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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족이다-429화 (429/1,550)

00429  진격의 불곰  =========================================================================

휴버튼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자 세상의 금융 흐름을 말 한 마디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지금은 시들었지만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은 아직도 유럽과 미국을 통해 전 세계에 막강한 입김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사방이 틀어 막힌 안가에 갇혀 처분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문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친척들은 죄다 잡혀와 있었다.

“아버지, 이거 괜찮은 겁니까?”

마침 프랑크푸르트 본가를 방문해 있던 둘째 아들도 같이 잡혀 들어왔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휴버튼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늙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분노가 활활 피어올랐다.

‘러시아 놈들!’

백여 명이 넘는 러시아 특수부대는 30분도 걸리지 않아 경호 병력을 간단히 진압하고, 휴버튼을 비롯한 가문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처음에는 독일이 러시아와 손을 잡은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러시아가 독일 땅에 있는 본가에 군을 투입할 수는 없을 테니.

하지만 러시아 놈들은 별로 숨길 마음이 없는 모양인지, 다른 곳에서 잡아들인 가문 남자들과 한꺼번에 구금했다. 독일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던 친족들이었다.

그제야 휴버튼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유럽국에 있던 친족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과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한다. 러시아 특수부대가 갑작스럽게 쳐들어와서 경호 병력을 진압하고, 다짜고짜로 잡아들였다는 것이다.

이건 해당국이 러시아에 가담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러시아가 해당국을 무시하고 다짜고짜로 병력을 투입한 것 같았다. 이미 전례도 있다. 러시아는 유럽 전체를 무시하고 CERC를 무단 점거하기까지 했으니.

“언행에 조심해라. 지금 이 녀석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 어찌 이런 야만스러운 놈들에게…….”

“조심하라고 하지 않느냐. 미국에 있는 라인이 힘을 써줄 거다. 여기서 풀려나가기만 하면 러시아 놈들 따위, 돈으로 얼마든지 무릎 꿇릴 수 있어.”

휴버튼은 자신만만했다.

러시아가 한국, 아니 유지웅을 믿고 그러는 모양인데 돈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 유지웅이 세계 제일의 부자인 것은 인정하지만, 국제 금융에 끼치는 영향력만 보면 로스차일드 가문이 몇 수는 앞서 있다.

‘그와 싸울 필요도 없지.’

유지웅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국제 금융을 쥐고 흔드는 것은 로스차일드라는 것을. 러시아 따위와 손을 잡는 것보다 로스차일드와 협력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카네기 가문과도 손을 잡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지금은 러시아의 탄압 앞에 잠시 숨을 죽일 때다. 이곳에서 풀려나가는 날, 거침없는 돈의 해일이 러시아를 집어삼키고 무너뜨릴 것이다. 국제신용평가 하향 조정, 간단한 투자금 회수만으로도 러시아 경제를 파탄에 빠뜨릴 수 있으리라. 그것이 로스차일드가 지닌 힘이었다.

그런데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러시아가 대형 수송기를 이용해 친족들을 한꺼번에 어딘가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다 죽일 생각인가?’

수송기 한 기에 다 몰아넣는 것 때문에 휴버튼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죽으면 다 소용 없다. 죽고 난 뒤에 친족들이 러시아에 복수를 해줘봤자, 그게 무슨 소용인가.

비행은 길었다. 자그마치 10시간이 넘는 항로였다.

수송기에서 내린 그들은 다시 어딘가에 구금되었다. 교외에 지어진 커다란 저택이었는데, 넓기만 할 뿐 화려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삭막했다. 아무래도 어디 정보기관에서 비밀 안가로 사용하는 저택 같았다.

감시자도 바뀌었다. 하나같이 황인이었으며, 백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휴버튼은 이곳이 유럽이 아닌, 아시아의 어느 지역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디인지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정황을 보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한국, 이 놈들까지!’

이가 갈렸다. 러시아 놈들에 이어 한국 놈들도 제니스 공격대를 믿고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꼴이라니.

