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귀족이다-430화 (430/1,550)

00430  사냥은 끝났다. 그러나...  =========================================================================

“단언컨대 호남산 곡물은 가장 완벽한 백신입니다.”

제니스가 개발한 치료제는 성황리에 임상 실험을 마쳤다. 애초에 약이라기보다는 식품 성분을 응축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의 부담감이 덜했다. 뿐만 아니라 제니스 연구단지에서 내놓은 물건이었기에 그 신뢰가 더욱 컸다.

한국에서 국민들이 가진 제니스 신뢰도는 매우 높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하는 말은 안 믿어도, 제니스 공격대장이 하는 말은 믿는다는 말이 빈번하다.

유지웅은 많은 돈을 벌지만, 세금은 거의 안 낸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신뢰는 높다. 왜 그러냐면, 세금 이상으로 사회에 베푼 게 많기 때문이다.

CIA의 테러 사건 때는 40%에 달하는 SC컴퍼니의 지분을 압류해서 피해자에게 돌려줬다. 자선 재단을 운용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다. 블루 결정체를 통한 경제 발전에도 기여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수십조 원을 투입해서 연구단지도 설립했다. 심지어 일반 가정이 전기사용료를 거의 내지 않게(사용한 전력에 대한 요금은 내지 않지만, 기본요금 2,000원은 낸다) 해줬다.

―저런 사람이 사람 목숨 가지고 설마 장난 치겠어?

그간 쌓아온 명성 덕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제니스의 치료제 발표에 의심을 제기하지 않고 적극 임상에 응했다. 그리고 결과는 놀라웠다. 단 3번의 투약 횟수만으로 더 이상의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임상 실험 결과가 알려지자 외국에서도 임상 실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제니스 연구단지는 국내외의 전면적인 협력에 힘입어,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을 했다.

자그마치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상대로 진료를 마친, 바이러스 연구의 권위자인 칼스턴 박사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백신’이라며 호평을 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해도 인체에 완전 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또한 모든 항원은 약에 내성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약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단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칼스턴 박사는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유명한 의학자였다. 그래서 한국도 그에게 임상 실험을 부탁한 것이다. 같은 결론이라 해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신뢰는 달라진다.

“우리는 모든 피험자들의 체내에서 바이러스가 세포 공격으로 사멸하는 과정을 확인했습니다.”

천여 명이 넘어가는 대형 회견장에는 셔터 누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내외신 기자들은 칼스턴 박사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정밀 검사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았다 해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바이러스 사멸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도 체크에서 미약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은 결정도 스캔에서 1마이크로 이하의 반응을 나타냈다. 정확한 수치는 잡아내지 못했으나, 완벽한 0은 아니라는 뜻이다. 칼스턴은 그것이 세포핵 어딘가에 밤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완치는 가능하지만, 박멸은 불가능하거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영국에서 100만 톤을 요청했습니다!”

“독일이 50만 톤입니다!”

“미국이 1,000만 톤을 요청했습니다! 공시매도가보다 20%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입니다! 필요하다면 전액 선금을 걸겠다고 합니다!”

호남산 곡물은 불티나게 팔렸다.

아직 정제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알약 생산 속도는 수요에 비해 턱없이 느렸다. 그러자 선진국들은 알약을 주문하는 한편 동시에 곡물 판매를 요청했다.

“그러게 엄마 아빠는 많이 생산 좀 해놓으시라니까…….”

유지웅은 가볍게 투덜거렸다. 자식이 부모 생각해서 좋은 말씀 해드렸는데, 이 분들이 글쎄 반만 믿었다. 최대치로 가동하지 않고 그 반의 반만 가동한 것이다.

“6개월만 가동해도 전 세계 사람들이 일 년 간 소비할 곡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이 겨울이라…….”

호남평야는 겨울에도 곡물이 잘 자란다. 여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눈이다. 눈이 내리면 곡물은 안 죽어도 수확을 하는데 차질을 빚는다. 함박눈이 펑펑 쌓여 있으니 기계를 동원해서 수확하는 것도 어렵다. 애초에 농부들은 그런 혹한의 수확을 해본 경험도 없다.

게다가 눈 때문에 인명 사고가 날 것을 우려해서 지금 호남에서는 생산 일정이 멈춘 상태였다. 아쉬운 대로 그동안 급히 생산, 비축해놓은 물량으로 백신 장사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참, 휴버튼 로스차일드 회장한테 회유 제안을 받았습니다. 물론 거절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말씀은 드려야 할 거 같아서…….”

