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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417화 (417/1,550)

00417  보이지 않는 적  =========================================================================

밤이 깊은 저녁, 흑석동 저택을 급히 찾은 두 대의 차량이 있었다. 거의 동시에 도착한 두 차량은 개방된 정문을 통과해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 앞에 당도했다.

먼저 내린 손재진 교수는 다른 차량의 운전자를 확인하고는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남 국장님.”

“아, 교수님이셨습니까?”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회장님께서 급히 보자고 하셔서요. 가족들과 외식하다 말고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거의 밤 11시다. 보통 이런 시각에 사람을 불러내면 누구라도 짜증을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에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유지웅의 영향력이 대단해서만이 아니다. 이런 늦은 시간에 급히 불러낸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 갑작스럽게 터졌으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늦은 시간에 갑자기 오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손재진은 사석에서 교수와 제자 사이일 때만 유지웅에게 말을 편히 한다. 본인도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자리가 좀처럼 없다는 것. 그렇다 보니 손재진도 오히려 서로 존대를 하는 게 편했다. 선생과 제자라 해서 반드시 선생이 평대를 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니, 상관없지 않을까?

“이쪽으로 오시죠.”

유지웅은 회의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보안을 요하는 모임이 잦다 보니 필요를 느끼고 얼마 전에 만든 별실이었다. 완벽한 도청방지와 보안을 자랑하는 장소다. 인테리어를 할 때 보안업체로 위장한 국정원이 직접 와서 맡았다.

회의실로 들어선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세 여자가 먼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 중 두 소녀는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두 사람도 아는 얼굴이었다.

“나미 박사? 쿤겐 탱커?”

“두 분은 알겠는데, 저 분은 누굽니까?”

“나미 씨의 옛 동료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실 분이죠. 이름은…….”

소개하다 말고 유지웅은 멈칫 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녀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그냥 레지나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레지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남기철은 물론이고 손재진도 흥미롭게 그녀를 살폈다. 비록 테레사와 나미의 미모에 가려 있지만, 그녀 역시도 남자의 호감을 쉽게 살 만큼 빼어난 외모를 가졌다.

특히 단아하면서도 강렬한 눈매가 인상적이다. 겉보기에는 유약해 보이지만 눈빛은 강한 활력을 품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 넷쯤 되었을까?

레지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한때 CERC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 파장은 컸다. 남기철과 손재진은 그녀에게 품고 있던 의구심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그럼 설마……?”

“밤 바이러스에 관해서 유지웅 회장님께 제보할 게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남기철과 손재진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밤 바이러스는 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다. 목숨이 달린 문제다 보니 사람들은 둘만 모여도 밤 바이러스에 관해서 화제를 만들어냈고, 불안해했으며, 백신을 찾았다.

레지나는 본론을 꺼내기 전 유지웅에게 눈을 돌렸다.

“그런데 이 분들은…….”

“제가 믿는 분들입니다. 제가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실 분들이죠. 괜찮습니다.”

손재진은 물론이고 남기철은 속으로 크게 감격했다. 누가 그랬던가? 남자는 자신을 알아줄 때 가장 크게 감동한다고.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 믿는다며 인정해주고 있다.

레지나는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드리죠.”

*  *  *

「제3세계 국가 피해가 예상치보다 적은데. 일본이야 섬나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중국은 피해가 너무 적어. 적어도 지금까지 800만 명은 사망해야 할 텐데.」

「바이러스 감염 능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설마. 감염 능력만큼은 이미 확인하지 않았나? 안전지대 내부만 아니면, 감염자와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염 확률이 50% 이상이라고.」

「조사를 해봐야겠어. 표본이 필요한데.」

「그건 이미 지시해뒀네.」

「아무튼 안전지대가 공기 감염을 억제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큰 패착이야. 바이러스 유출은 불상사이긴 했지만, 좋은 교훈을 얻었어.」

