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귀족이다-431화 (431/1,550)

00431  사냥은 끝났다. 그러나...  =========================================================================

거목을 들어내면 주변 나무뿌리 전체가 딸려 나온다고 한다. 오랜 세월 뿌리를 내리면서 이런저런 다른 개체의 잔뿌리와 심하게 엉켜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같은 경우가 그랬다. 유지웅은 원래 결정체 카르텔한테 ‘항상 주시하고 있으니 조심해라.’라는 경고를 위해 로스차일드를 최종 선택했다. 그런데 로스차일드를 들어내려고 하니, 그 주변에 딸린 자본 가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티은행, JP모던, 록펠러, 카네기…….”

명단을 보니 이들 전부를 절단 냈다가는 세계가 다시 한 번 대공황에 빠지게 생겼다. 오죽하면 남기철도 우려를 나타냈다.

“관련 세력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 전부가 무너지게 되면 세계 경제가 어떻게 휘청거릴지 상상이 안 갑니다. 이들 각각이 어디까지 가담했는지 조사하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테고요.”

로스차일드와 관련이 있다 해서 CERC가 저지른 바이러스 사건에 적극적 가담층은 아니다. 예를 들어 카네기 가문은 많은 자금을 대긴 했으나, 가문 주요 인사는 바이러스 괴수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CERC는 그만큼 보안을 철저히 유지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철저히 제재하고, CERC는 자네와 러시아가, 연방준비은행은 자네와 미국이 나눠 갖는 걸로 하게. 그 정도만 해도 결정체 카르텔 녀석들한테는 충분한 본보기가 될 거야.”

남기철은 아마 그들을 대신해서 유지웅과 안슐이 새로운 결정체 카르텔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임관도 하기 전에 장관이 되었고 설립도 하기 전에 세계기구의장이 되었는데, 의석에 앉아보기도 전에 잘리는 건 싫다.

“러시아가 만족할까요? 서구 자본가들 이 기회에 전부 때려잡겠다고 단단히 화가 났던데…….”

성이 난 불곰이 아직 배가 고프다면 과연 달랠 수 있을까? 유지웅은 그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기우였다.

“알겠습니다. 로스차일드와 CERC에 모든 책임을 씌우는 것으로 마무리 짓지요.”

협의를 위해 러시아까지 날아간 남기철은 밝은 미소로 승낙한 키틴의 태도에 마음을 놓았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동안 너무 키틴 대통령을 불같다고만 본 건 아닌지 미안하기도 했다.

“그럼 분배는 어떻게?”

“압류한 재산 중 40%는 러시아가, 40%는 회장님이, 10%는 해당국에, 그리고 나머지 10%는 가칭 WCO에 주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습니다만.”

“WCO요?”

“World Crystal Organization입니다. 회장님께서는 이런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고, 결정체 자원이 올바른 길에 쓰일 수 있도록 일종의 국제 중재 기구를 만드실 계획이십니다.”

“그렇습니까? 러시아도 참여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키틴은 먹이를 발견한 불곰처럼 눈을 빛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뒤에 보였던, 배부른 곰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로스차일드 녀석들 형 집행은 어디서 하실 겁니까?”

“일단은 바이러스 괴수가 한국 전체에 저지른 테러 행위이기도 하니, 한국 법정에 세우고 형도 집행할 예정입니다.”

“아쉽군요. 재판이라면 몰라도, 형 집행이라면 우리 러시아가 훨씬 나을 텐데요. 아마 한국 국민들도 그걸 원할 겁니다.”

남기철은 식은땀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 국민들도 안락한 한국 교도소보다는 차가운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범죄자들이 머물기를 바랄 것이다.

“그나저나 조금 염려가 됩니다. 이거, 일을 지나치게 벌인 것은 아닐지…….”

거대한 공룡도 개미의 연합에 무너질 수 있다. 남기철은 이번 일로 괜히 여기 저기 적을 만든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유지웅의 절대적인 영향력이야 인정하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적을 만들어 ‘폭군’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간이 콩알만 해서 그렇다.

“서구 자본가 녀석들은 돈으로, 금융으로, 그리고 결정체로 세계를 쥐려고 합니다. 적당한 때에 충분한 본보기를 보여준 겁니다. 힘의 격차를 깨달았으니, 이제 분수를 알고 알아서 처신할 겁니다.”

키틴은 차갑게 웃었다. 그 미소는 마치, 분수를 모르는 녀석들이 제발 또 기어 올라와 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 섬뜩한 감촉에서, 남기철은 한 가지 분명히 깨달았다. 불곰은 배가 부른 게 아니다. 아직도 배가 고픈 상태다.

하지만 조련사가 더 이상 흥미가 없는 듯해서, 배가 부른 척 얌전히 앞발을 내린 것뿐이다. 먹이를 달라고 귀찮게 했다가, 다음 사냥에 불리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

*  *  *

늦은 졸업식이 열렸다.

