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7 내꺼하자 =========================================================================
“우리 계약하죠.”
복도 모퉁이를 도는데 갑자기 불쑥 나타난 유지웅이 대뜸 그렇게 말했다. 나미는 사전에 학습한 대로 난처한 웃음을 만들면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저는 생각이 없어요.”
“원하는 조건이라도 말해 봐요. 들어달라는 대로 다 들어줄 테니까.”
“저는 레이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유지웅의 끈질긴 구애가 이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귀자고 보채는 줄 알 정도로 집요했다. 그는 우연을 가장하고 나미가 지나가는 길목에 잠복한 채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합시다.”
“계약해요.”
“나와 계약해서 제니스 대원이 돼줘요.”
그때마다 나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기회를 봐서 피즈를 데리고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행세를 하는 것은 유지웅 이하 사람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적당한 기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제니스 대원이 되어봤자 이득 될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움직임만 더 불편해질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모습 때문에 걸리는 게 많은데.’
지금까지 나미는 몰랐는데, 자신의 모습이 남자 사람에게 굉장히 호감을 사는 타입이라고 한다. 어쩐지 남자 사람들이 자신을 혼자 놔두지 않아서 의심을 산 건 아닌가, 뭔가 행동거지가 이상해 보이나 걱정을 했는데, 이유를 알고 나니 허탈해졌다.
제니스 대원이 되면 피즈와 떨어지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럼 탈출 기회를 잡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미는 유지웅이 영입 제안을 할 때마다 족족 거절을 했다.
문제는 유지웅이 포기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인재 욕심이 장난이 아니었다. 지칠 줄을 모르고 끊임없이 구애를 해대는 통에, 피즈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틈도 내기 힘들었다.
결국 나미는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인간 동료인 레지나와 의논을 했다.
「대단한 인재 욕심이네. 그러니까 지금 그런 위치까지 빠르게 올라간 거겠지.」
“포기를 할 줄 몰라. 어떡하면 좋지?”
「아예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어때?」
나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내 행동이 더 제한 받게 될 텐데?”
「어차피 지금도 제한받는 건 마찬가지 아니야? 제니스 회장이 매일 찾아오고 있다면서?」
나미는 모니터에 비친 레지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니스 회장의 신뢰를 쌓아. 레이드뿐만 아니라 결정 에너지 응집 프로젝트에도 충실하게 참여해.」
“난 이제 피즈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 우리가 무사히 바다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돼.”
본래 나미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규명하기 위해 제니스에 잠입했다. 필요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는 제니스보다 좋은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새끼를 잃은 복수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의미를 잃었다. 새끼는 건강하게 살아있었고, 나미는 원한도 미움도 다 잊었다. 또다시 피를 흘려 새끼를 위험에 밀어 넣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피즈가 있는 곳은 내륙 호수야. 너는 땅에서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해. 그런데 기회가 왔다고 쉽게 탈출할 수 있겠어?」
“…….”
「급하게 가려고 하지 마. 초조하더라도 순서를 지켜. 네 몸에 일어난 변화를 규명하고, 땅에서도 온전히 힘을 쓸 수 있게 된다면 피즈를 데리고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야. 그러기 위해서는 제니스 회장의 신뢰를 얻어야 해.」
레지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묵직하게 이어갔다.
「그리고 토미 에슨이 갇혀 있는 교도소도 미국 내륙 한가운데에 있어. 네가 지금 그 상태여서는 내 복수를 도와줄 수 없어. 지금까지 내가 널 도와준 것을 모른 체 할 건 아니지?」
“약속은 지킬 거야.”
「그럼 제니스 회장의 제안을 수락해.」
나미는 눈을 감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레지나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땅에서는 힘을 거의 못 쓴다. 이래서는 기회가 온다 해도 피즈를 데리고 무사히 도망치는 게 쉽지 않다.
차라리 시간을 들여 원인을 규명해, 땅에서도 힘을 쓸 수 있게 된다면 확실하게 새끼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으리라.
원래는 일본으로 수송했을 때가 절호의 기회였다. 그것을 놓친 이상 신중하게 기회를 만들어가야 했다. 이제 피즈를 다시 수송할 일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터이니.
“알았어.”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내가 알려주지.」
“그냥 수락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래서는 안 돼. 너의 가치를 제니스 회장이 알고, 너한테 안달이 나게 만들어야 해. 너는 그런 점은 부실하니까,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 * *
“언니, 형부 진짜 괜찮은 거야?”
과일을 깎고 있던 정효주의 손이 뚝 멈췄다.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고 잡지를 읽고 있던 정혜주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뭐가?”
“있잖아. 형부 새로 들어온 연구원 한 명을 엄청 쫓아다닌다면서…….”
“아아, 그거? 별 거 아니야.”
“그래도 엄청 이쁘게 생겼다고 들었는데…….”
“넌 형부를 그렇게 못 믿니?”
“형부를 의심하는 게 아니지. 그냥 상황을 못 믿겠는 거지. 그 여자가 혹시 유혹하고 있는 거면 어떡해?”