「안전지대 내에서도 공기 감염이 가능하도록 개량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위에서는 어떻게든 개량하라고 압박하고 있지?」

「말도 말게. 볶아대는 게 견딜 수가 없네.」

「부자들은 다 그렇지. 그나저나 아시아 지역의 비안전지대권 피해가 예상보다 지나치게 적은 건 이상해.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어.」

「한국이야 그렇다 쳐도, 왜 그 가난한 나라들에서 제대로 감염이 이뤄지지 않은 거지? 황인과 흑인의 유전자에 선천적인 저항 요소가 있나?」

「그 부분을 집중 조사하라고 말해둬야겠군.」

「아무튼 백신 장사로 떼돈을 벌겠군. 우리 성과급도 두둑하게 떨어지려나?」

「못해도 개인 당 천만 불 이상은 나오겠지.」

*  *  *

“……이처럼 밤 바이러스는 다양한 경로를 통한 감염 경로를 갖고 있어요. 그 감염성은 다른 어떤 바이러스보다 더 지독하죠. 감염자와 타액 등 체액을 교환할 경우는 거의 100%,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할 경우는 50% 이상의 감염률을 보이죠.”

“하지만 안전지대에서는 공기 감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요. 숙주의 몸 밖으로 나온 바이러스는 안전지대의 공격으로 바로 사멸해 버리죠.”

밤 바이러스로 인한 희생자 수는 한국과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적었다. 두 나라가 각각 수백 명이 채 되지 않은 정도였으니. 반면 그 외 다른 나라는 못해도 수천 명 이상의 피해를 보였다.

그러나 더 큰 피해를 입은 나라가 있다. 바로 유럽, 러시아, 미국 등 ‘안전지대가 설치되지 않은 강대국’들이다. 그 나라들은 초기에는 바이러스 안전권인 것처럼 잠잠했으나, 일본과 중국에서 최초 피해가 발생하고 며칠이 지난 후부터 급격한 사망자가 발생했다.

현재까지 추산된 바에 따르면 미국은 약 5만 명, 러시아는 약 4만 명에 달한다. 유럽국도 그와 비슷한 수준.

안전지대가 가장 많이 설치된 나라인 한국과 영국, UAE는 피해가 적을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오히려 선진국보다 피해가 적었다는 것은, 전문가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바이러스 희생자, 즉 바이러스 때문에 신체가 폭발한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 그게 뭐죠?”

“호남산 곡물을 섭취하지 않았다는 거죠. 호남산 곡물에는 바이러스에 저항할 수 있는 억제력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남기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재진의 표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호남평야에서 난 곡물에 그런 성질이 있다니? 이게 사실인가? 믿어도 되는 것인가?

“중국과 일본은 호남산 곡물을 세상에서 제일 많이 소비하는 국가입니다. 바닥을 치는 국가 경제 때문에 제니스 그룹의 자비에 기대 살고 있지만, 이 경우는 그게 약이 된 거죠. 호남산 곡물을 꾸준히 섭취했기 때문에 바이러스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피해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거죠?”

“폭발에 휘말린 희생자가 아닌, 폭발을 일으킨 희생자의 신분을 조사해보세요. 호남산 곡물을 소비하지 않아도 되는 부유층일 겁니다.”

제아무리 빈곤 국가라 해도 남들보다 잘 사는 부유층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본, 중국에도 그런 부르주아 층은 있었다.

그들은 다른 강대국 국민들처럼 호남 곡물을 꺼렸다. 안전성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외국의 다른 곡물을 사먹었다.

“미국이나 러시아, 유럽 같은 나라는 중국과 일본, 아시아의 가난한 국가들보다 몇 배 이상 피해가 났습니다. 왜냐면 그 나라는 호남산 곡물을 소비하지 않는 데다가 안전지대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앞뒤가 맞아 떨어져요.”

한국인들은 호남 곡물을 섭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전지대가 촘촘히 설치되어 있다.

