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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350화 (350/1,550)

00350  알바 뛰는 회장님  =========================================================================

“무슨 일이 있으세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남기철은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는 곧 다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실은 제가 근래 회장님 저택을 드나들면서 이상한 소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상한 소문이요?”

유지웅은 잠시 갸웃거리더니 아 하고 손뼉을 짝 쳤다.

“다음 장관으로 내정되었다는 그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남기철은 가벼운 배신감을 느꼈다. 이 인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해맑을 수 있지?

“남 국장님이라면 충분히 잘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사실 남 국장님 능력에 장관 자리쯤은 우습죠. 게다가 청렴하기까지 하시잖아요.”

옆에서 정효주가 그렇게 거들고 나섰다. 남기철은 순간 그녀가 자신을 놀리나 싶었다. 아니, 소문의 주요 골자가 ‘유지웅 회장이 남기철 국장을 장관으로 만들려 한다.’인데 말이다.

“회장님께서 저를 결정체자원 관리부 다음 장관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오해해서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그거 때문에 제가 곤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뭐 어때요. 그럼 오해를 사실로 만들면 되죠.”

“……예?”

남기철은 순간 핼쑥해져서 반문했다. 이 인간,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장난치는 거 아니야?

“국장님 인품과 실력이라면 충분히 장관을 맡으셔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번 해보세요.”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유지웅의 말이 농담처럼 들렸다. 그럼에도 그가 긴장한 것은, 유지웅이 원한다면 자신이 장관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장관직을 맡기엔 너무 젊습니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유지웅은 태연히 응시하며 덧붙였다.

“한 번 해보세요. 잘 해내실 겁니다.”

남기철은 머리가 멍해졌다. 당신 때문에 헛소문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소연을 하려고 했는데, 이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예.’하기에는 꺼려졌다. 아무리 봐도 그의 태도가 장난스러웠다. 보아하니 즉흥적으로 한 말 같았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평소처럼 정효주가 저택 입구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다른 때와 달랐다. 긴히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이가 한 말 때문에 놀라셨죠?”

흠칫한 남기철은 조금 망설이다가 끄덕였다.

“네. 조금 당황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그이도 기왕이면 국장님이 결정체자원부 장관에 있는 게 편해서 그런 말을 했을 거예요.”

“즉흥적으로 생각하신 거 아닌가요?”

정효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끄덕였다.

“그이 성격 원래 그런 거 아시잖아요.”

임자가 있다고는 하나 어리고 예쁜 여자의 미소에는 긴장이 확 풀어진다. 남기철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회장님을 처음 뵐 때가 까마득한데, 어느새 그런 인물이 되셨다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저는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것도 없는데 말이지요.”

유지웅은 이제 겨우 스물넷이다. 하지만 막대한 이권이 얽혀 있는 부서의 장관 자리쯤은 즉흥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정치가도, 공직자도 아닌 일개 개인일 뿐인데도.

그는 어떠한 권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권력자로 여기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미는 사람이 다음 대권의 승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

게다가 아직 젊고, 앞으로 더 뛰어오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유씨 집안이 로스차일드나 록펠러를 뛰어넘는 세계 최고의 가문이 될 거라는 사람들의 중론이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닌 것이다.

“저도 국장님이 마음에 들어요.”

“네?”

“제가 드린 돈, 세금 신고 다 하셨잖아요. 비리에 얽힌 적도 한 번도 없으시구요.”

조곤조곤하지만 표정은 무척 진지하다. 남기철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유지웅은 장난스럽게 ‘기왕 그리 된 거 한 번 장관 해보시죠.’라고 말했지만, 정효주는 장난기는 없이 무게감 있게 대하고 있었다.

“제가 조만간 자리 한 번 만들죠.”

그녀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가벼운 몸짓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작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어떻게 흑석동 저택을 나오고, 또 집에 왔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아내가 그를 보고 놀라서 어디 아프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는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욕조에 받고 몸을 담갔다. 온몸 가득 나른한 기운이 올라왔지만 머릿속은 더 없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유지웅이 장난스럽게 장관 해보라고 했을 때, 놀라긴 했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조금은 미심쩍었다. 그러나 정효주는 그에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자리를 한 번 만들겠다는 말이 가슴에서 잊혀지지를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시 후 손을 뗐을 때 그의 눈동자는 전보다 한층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막공이나 가볼까?”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신랑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자 정효주는 당혹스러웠다.

“우리가 막공을? 왜?”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요즘은 레이드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조금 난처한 듯이 말을 얼버무린다. 정효주는 그게 전부가 아님을 대번에 눈치 챘다. 살을 맞대고 산 게 벌써 몇 년이요, 태어날 때부터 줄곧 함께 해왔다. 그의 생각쯤은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암행 나가고 싶은 거구나?”

“암행? 뭐, 그렇게 되나.”

유지웅은 쑥스러운지 슬쩍 눈을 돌리며 피식거렸다. 베고 있는 푹신하고 하얀 허벅지를 슬슬 어루만진다. 아내의 감촉은 언제나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그냥 뭐 안슐이 그랬잖아. 가장 밑바닥을 주시해야 한다고. 그래서 막공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보려고.”

그에게도 보잘것없던 시절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돼서 기억도 안 난다.

“막공이 레이드계에서는 가장 밑바닥이잖아.”

“하지만 안슐이 말한 밑바닥은 그게 아닌 걸. 레이드 세계 자체가 사회에서는 상위권이니까.”

막공은 분명 레이드계에서는 최하위권이다. 딜러는 레이더 중에서 가장 천민이다.