보통 2월 초에 졸업식을 해야 하나, 국내외가 워낙 어수선한 관계로 2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졸업식을 할 수 있었다.

아직 사건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얼추 끝이 보였다. 밤 바이러스와 관련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검거되어 한국으로 이송 중이었고, 유럽은 러시아를 통해 한국과 극적인 타협을 이뤄냈다. 로스차일드와 CERC에만 책임을 덮어씌우기로 비밀 합의를 본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여러 나라에서는 친유대 인사는 정재계에 발을 붙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남은 것은 아직도 발각되지 않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과,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지만, 유지웅은 이미 졸업식에만 마음이 가 있었다.

“이야, 잘 어울린다. 근사해.”

“엄마, 예뻐!”

신랑과 아이가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자 정효주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히죽 웃으며 이리저리 포즈를 잡았다. 유지웅은 아이를 테레사에게 맡기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군데군데 눈이 쌓인 캠퍼스는 졸업식을 마치고 가족끼리 사진을 찍는 졸업생들로 한창이었다.

“니 마누라는 벌써 학사도 땄는데, 넌 언제 딸 거냐?”

“엄마는. 나도 내년이면 졸업이거든?”

“그러게 효주랑 같이 대학 들어갔으면 얼마나 좋아.”

“엄마. 아들 앞에서 꼭 그래야겠어?”

“넌 아들 앞에서 엄마 엄마 하고 싶니? 이제 어머니 해야지.”

“…….”

유지웅은 얼굴이 벌게졌다. 옆에서 정효주가 쿡쿡 웃었다. 남들이 보기에 전혀 약점이 없을 듯한 그에게도 약점은 있다. 바로 이제 네 살(한국식)이 된 유세현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장모가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그나저나 사돈, 요즘 쌀 팔라고 여기저기서 줄을 섰다면서요? 좋으시겠어요.”

“말도 마세요. 쌓아놓는 족족 다 팔려나가서 창고가 텅텅 비었는데, 겨울이라서 농사도 못 짓잖아요.”

“아니, 왜요? 그 땅은 겨울에도 벼가 잘 자란다던데.”

“자라는 거야 잘 자라지만, 눈 수북이 쌓이면 수확이 힘들어요. 눈길에 미끄러져서 사람 다치기도 쉽고요. 그래서 겨울에는 손 놓았답니다.”

호남평야는 선주문만 약 12억 톤이 걸려 있었다. 전 세계에서 바이러스 치료 및 예방을 위해 주문한 결과다. 걱정이 많은 어떤 나라는 아예 호남산 곡물을 국가 주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는 수준이다.

호남평야 소유주는 유지웅이지만 사장은 그의 부친이다. 어느새 그의 부모는 국제적인 곡물 재벌로 통하고 있었다.

정효주의 부모가 상대적으로 꿇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안슐은 얼마 전 IACP 한국 지사를 유지웅한테 매각했다. 적당한 프리미엄을 얹은 매매로, 둘 다 이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의 거래였다.

현재 IACP 한국 지사는 장인이 사장을 맡고 있다. 원래 결정체 산업계에 종사하던 분이기에 믿고 맡긴 것이다. 아무래도 같은 능력이라면 친족이 낫다.

“그나저나 지웅아, 곡물가는 어쩔 거냐?”

“응? 왜, 아빠? 아니, 아버지?”

자연스럽게 아빠라 불렀다가 급히 수정하는 모습에 유재석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전 세계를 상대로 독점 장사를 하면, 다른 나라 농부들은 다 굶어죽는 거 아니냐?”

“어쩔 수 없잖아요. 밤 바이러스를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호남 곡물은 꾸준히 먹어야 돼요. 밤 바이러스를 퍼뜨린 게 저도 아니고, 저도 피해자인데…….”

“그래도 그렇지. 도리라는 게 있는 법 아니냐? 나도 평생 농사만 지어서 그 심정 잘 안다. 기껏 힘들게 농사지었는데 하나도 안 팔려서 다 갈아버릴 때 그 마음이 참…….”

옛날 생각이 나는지 유재석은 잠시 말을 멈췄다. 유지웅은 괜히 곤란해졌다.

“얼굴도 모르는 모든 농부들이 죄다 원망할 텐데, 그 한 어떻게 업고 가냐? 그거 참 못할 짓이다.”

“알았어요. 생각해 볼게요.”

욕먹거나 비난을 사는 건 유지웅도 싫었다. 따지고 보면 이 고생을 하는 것도 다 훗날 아이들한테 존경 받을 수 있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일반 주곡 시세보다 조금 비싸게 팔면 되나? 매일 먹기는 부담스럽고 가끔 사먹기에는 적당한 가격으로?’