덕분에 공기 감염이 대부분 차단되어 바이러스 감염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피해가 적었다. 영국도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안전지대가 많이 설치되어 있어 비슷한 이유로 피해가 적었다.

미국 등 잘 사는 나라들은 호남 곡물을 섭취하지 않는데다가, 안전지대가 촘촘히 설치된 것도 아니라서 공기 감염이 쉽게 이뤄졌다. 그래서 많은 희생이 난 것이다.

반대로, 중국과 일본은 국가 부도 직전에서 굶어죽지 않기 위해 호남 곡물을 꾸준히 소비해왔다. 덕분에 안전지대가 설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적었던 것이다.

호남산 곡물을 지원받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밤 바이러스에 저항하는 힘을 길러 버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밤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안전지대와 호남 곡물, 두 가지 중 반드시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거군요.”

“두 가지 다 적용하는 게 가장 확실해요. 호남산 곡물은 바이러스에 저항할 힘을 비약적으로 키워주지만, 한 번 체내에 들어온 바이러스 전부를 박멸시키지는 못해요. 극소수의 바이러스가 세포핵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는 순간 다시 부활하게 돼요.”

말을 들어보니 무슨 에이즈 바이러스 같다. 손재진이 물었다.

“CERC가 갖고 있는 백신의 효능은 어떻죠?”

“바이러스를 직접 죽이는 힘을 갖고 있어요. 단…….”

“단?”

“바이러스도 백신에 저항을 해서 변이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죠.”

“호남산 곡물은 그런 위험이 없고요?”

“원리가 달라요. 백신은 바이러스 자체를 공격하지만, 곡물은 바이러스에 저항할 수 있게끔 면역력 자체를 키워주는 역할을 해요. 단기간에 완치하려면 백신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 저항하려면 곡물이 필요하죠.”

“……혹시, 출입국을 통제하고 국민들을 안전지대 안으로 이동시키라고 청와대에 전화를 한 게 귀하입니까?”

남기철이 그렇게 물었지만 레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그의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는지 남기철은 ‘실례했습니다.’하고 태도를 접었다.

손재진이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입니다. 세계를 상대로 목숨 장사를 하려는 CERC를 무너뜨릴 좋은 무기가 될 겁니다. 그러나 아무런 물증 없이, 귀하의 말만을 믿고 호남산 곡물을 먹으라고 권유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입니다.”

유지웅이 그 말이 맞다는 듯이 끄덕였다. 레지나는 그를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밤 바이러스, 아니 바이러스 괴수를 검출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어요. 그 표본과 곡물을 가지고 동물 실험을 하시면 간단히 입증될 거예요.”

“그렇게 해주실 거예요?”

“그러려고 회장님을 찾아온 거예요.”

유지웅은 손재진을 쳐다봤다. 그가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아마도 전부 사실일 것이다. 남은 것은 검출한 바이러스를 가지고 곡물을 이용한 동물 실험을 통해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 발표는 그 뒤에 하면 된다.

유지웅은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야. 우리 곡물 말인데, 재고 얼마나 있어? 뭐? 하나도 없다고? 엄마, 내일부터 직원이랑 장비 풀가동해서 생산되는 대로 전부 비축해 놔. 왜냐고? 내가 다 쓸 데가 있어서……. 아, 쓸 데가 있다니까? 그러게 왜 비축 안 해놨어? 진작 좀 해놓으면 좋았잖아? 아! 내가 다 팔아줄게! 다 팔아줄 테니까 생산되는 대로 다 쟁여 놔!”

한바탕 어머니와 다투다시피 통화를 하고 난 유지웅은 주먹을 탁탁 부딪치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것들, 어디 백신 장사 얼마나 잘하나 보자.”

남기철은 진심으로 CERC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사를 하려는 녀석들은 몽땅 다 죽어도 싸다.

============================ 작품 후기 ============================

카길 껒여. 우리 껀 안 먹으면 죽는다고.

곡물 메이저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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