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8 우정의 이름으로 =========================================================================
본래 행안부 산하기구였던 결정체 관리본부는 모든 절차를 마치고 장관급 부서로 개편했다. 이에 따라 남기철도 ‘결정체자원관리부’로 개명한 새 부서로 소속을 옮겼다.
그날도 출근을 마치고 일을 하려고 보니 사무실 밖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하고 다가가 보니 직원들이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남기철의 안색도 자연스럽게 창백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에요? 감사라도 나왔습니까?”
“감사보다 더 무서운 게 나왔어요.”
“더 무서운 거요?”
“유지웅 회장님께서 방문하셨어요.”
“그래요?”
남기철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한시름 놓았다. 여직원이 오히려 놀라워했다.
“안 놀라시네요? 유지웅 회장님께서 방문하셨는데도요?”
“뭐 일이 있어서 방문하셨겠죠. 그 분이 방문한다고 무조건 놀라고 벌벌 떨어야 한다는 법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사무실에 들어선 남기철은 곧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어, 이제 오셨어요? 남 국장님?”
유지웅이 반가워하며 회전의자를 빙글 돌렸다. 남기철은 순간 등을 돌리고 나갈 뻔했다.
“저 국장님 만나려고 왔는데. 시간 괜찮으시죠?”
“아, 물론입니다.”
웃는 낯으로 대답했지만 속은 썩어 들어간다. 이제 저 인간을 상대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대체 무슨 일로? 국가 정상들과 놀아도 수준이 겨우 맞을까 할 텐데, 겨우 일개 공무원인 자신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걸까?
흘끔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일하는 척 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특히 상사는 어떻게든 눈도장 한 번이라도 받아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옆에 앉아 있던 정효주가 인사했다. 남기철은 엉거주춤 목례로 맞인사를 했다.
“괜찮으시면 나가서 커피라도 하시죠.”
“예?”
상대야 시간이나 그런 거에 거리낄 것 없으니 그래도 되지만, 자신은 엄연한 공무원이다. 이제 막 출근했는데?
“누가 뭐라고 하면 공무라고 하면 되죠. 나가요.”
잠시 주춤하던 남기철은 결국 일어났다. 누구의 명인데 거절할까. 다른 이도 아니고 결정체자원 관리부쯤은 손가락 하나로 꺼뜨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의 호출에 자리를 비웠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미친 것이다.
셋은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직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조그만 정원이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죠?”
“아, 아닙니다.”
“사실 긴히 여쭐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제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남 국장님만큼 잘 대답해줄 수 있는 인물이 없더라고요.”
남기철은 호기심이 생겼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들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세계 제일의 부자가 ‘너만 한 이가 없더라.’라고 해주는 말이 듣기 싫을 리가 없다. 오히려 어떤 기대감을 가지게 되는 게 사람 심리이리라.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알고 싶어요. 남 국장님이라면 잘 대답해주실 것 같아서요.”
너무 추상적인 질문에 남기철은 순간 갸우뚱했다. 그는 확인을 위해서 물어보았다.
“회장님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평가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거죠.”
“하지만 사회적인 평판 정도야 회장님도 쉽게 아실 수 있을 텐데요.”
“좀 더 구체적인 걸 원해요. 아, 칭찬이나 부러움 같은 걸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게 절대 아니에요. 그거 유념해주시구요.”
지난 몇 년 간 남기철은 본의 아니게 정부와 유지웅 사이에서 교섭 창구 역할을 했다. 원래 그러려던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유지웅은 정부에 무슨 할 말이 있을 때면 자신을 찾았고, 상부도 그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자신을 시켰다.
오래 그를 겪어보면서 느낀 게 있는데,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 속을 감추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그는 피곤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의 돌직구를 다른 이들이 괜히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곤 한다. 처음 남기철은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조언도 하곤 했지만, 이제는 지쳐서 관뒀다.
남기철은 가족이 아니면서도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말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숨은 의미가 있는지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면 엉뚱한 해석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남 국장님이 저를 가장 잘 알 것 같아서요. 아, 그러니까 우리 가족 말고요.”
남기철은 잠시 숨을 죽였다. 이것은 기회다. 그 동안 쌓인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다. 그와 정부 사이에 끼여서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제가 어떤 말을 해도 저에게 불이익이 오지는 않겠지요?”
다른 높으신 분들을 상대로는 절대로 이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바로 유지웅이기 때문에 남기철은 과감히 그런 말을 던져본 것이다. 사실 말을 해놓고도 그는 심장이 떨렸다. 평생 공무원 팔자에 이런 대담한 말을 입에 담을 날이 올 줄이야.
“아, 물론이에요. 아무 말씀이나 허심탄회하게 해주세요. 경청하겠습니다.”
불이익이 없다. 그가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다. 남기철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 * *
“……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겁니다.”
“네. 뭔가요?”
“솔직한 게 회장님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저도 정말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들 일정 이상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합니다. 가족이나 순수한 친분 관계가 아닌 이상 그게 관습입니다.”
유지웅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남기철은 살짝 흥분했는지 얼굴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조금만 이야기가 더 길어졌다가는 목에 핏줄이 설 것 같다.
“회장님은 본인이 편하신 대로 말씀하시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혼란에 빠집니다. 저도 초기에는 몇 번 그랬었고요.”
“혼란에 빠진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죠?”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미국과 불편하실 때 절대로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강조하셨죠. 그런데 그 강조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오히려 사람들은 그 이면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닌지 혼란을 겪었습니다. 미국에 안 가겠다는 것은 강경한 태도 유지를 위한 위장이고, 실제로 회장님이 원하시는 것은 미국의 강한 양보가 아닌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정말 갈 생각 없어서 안 갈 거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하실 때에는 ‘미국의 강한 양보가 없는 한 미국행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는 어렵다.’ 정도로만 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가지 않으면 그만이고요.”