블루 결정체와 안전지대의 독점, 그 파급력은 휴버튼도 인정한다. 하지만 제니스는 이제 생긴 지 겨우 4년 밖에 되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그늘에 숨어 세계를 호령해온 로스차일드 가문에 비하면, 힘만 셀 뿐 저력이 부족한 신흥 강자일 뿐이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감시만 하던 이들이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교섭을 위한 인물이 찾아온 것이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40대 남자.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하기야 휴버튼이 변방 소국의 일개 공무원까지 파악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대가 영어를 할 줄 알았기에 통역은 필요 없었다.

“크게 후회하게 될 거요.”

휴버튼은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러자 상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회할 거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러시아, 그리고 한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닌 힘이라면 러시아쯤은 쉽게 휘두를 수 있겠죠. 물론 우리의 협력이 없다는 전제에서요. 하지만 한국을 작업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수백 년 간 국제 금융망을 쥐고 흔들어온 저력을 무시하지 마시오. 당장 내 말 한 마디면 내일 국제 금 시세가 바뀔 수도 있소. 한국쯤이야 우습지.”

남자는 혀를 찼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역시 수백 년 간 세계 제일을 누렸던 가문의 수장다운 자신감이십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 한국은 유일하게 블루 결정체를 독점 공급하는 나라입니다. 금융 시장도 꽤나 안정되어 있고요.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현대 사회에서 블루 결정체를 독점 공급하는 국가의 국제 지위는 감히 상상이 어렵다. 결정체는 보편적인 에너지원으로, 그리고 산업자원으로 거의 대부분의 산업영역에 걸쳐 사용된다.

“로스차일드가 말 한 마디로 국제 금 시세를 바꾼다면, 우리는 말 한 마디로 국제 결정체 시세를 바꿀 수 있습니다.”

“겨우 제니스를 믿는 거요?”

휴버튼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귀국의 안정성은 인정하오. 블루 결정체 독점 공급, 그리고 이제는 식량 자급화도 이뤄냈지. 하지만 그 두 가지 장점이 오히려 귀국의 목을 조일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군.”

“무슨 말씀이신지?”

“귀하는 큰 착각을 하고 있소.”

“그게 뭡니까?”

“글쎄, 내가 왜 그걸 말해줘야 하지? 스스로 힘껏 생각해 보시오. 아마 상상조차 못할 테지.”

휴버튼은 느긋하게 여유를 부렸다.

한국의 자신감? 이해한다. 제니스의 존재로 일약 미국을 넘어서는 강국으로 뛰어올랐으니, 그 힘을 휘두르지 못해 지금 단단히 안달이 났을 것이다.

‘그 힘이 한 명의 개인에서부터 나왔다는 게 가장 큰 약점이다.’

러시아도, 한국도 따지고 보면 유지웅 한 명을 믿고 미쳐 날뛰고 있는 꼴이다. 유지웅이 carry, 아니 이끌어줄 것이라 믿고 설치고 있는 것이다.

두 나라의 근본적인 판단 착오가 뭔지 아는가? 로스차일드도 유지웅에게 결국은 안 될 것이라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돈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이나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이익 없는 싸움, 손해 보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로스차일드가 대체 왜 유지웅과 싸워야 하는가? 전혀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데.

고래가 서로 싸우면 새우 등이 터지는 게 아니라 새우가 어부지리를 취한다. 현명한 고래들은 자기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 새우가 배를 불릴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

“아아, 알 것 같습니다. 역시 유지웅 회장님을 결정체 카르텔에 끌어들일 생각이셨군요.”

처음으로 휴버튼은 흠칫 했다. 지나가듯 던진 가벼운 한 마디지만, 그 안에 담긴 파급력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휴버튼은 눈빛을 바로 했다. 방금 그 한 마디로, 눈앞의 남자는 변방 소국의 보잘것없는 공무원에서 몇 단계 격상되었다.

“그건 귀하의 생각인가? 아니면 귀국 정부의 분석인가?”

“그게 중요합니까?”

“귀하의 생각이군. 놀라워.”

휴버튼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중요한 정보를 준 적도, 흘린 적도 없다. 친족들에게도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발상이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단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놀랍도록 정확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짚어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오래 전부터 국제 금융망의 통합을 꿈꿔왔다. 궁극적으로는 돈으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패권을 구축하려 했다.