하지만 레이더는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상위층에 속하는 고소득자다. 딜러가 천민이라 하나 한 번 레이드로 1억 가까이를 벌어들인다. 정말 힘없는 약자 입장에서는 감히 비교도 안 되는 지위인 것이다.

“그건 아는데, 일단은 내가 가장 잘 아는 분야부터 차근차근 보려고.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잖아?”

“그러네.”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자기의 전문 분야부터 차근차근 파악한 다음에 조금씩 영역을 넓히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근데 우리가 몰래 참가해봤자 소용없을 텐데. 넌 보호막 쓰면 들통 날 테고, 나는 옐로 몹이 쫄아서 움직이지도 않을 텐데.”

“꼭 레이더로 참가하란 법 있어? 감정 직원 같은 걸로 참가하면 되잖아.”

정효주도 찬성을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둘은 곧장 막공에 갈 준비를 갖췄다.

“어때? 어울려?”

“완전히 딴 사람 같다.”

둘은 영화계에서 일하는 분장 전문가를 불러서 분장을 했다. 유지웅은 거울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서글서글하고, 어디에나 있을 듯한 평범한 느낌의 청년이 서 있었다. 반면 정효주는 다소 날카로운 이미지의 세련된 미인의 느낌으로 분장을 했다.

일반 직원으로 레이드에 참가하는 것은 쉬웠다. 별다른 자격증이 필요 없는 단기 알바 자리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다만 레이드계 일자리가 힐러 빼고는 전 보직이 다 경쟁이 치열한 게 약간 문제였는데, 그것은 남기철한테 부탁해서 해결을 봤다.

“아, 두근거려.”

“아직도 딜러들은 말 한 마디 못하고 찬밥 신세로 벌벌 기고 있을까?”

“나도 모르겠어. 부끄러워.”

천민 시절을 잊고 편안히 지낸 게 마음에 걸렸는지 정효주가 쑥스러워 했다.

알바는 단순 용역이었다. 감정 및 레이드 지원, 기록에는 여러 가지 기계장비가 필요하다. 그런 물품들을 차에 싣거나, 꺼내서 설치하는 일자리였다.

“빨리! 빨리!”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직원들을 재촉했다. 유지웅과 정효주도 그들 사이에 끼어서 부지런히 설비들을 날라다 차량에 적재했다. 오랜만에 몸으로 일을 하려니 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허리가 아파서 잠시 쉬며 정효주를 보는데 그녀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있었다. 하기야 힘 좋은 탱커가 몸 쓰는 일 좀 했다고 힘들어할 리가 없다. 게다가 여자다 보니 무거운 거는 손도 안 댔다.

“여자친구예요?”

설비 적재 중 잠시 쉬는 틈을 타서 같은 일을 하고 있던 남자가 슬쩍 물었다. 이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이였다.

“네. 돈이 좀 필요해서 같이 잠깐 일하고 있어요.”

“여자친구가 엄청 미인이네요. 좋겠어요.”

“하하, 우리 마누라가 예쁘긴 하죠.”

동료는 마누라란 호칭을 단순한 애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쪽 일이 페이가 세긴 하지만 여자가 하기에는 좀 힘들 텐데. 여자친구가 참 야무진 것 같네요.”

“힘들긴 하네요. 설비들이 왜 이렇게 무겁죠?”

“그나마 막공 지원팀은 나은 거예요. 정규 공격대 한 번 뜨면 난리 나죠. 이것보다 두 배는 많은 물건들 날라야 해요. 뭐 정공은 우리 같은 사설업체 쓰는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유지웅은 신기했다. 하나의 공격대가 레이드를 가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줄은 지금까지 전혀 몰랐다. 기껏해야 결정체를 감정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좀 나왔구나, 하고 생각한 게 다였다.

“그냥 일당이 세서 지원했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 대체 뭐예요? 저 물건들은 또 뭐고요?”

“우리가 하는 일이야 그냥 설비 나르는 거죠. 단순 용역이에요. 정규 공격대가 레이드 할 때 전속 전투지원팀 끌고 참가하는 건 알죠?”

“당연히 알죠.”

“원래 정공만 지원팀 있고 막공은 그런 거 없었는데, 몇 년 전에 법이 개정돼서 이제 막공도 의무적으로 전투지원팀 데리고 가야 돼요. 근데 한 번 모였다가 흩어지는 막공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래서 전투지원만 전문적으로 해주는 사설업체들이 생겨난 거죠.”

“아하.”

유지웅은 이제야 감이 잡혔다. 동료는 설명을 계속했다.

“막공은 업체 용역 데려다가 쓰고, 업체는 그 비용 받아서 먹고 살고 우리 일당도 주고 하는 거죠. 근데 이쪽 계열도 몇 몇 업체 빼고는 다 영세해서 설비들을 나라 거 임대해서 쓰는 거예요. 이 설비 다 국가 소유라서 흠집 나면 다 물어줘야 돼요.”

“아, 그래서 아까 팀장님이 깐깐하게 군 거군요.”

“저기 저 사람들 보이죠? 저 사람들이 전투지원만 뛰는 전문가들인데, 우리 같은 단순 용역이랑 달라서 페이도 엄청 세고 또 그 수가 많지 않아서 몸값도 높아요. 매번 위험한 일 하다 보니까 다들 성격도 깐깐해서 괜히 자극하지 않게 조심해요. 그런 일 빈번하니까.”

비유하자면 레이드계의 힐러 같은 이들이란 소리인가? 유지웅은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네.’

============================ 작품 후기 ============================

알바 뛰는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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