사과가 반으로 싹둑 잘렸다. 껍질을 깎다 말고 그대로 칼을 밀어서 반으로 절단하는 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여자에게는. 이런 것을 보면 탱커는 탱커인 모양이다.
“언니 지금 힘 조절 못했지? 맞지?”
“너, 언니 약 올리려고 왔니?”
“난 걱정이 돼서 그렇지. 솔직히 형부가 오죽 잘났어? 유혹도 장난 아닐 텐데, 아직 형부 젊고 한창이라 눈 돌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해서.”
그러면서 정혜주는 흘끔 눈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유세현을 안고 달래는 테레사가 있었다. 테레사의 품에서 유세현은 까르르 웃으며 좋아라 재롱을 부렸다.
“솔직히 쿤겐도 처음에 약간 걱정하기도 했고. 근데 뭐 이제는 다른 쪽으로 걱정하고 있지만.”
“……다른 쪽?”
“한 십 오년쯤 후에 말해줄게. 아, 그때 되면 언니도 자연스레 알게 되려나?”
“……?”
정효주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키득 웃음을 지은 정혜주는 ‘요즘 애들은 워낙 조숙해서 더 빠를 수도…….’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튼 니 형부는 그럴 사람 아냐. 나미 연구원은 특별한 능력자라서 그렇게 공을 들이는 거구.”
“어, 레이더였대? 그 여자?”
“응. 이건 비밀이니까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당시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긴 했지만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전원에게 비밀 서약을 받았다. 레이더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나미를 위한 배려였다.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에서 사람은 더 큰 감동을 받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계약서에 찍는 도장으로 이어질 테니까.
“아, 그렇구나. 난 또 형부가 드디어 언니 말고 다른 여자한테 흥미가 생겼나 하고 혼자 두근거렸는데…….”
“두근거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남자가 너무 착하기만 해도 매력이 없잖아.”
“너,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나중에 니 신랑이 그래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내 신랑 아니니까 그렇다 뭐.”
언니가 때리려고 하자 정혜주는 깔깔 웃으며 얼른 일어나서 도망쳤다.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다. 언니 동생 사이에 흔하게 오가는 농담이자 장난이었다.
“엄마, 엄마.”
테레사의 품에서 재롱을 피우던 아이가 정효주를 보고는 짧은 팔을 뻗었다. 안아달라는 것이다. 아이를 건네받은 그녀는 조그만 등을 다독이며 뺨에 뽀뽀를 해줬다.
“우리 세현이, 테레사 누나가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엄마보다 더?”
“엄마가 더 좋아.”
“그럼 엄마랑 아빠,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잉…….”
아직 어린 아이한테는 대답하기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나 보다. 얼굴이 찡그러지며 머리에서 김이 피어오르려고 하자 그녀는 얼른 꼭 껴안고 다독였다.
어느새 아이가 쌔근쌔근 잠들자 정효주는 요람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쿤겐, 항상 고마워요. 쿤겐 덕분에 아이를 너무 쉽게 키우는 거 같아요.”
“고마우시면 도련님에게 형이라고 제대로 가르쳐 주십시오.”
“……아, 들었어요?”
“다 들립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세현이가 쿤겐을 누나로 알고 있는데, 형이라고 하면 아이가 혼란스러워 할 거예요. 그러니까 세현이가 좀 클 때까지만 봐줘요. 그런 거 구분할 때까지.”
테레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끄덕였다.
“그런데 공대장님은 오늘 늦으시는 겁니까?”
“일이 있잖아요.”
그러면서 정효주는 흘끔 시계를 봤다. 벌써 저녁 6시다.
‘올 때가 됐는데.’
몸에서 희미한 갈증이 났다. 마치 쪼개진 퍼플 결정체가 다른 반쪽을 원하듯, 신랑 생각이 자꾸만 난다. 그녀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신랑도 그런 증세를 느낀다. 해소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손잡고 침실로 가면 된다.
근데 신랑이 올 생각을 안 한다.
‘언제 오는 거야?’
* * *
나미가 영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유지웅은 얼른 달려갔다. 약속 장소는 고급 호텔로 유명한 프렐요드 호텔이었다. 타고 온 마이바흐의 주차를 호텔 직원에게 맡기고, 그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레스토랑 직원은 전망이 좋은 창가로 그를 안내했다. 이미 나미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흡 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
언제나 화장기 없이 청초하고 투명한 자태만 보이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랐다.
아찔하게 가슴이 파인 하얀 원피스를 입고, 가벼운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왼쪽 가슴으로 늘어뜨렸다. 분홍빛 윤기가 반짝이는 조그만 입술, 길고 얇은 속눈썹 아래로 도도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 실로 여신 그 자체였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니죠?”
“저도 방금 왔어요.”
이상해. 뭔가 분위기가 달라. 평소의 그 나미가 아닌 것 같아!
유지웅은 살짝 긴장해서 물컵을 쥐었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