“뭐라고요? 회유? 아니, 지가 줄 감투가 뭐가 있다고? 자기한테 오면 뭐 시켜준대요?”

“그, 글쎄요. 거기까지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만…….”

“어디서 나중에 이 나라 대통령이 되실 분을 뺏어 가려고.”

“……네?”

남기철은 눈앞이 노래졌다. 지금 뭐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왜요? 남 국장님 대통령하지 말란 법 있나요?”

“아, 아니. 그렇지만 저는…….”

“한 번 해보세요.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는 가장 잘하실 거 같아요.”

식은땀이 난다. 저게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에서, 그리고 저 사람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 어렸을 때나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철들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소망이다.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다. 저번에는 분명 장관 시켜준다고 해놓고는 그게 왜 또 업그레이드 된 건가?

“호, 남 국장을 대통령으로 만들 생각인가?”

“네, 그래요. 그래서 다음 정권 때 결정체 자원부 장관으로 밀어드리려고요. 아무래도 그냥 대선에 나가면 인지도 문제가 있으니까 장관직으로 좀 인지도 쌓고 나가시면 될 거 같아요.”

“나는 자네가 강우석 의원,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밀 줄 알았는데.”

“그 분은 대선에 관심 없어요. 국회에 뼈를 묻겠대요. 국회가 대통령보다 더 힘이 있다나 뭐라나?”

“어떤 면에서는 그렇더군.”

나이를 초월한 두 친구의 대화에 남기철은 가슴이 죄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얌전히 듣고 있어도 되는 거야? 왠지 위험할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번 대통령 임기가 언제까지지?”

“2년 남았어요.”

“한국이 지금 4년 연임제였던가? 그럼 다음 정권에 장관을 해도 잘하면 지금부터 6년, 운 나쁘면 지금부터 10년이 걸릴 수도 있겠군.”

“너무 길지만, 어쩔 수 없죠.”

안슐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했다.

“아예 다음 대선에 대통령으로 바로 나가는 건 어떤가?”

“예? 하지만…….”

유지웅도, 남기철도 그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남기철은 아직 일반 국민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일개 공무원이다. 물론 국장급 인물이긴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국무총리 이름도 잘 모르는 판에 국장급 공무원이 대선으로 나가는 건 무리가 있다.

“자네가 밀어주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국민들 눈에는 너무 생뚱맞지 않을까요?”

“인지도를 위한 실적이 필요하다는 거 아닌가? 그거라면 해결 방법이 있네.”

“뭔데요?”

유지웅이 귀를 쫑긋 세웠다. 남기철도 자기 이야기라서 아무래도 관심이 쏠렸다. 따, 딱히 대통령 따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시켜만 주면 과거 비리 대통령들 따위보다는 얼마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

“지금 세계는 결정체 자원으로 유지되네. 하지만 그 결정체의 수급, 배분이 합리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지. 어느 나라에서는 결정체가 썩어나가는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결정체가 없어 촛불로 불을 밝히기도 하네.”

“……그건, 그렇죠.”

유지웅은 머리를 긁적였다. 결정체가 썩어나가는 나라.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이 1위였다. 그러나 지금은 단연코 한국이 압도적인 1위였다.

“더 문제인 건 그런 결정체 빈곤국들이 자국 레이더가 있음에도 공격대 운영 경험이 없어 제대로 결정체를 수급하지 못하거나, 수급한다 해도 소수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대부분 밀수출되고 있다는 현실이지.”

“안타까운 일이긴 하죠. 근데 그게 왜……?”

“국제 NGO 사이에서는 그런 나라를 위한 지원 기구가 창설되어야 한다는 말이 높네. 이참에 한국이 주도적으로 그런 걸 만들어보면 어떤가?”

어떤 나라가 자국 내 결정체를 어떤 식으로 수급해서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는, 온전한 그 나라의 자유다. 그러나 결정체는 이미 생활에 필수불가결 산업자원이었다.

원활하지 않은 분배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빈곤과 기아에 고통 받는다면, 여러 나라들이 힘을 조금씩 합쳐서 도와주는 게 보편적인 도리에 맞지 않을까?

자세한 설명을 듣고 유지웅도 그 취지를 이해했다. 남의 나라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자는 게 아니라, 빈곤민들을 위해 도울 수 있는 것은 여럿이 힘을 합쳐 도와보자는 뜻. 취지만 보면 나무랄 데가 없다.

“근데 그거랑 남 국장님 대선이 무슨 상관…… 아?”