그걸 위해서 결정체 시장을 틀어쥐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CERC도 그 원대한 계획의 여러 갈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일이 자꾸만 틀어졌다. 유지웅이라는 변수가 원대한 통합 계획을 자꾸만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결국 선택을 해야 했다. 그를 제거할 것인지, 아니면 끌어들일 것인지.

“극초기에 미리 알았다면 손쉽게 제거가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회장님이 이렇게 순식간에 커버릴 줄은 몰랐겠죠. 이제는 제거를 하려면 로스차일드도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할 수밖에 없죠. 아니, 모든 것을 잃어도 제거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죠. 로스차일드가 구축한 결정체 카르텔에 회장님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지요.”

휴버튼은 계속 말을 해보라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처음의 당황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이러스 괴수를 개발한 건…… 궁극적으로는 백신 판매로 돈을 벌려는 게 아니었죠?”

“그럼 자네는 뭐라고 상상하는가?”

휴버튼의 태도가 다소 바뀌었다. 마치 부하를 대하듯 편안하게 하대하는 태도로 변한 것이다.

“힘의 과시가 아닐까요? 회장님에게 로스차일드가 지닌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죠. 로스차일드가 회장님과 싸워봤자 손해인 걸 알듯이, 회장님 또한 로스차일드와 다퉈봤자 남을 게 없다는 것을 경고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

“서로의 힘을 인정한다면, 회장님 또한 자기 이익을 위해 결정체 카르텔에 합류하게 될 테지요. 그것이 로스차일드, 아니 귀하가 구상한 결정체 카르텔의 마침표 아닙니까?”

짝. 짝. 짝.

휴버튼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손뼉을 천천히 쳤다. 놀랍다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더 그의 감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유쾌한 모순이다.

“대단한 통찰력이군.”

어리석은 자들은 백신 판매로 떼돈을 벌고자 함이 바이러스 괴수 개발의 목적이라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수 이득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목적은 유지웅을 압박하는 카드로 이용, 그를 자신들이 탄 배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아들에게도 암시 한 번 한 적이 없는 사실. 그러나 상대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짚어냈다. 이쯤 되면 적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 아깝다.

“내 밑에서 일할 생각이 없나?”

이 제안은 의외였는지 남자는 흠칫 했다. 휴버튼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이런 조그만 나라의 공무원으로 썩기에는 너무 아깝군. 자네가 상상하지 못한 부귀, 권력을 안겨주겠네. 내 밑에서 일하게.”

“높게 봐주시는 것은 곤란합니다만, 그건 안 되겠습니다.”

“바로 결정하라고 말하진 않겠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휴버튼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의 그 통찰력이면 충분히 뒷일을 상상할 수 있겠지. 유지웅 회장도 결국 우리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네. 어느 누가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거지. 그가 과연 그것을 꺼려할까?”

“…….”

“천천히 생각해보게. 자네의 능력이 진심으로 아까워서 하는 말이니.”

과연 허투루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들어온 인물은 아닌 모양이다. 설마 자신에게 회유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그 배포에 남기철은 놀랍기까지 했다.

하지만 휴버튼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로스차일드가 보유한 은행, 기업, 자산에 대한 동결 조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알아도 과연 저리 호탕하게 웃을 수 있을까?

무력과 금력은 재미있는 구도를 이룬다. 양쪽이 비슷비슷하게 작을 때는 금력이 무력의 눈치를 본다. 그러나 양쪽이 최고 정점에 도달하면 무력이 금력에 휘둘린다.

힘이라는 것은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유지를 위해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무적의 군대도 돈이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것이 그 예다.

힘이 세상의 눈치를 보며 움직일 때, 그것을 무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힘이 더 이상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폭력은 금력에도, 권력에도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 점을 간과한 것이 휴버튼의 가장 큰 실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 작품 후기 ============================

-일개 공무원으로 썩기에는 너무 아깝군.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저 예비 대통령인데여;;;;;

-헐...제가 깝침. 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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