한 국가는 금융신용보다 더 중요한 생존신용에서 신용불량국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생존신용이라는 말이 급물살을 타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여러 매스컴은 안전지대가 없는 지역은 금방이라도 괴수가 쳐들어와서 초토화될 수도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 이건 좀 오버인데.”

오죽하면 유지웅도 그 기사를 보고 혀를 찼다.

“괴수 활동량이 는 건 맞지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닌데. 진짜 위험한 건 레드 몹부터지.”

현재 인류는 괴수로부터 자국 시민을 지키고 국가 체제를 유지할 자생력이 충분했다. 바다가 봉쇄되기는 했어도, 해양 괴수가 인간을 직접 습격하는 것은 아니다. 무역로를 차단함으로써 국가 기반 경제를 붕괴시키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너도 나도 간절하게 안전지대를 원했다. 좀 깨어 있는 사람들, 자국의 괴수 방위 능력이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에 충분하다는 걸 아는 이들도 안전지대의 가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초미의 관심 속에서 ISIR이 완성되었다. 등급 책정 과정에서 암중으로 실무자들에 대한 무수한 로비와 회유가 벌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ISIR의 책정에는 가장 중요한 것, ‘설치료의 지불능력’이 비중 있게 고려되었다. 당연히 ISIR 순위는 3대 신용평가기관이 책정한 신용등급 이상 가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  *  *

유지웅의 전용기 A3가 부드럽게 하강하며 활주로에 내려섰다. 브레이크가 걸리고, 기체는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도착했어. 내리자.”

“응? 벌써?”

전용기 침실에서 자고 있던 유지웅은 정효주가 몸을 흔들자 부스스 눈을 떴다.

“피곤하다. 이 짓도 못해먹겠네…….”

“그럼 못 써. 한 달에 한 번씩은 안전지대 설치하러 다니기로 했잖니.”

“너야 탱커라서 강철 체력이지만, 난 비행기 한 번 탈 때마다 체력이 축난다고.”

“비행기를 타서가 아니라 맨날 덤벼드니까 그런 거지.”

“내가 뭐 맨날 덤벼들어? 하루에 4번 밖에 안 하는데.”

정효주는 샐쭉이며 그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둘은 김포공항에서 대기 중인 V-23으로 옮겨 탔다.

집에 돌아오자 테레사가 V-23 이륙장으로 마중을 나왔다. 둘이 기체에서 내리자 테레사의 품에 안겨 있던 금동이가 까르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금동아, 아빠 일하고 왔다. 잘 놀았어?”

유지웅은 테레사한테 아이를 받아 안았다. 가볍게 다독인 뒤 정효주에게 넘겼다.

“별 일 없었나요? 금동이가 귀찮게 안 했어요?”

“무탈했습니다. 도련님께서도 얌전하시고요.”

안전지대 설치도 참 못할 짓 같았다. 한 달에 한 번씩 해외 출장을 다니니 영 못해먹을 짓이었다. 공항에서 집까지 V-23을 이용하고, 또 초음속 전용기로 이동한다고 하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것이다.

‘유씨 가문의 자자손손을 위해서는 할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귀찮지만 설치하러 다니는 중이다. 물론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사람은 현재 위치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동물이다. 기왕이면 자기 대에 록펠러나 안슐 가문을 뛰어넘는 부자 가문으로 만들고 싶었다.

제니스도 6개 예비대로 편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둘은 대원들과 함께 레이드를 가지 않는다. 레드 몹은 유지웅 커플 둘의 힘만으로도 단칼에 잡을 수 있으니. 그들이 대원들과 함께 레이드를 가는 것은 블랙 등급 이상의 괴수가 나타났을 때뿐이다.

“가끔은 옛날이 그립다. 너랑 둘이서 오순도순 손잡고 여기저기 막공 다니면서 잘난 체 하던 때 말이야.”

“마지막 말은 안 하는 게 더 좋을 뻔했는데.”

“잠깐이긴 했어도 그때가 제일 재밌었어. 대원들이 막 우리 떠받들고 그랬었잖아.”

“지금은 더하는데?”

그때와 달리 지금은 온 나라, 아니 온 세계가 떠받들어준다. 잘난 체 따위 안 해도 잘난 걸 다들 알아서 모신다.

유지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지금은 잘난 체 하면 욕먹잖아.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지. 그때는 은근슬쩍 조금씩 잘난 체 해도 오히려 다들 칭찬해줬다고.”

정효주는 그냥 웃고 말았다. 애도 낳고 이만큼이나 사회적 지위가 상승했는데도, 신랑은 여전히 애 같은 면이 많았다.

씻고 쉬고 있는데 안슐한테 연락이 왔다.

「러시아는 잘 다녀왔나?」

“네. 근데 솔직히 불안하긴 해요. 러시아가 장기적으로 설치료를 잘 줄 수 있을지…….”

「국제사회에서 매장당하고 싶지 않으면 설치료를 체납하지는 못할 걸세. 그건 그렇고, 언제 한 번 UAE에 오지 않겠나?」

“UAE요? 무슨 일인데요?”

「서바이벌 게임장을 만들었는데 자네와 한 번 즐겨보려고. 친구들을 데리고 와도 좋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서바이벌 게임장? 유지웅은 호기심이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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