“흠…….”
“겉과 속이 똑같이 행동한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겉과 속이 완전히 따로 노는 정치판 같은 곳에서는요.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가 외눈박이인 세상에서는 눈 두 개를 가진 사람이 겉돌기 마련입니다.”
유지웅은 잠시 생각하고 반문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게 잘못된 게 아닌가요?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회장님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물론 회장님은 이미 그런 사회적 관습이나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할 필요도 없는 위치에까지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회장님의 진솔한 면을 모르는 사람들은 회장님의 발언이나 행동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는 거지요.”
“남 국장님도 저 때문에 곤란을 많이 겪으셨나요?”
거기서 남기철은 순간 망설였다. 유지웅은 괜찮다는 듯이 웃으며 재촉했다.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절대로 불이익은 없을 거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저도 많이 힘들었죠. 특히 회장님의 의도를 상부가 이해할 수 있게 통역해서 전달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통역이라뇨?”
“가면이 익숙한 사람은 가면을 덮지 않은 순수한 발언을 오히려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 적당히 포장하고 가면도 씌우고 그래야 그 진의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위 공직자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와.”
유지웅은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안슐도 종종 비슷한 이야기를 해주긴 했지만, 남기철과 안슐은 사회적 위치가 다르다 보니 관점도 달랐다.
그 있지 않은가? 같은 병영생활의 문제점을 이야기해도, 사단장(안슐)이 이야기하는 것과 현역 병사(남기철)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생생함의 정도가 다르다. 특히 자신의 곁에서 직접 부딪치며 고초를 겪었던 인물이 해주는 이야기라서 더욱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재미있네요.”
유지웅이 내놓은 솔직한 소감에 남기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를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재미있다고 한 것은 정말 재미있어서 순수한 마음에 한 감탄이다.
“내친 김에 더 말씀드리자면, 만약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말씀에 바짝 쫄았을 겁니다.”
“네?”
“회장님은 정말 흥미 있으셔서 하신 말씀이겠지만, 용기를 내서 이런 민감한 보고를 한 사람 앞에서 밑도 끝도 없이 재밌다고 하면 놀라거나 긴장하게 되거든요. 자기가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아,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은 아랫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적당히 고려하셔서 놀라지 않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남기철은 숨을 골랐다. 정말 공무원 인생에 오늘만큼 솔직하게 털어놓은 날은 없던 것 같다.
원래 아무리 취중진담이라고 하지만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은 가려야 한다. 직장 상사가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하라고 해서 정말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일반적인 상사의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는 ‘하나도 안 괜찮으니까 듣기 좋은 말만 말해.’지만, 유지웅이 솔직하게 말하라는 것은 ‘솔직하게 말 안 하면 하나도 안 좋을 거예요.’이기 때문이다.
“…….”
유지웅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남기철은 자기 말이 단순한 메아리로 끝난 게 아닌 듯해 뿌듯함을 느꼈다. 용기를 내서 진지하게 말했는데 상대방이 무게감 있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말을 한 입장에서도 보람이 들기 마련이다.
“잘 들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혹시라도 노여우신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하네요.”
“아니요. 좋은 이야기를 들었는걸요. 그나저나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이만 일어날까요?”
셋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효주가 유지웅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속삭였다.
“먼저 가 있을래?”
“응? 왜?”
“몰라도 돼. 먼저 가 있어.”
“알았어.”
정효주가 유지웅을 먼저 보내자 남기철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너무 솔직하게 말했다고 사모님께서 화가 단단히 나신 것은 아닌가?
정효주는 핸드백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 받아주세요.”
“이게…… 뭡니까?”
“많지는 않아요. 1억이에요.”
남기철은 흠칫 놀랐다. 아니, 공무원한테 지금 이게 무슨?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공무원입니다. 이런 걸 받으면 문제가 됩니다.”
“뇌물로 드리는 거 아니에요. 청탁도 아니고요. 그이한테 좋은 말씀 해주셔서 사례로 드리는 거예요.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도 안 됩니다.”
“공무상 청탁을 받으신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개인적인 조언에 대해서 정당한 사례금을 지불하는 거니까 괜찮아요. 정 걸리시면 정당하게 소득 신고를 하고 세금도 내세요. 그러면 아무 문제없죠?”
“하, 하지만 겨우 몇 가지 말씀드렸다고 이런 큰돈을 받을 수는…….”
그도 사람이다. 1억이라는 돈을 눈앞에 두고 어찌 흔들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정효주 말대로 하면 별로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아니에요. 정말 좋은 말씀 해주셨어요. 우리 그이의 입장에서는 수십억이 아깝지 않은 조언이었어요. 남 국장님에게 탈이 될까 봐 더 드리지 못하는 게 죄송할 뿐이죠.”
1억의 사례. 변덕도 아니고, 사치나 유세를 떠는 것도 아니다. 정효주는 정말로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유지웅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런 말을 자신이나 안슐이 해주는 것과 남기철 같은 사람이 해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점을 생각하면 1억도 매우 작은 돈이다.
“그,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결국 남기철은 봉투를 받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건 뇌물도 아니고 청탁도 아니다. 지난 몇 년 간 중간에 끼어서 이리저리 고생한 대가라 생각하니 마음이 왠지 편해졌다.
============================ 작품 후기 ============================
간이 작으신 국장님은 정말로 세금 신고를 했다는 후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