유지웅은 속편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큰 밑그림을 잡아주면 나머지는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합리적인 시세가 얼마인지 판단해야 할 문제라든지, 호남산 곡물 가격이 국제 식량 가격을 결정하는 기준점이 된다든지, 하는 소소한 문제가 있지만 그건 남기철 같은 사람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임신 7개월째인 정효주는 이제 배가 상당히 부풀었다. 하지만 얼굴이나 팔다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날씬해서, 과연 탱커의 육체란 얼마나 우월한지를 느끼게 해준다.

얼굴도 소녀 시절, 풋풋한 고등학교 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부푼 배로 다니는 걸 보면 여고생을 임신시킨 듯한 이질감이 가끔 느껴지곤 한다.

“자, 웃으세요!”

정효주와 유지웅을 중심으로 다 같이 가족사진을 찍었다. 장권재가 카메라를 잡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  *  *

하얀 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커다란 여행 가방에 짐을 차곡차곡 담고 있었다. 의류, 노트, 칫솔, 심지어 노트북까지 가지런히 담긴다. 짐을 정돈하는 이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즐거워 보인다.

“벌써 떠나게?”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없어.”

레지나는 즐거운 듯이 대답했다. 나미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네 후원자라는 사람들, CERC였지?”

알 듯 말 듯 한 미소가 대답을 대신했다. 나미는 다시 물었다.

“네 원수, 미국 형무소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이제 그 놈만 남았어. 내가 포기했던 배후자들은 알아서 자멸해줬으니.”

토미 에슨, 옛 CIA 국장. 할아버지의 암살을 지시한 죄목으로 형무소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다. 레지나가 나미를 도왔던 것도, 자신의 손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토미 에슨은 하수인일 뿐 진짜 주범은 따로 있다. 바로 할아버지의 연구를 독점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거대 자본 세력들이다. 거짓 이름을 내세워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지원하고, 할아버지의 목에 줄을 채우려다가 팽해버린 존재가 있다.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토미 에슨은 유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미 정부의 의사도 무시한 채 할아버지를 암살한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포기했다. 로스차일드는 그녀에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복수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바위에 계란을 던져봤자 계란만 박살나는 건 명확한 법칙이니.

그러나 신이 버리지 않은 것 같다. 녀석들은 결국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CERC에서 경력을 쌓고, 그들의 신뢰를 얻으며, 이중 스파이로 활약한 효과가 있었다. 그들을 무너뜨릴 비수를, 그들을 쓰러뜨릴 힘을 갖춘 남자에게 건네줄 수 있었으니.

“네가 겨우 CERC를 없애려고 여기까지 들어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레지나는 잔잔하게 웃으며 물었다.

“맞춰볼래?”

“…….”

“폐쇄 모듈의 건조 목적을 확인했어. 그건 할아버지의 유산과는 상관없는, 최윤 박사의 독자적인 물품이야. 그것으로 됐어. 할아버지의 유지는 지킬 수 있으니까.”

“……유지?”

“내가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조용히 떠나야지.”

“우리 약속은?”

“여전히 유효해. 내가 토미 에슨을 죽일 순 없으니까. 난 여전히 네 도움이 필요하고, 너도 여전히 내 도움이 필요해.”

약속은 철회되지 않았다. 나미는 토미 에슨을 죽일 것. 레지나는 나미가 힘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 그게 처음 둘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었다.

가방을 끌고 복도를 가로지른 레지나는 현관문을 열자 쏟아지는 햇살에 잠시 눈을 가렸다. 아침이면 겪는 눈부심이지만, 이곳을 떠난다 생각하니 막상 색다른 느낌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막 발을 다시 떼려는 찰나였다.

“레지나 박사님, 어디 여행 가십니까?”

최윤의 목소리에 레지나는 흠칫 놀랐다. 어떻게 변명하면 좋을지 난처했다.

그런데 최윤은 혼자가 아니었다. 낯익은 얼굴이 바로 뒤에 있었다. 유지웅이었다.

그는 레지나를 보고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레지나 박사님. 여기 계셨군요.”

“아, 안녕하세요?”

“어디 여행 가시나 봐요?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딱 절묘한 타이밍이 됐네요. 이번에 박사님의 결정적인 제보 덕분에 세계를 좌지우지하려던 범죄자들을 일망탕진 할 수 있었습니다. 전리품도 꽤 적지 않게 얻었고요. 전부 다 박사님 공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너무 치켜세워주시면 제가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는 박사님처럼 실력이 뛰어나면서도 정의감을 갖춘 인재가 필요합니다. 생각해보니 박사님과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정식으로 영입 제안을 할까 합니다.”

“영입 제안이요? 음…….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레지나는 다소 난처했지만 일단 이 자리를 피하고자 유지웅이 내민 서류를 받아들였다. 어서 읽어보라는 무언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그녀는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계약서를 꺼내 제목을 읽었다.

“그러니까…… 효웅산업 연구원 종신 고용 계약서? 잠시만요, 종신이요?”

============================ 작품 후기 ============================

나와 계약해서 과학소녀가 되어줘...

-들어올 땐 맘대로 편하게 들어왔찡? B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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