“이해했군. 일단 세계 결정체 기구라고 가칭하지. WCO(World Crystal Oganization) 초대 의장이라면 충분한 정치적 실적이 되지 않겠나? 2년 안에 대통령은 당선되고도 남을 거 같은데.”

남기철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진짜 위험한 건 유지웅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이다!

*  *  *

CERC는 악의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언론에서는 매일 같이 CERC의 비도덕함을 성토했고,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CERC 시설이 있던 주변에는 매일 같이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들어 피켓 시위를 벌였다.

“CERC는 죽음의 상인이다!”

“CERC를 옹호하는 자들을 처벌하라! 처벌하라!”

“인류를 CERC로부터 구원한 러시아 군을 석방해라!”

CERC가 개발한 백신은 모든 자료가 러시아와 한국측에 넘어갔다. 그렇다 해도 외부에 빼돌린 예비 자료가 있어 백신을 다시 제조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CERC의 백신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누구도 그런 범죄 집단이 만든 백신을 투약하고 싶지 않았다.

CERC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치고 있던 나라, 기업, 개인들은 서둘러 발을 빼냈다. 중간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던 미국은 호남산 곡물이 발표되자마자 어느 누구보다 혹독하게 CERC의 행위를 비난하고 나섰다. 비시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할 수 있음을 천명하기까지 했다.

땀을 뻘뻘 흘린 것은 CERC 창설에 조인한 13개의 유럽 국가들이었다. 이들은 빼도 박도 못하는 대주주였기에 사람들의 비난에서 몸을 빼낼 길이 요원했다.

그런 비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도 희생양이 필요했다. 때마침 좋은 표적이 있었다. 유지웅이 대놓고 지목한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유럽에 존재하는 로스차일드 가문 소유의 은행, 기업, 자산이 속속들이 압류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군대는 각국 정부 관료들의 도움을 받아, 실질적인 압류에 나섰다. 은닉한 재산의 수량도 엄청났으나, 어떻게든 이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유럽 정치가들은 악착같이 찾아내었다.

그중에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깊은 인연이 있는 정치가도 많았으나, 정치 사회란 비정했다. 지금은 타고 있던 배를 버려야 할 때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거 난감하군.”

유럽이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비시의 미간에서도 주름이 가실 날이 없었다.

“우리 미국에도 CERC에 한 발 걸친 기업들이 적지 않은데…….”

이번 일로 미국은 얻은 것은 없이 손해만 컸다. 물론 유지웅으로부터 직접적인 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고 단순한 투자로 CERC에 발을 걸쳤던 기업들만 비난을 받게 되었다. 날린 자금, 떨어진 기업 이미지까지 고려하면 그 손실액은 천문학적이었다.

“각하, 제니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제니스에서?”

루딘의 보고에 비시는 안색이 밝아졌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유지웅이 살 길을 열어주려나 보다.

“바이러스 괴수 배후로 CERC와 로스차일드 외에 또 하나를 범죄자 명단에 올리겠다고 합니다.”

“하나를 더? 그게 어딘가?”

“연방준비은행입니다.”

비시는 눈을 부릅떴다. 연방준비은행은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초대형 중앙은행으로, 화폐를 발급 및 감독하는 미국 정부의 재무 대리기관이다.

그걸 범죄자 리스트에 올리겠다면, 미국보고 죽으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게 어째서 해결 방안이 된다는 건가! 자칫하다가는 미국도 CERC 꼴이 날 수 있는데!”

“정확히는 연방준비은행 그 자체가 아닌, 소유권을 가진 가문과 인물들을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명분 삼아 연방정부에서 은행을 압류해버리고 화폐 발급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오히려 우리 미국은 큰 이득이 됩니다.”

비시의 안색이 놀라우리만치 차분해졌다.

연방준비은행은 국립 은행이 아닌 민간기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화폐 제도 자체를 좌지우지한다. 뜻있는 지식인들이 그와 같은 현실을 우려하고 비판했으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자본가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루딘의 말대로 된다면, 비시 자신의 대에서 엄청난 정치적 실적을 거둘 수 있게 된다. 재선은 따 놓은 당상이다. 물론 공짜 없는 대가는 없으리라.

“대가는?”

“은행 지분의 30%를 달라고 했습니다.”

적은 대가는 아니다. 그러나 대답은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한국 결정체 장관에서(임관도 하기 전에)

세계 결정체 기구 의장으로(설립도 하기 전에)

승진했습니다.

상관 친구에게 잘 보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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