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3 양지로 쫓겨난 남자 =========================================================================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
핵 폭풍이 잦아든 후 그레이브스는 최윤과 함께 지하 하수도를 이용해 파울러 시티를 탈출했다. 도시 외곽에서 하수도를 열고 나온 둘의 모습은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안 그래도 파울러 시티에 체류하면서 씻지를 못해 지저분했는데, 냄새 나는 하수도까지 헤치고 나왔으니.
옛 CIA 잔당이 최윤을 노린다는 걸 확인한 그레이브스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트위스트는 토미 에슨의 오른팔. 그렇다면 토미 에슨의 후원자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휘버 암살을 사주한 토미 에슨은 본래 사형에 처해져야 했다. 그러나 그를 후원하는 세력들의 암중 압박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정치적 뒷거래다.
‘록펠러, 카네기, 벤자스, 케일러…….’
하나하나가 미국 유수의 정재계 가문들. 그 중 어느 가문이라도 토미 에슨의 후원자라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드러난 증거가 없기에 연방 정부에서도 섣불리 물고 늘어질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그들은 미국 상부층에 이미 오래 전부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카네기는 아닐 거다. 적어도 이번 일에는.’
당대 카네기 가주 세인 아민 카네기는 제니스 혈족에 자기 혈육을 집어넣으려고 야심을 품고 있다. 그래서 테레사 앨지노어와 제이스 록펠러 사이에 맺어진 혼약도 깨버렸다.
정당한 혼인일 필요는 없다. 테레사가 유지웅의 첩이라도 되면 좋은 것이다. 어차피 스스로를 남자라 인식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라서 정상적인 혼인이 가능할 리도 없다.
그런 장기적인 관계를 기대하는 카네기 가문에서 설령 이번 일을 후원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과거 토미 에슨의 후원자라 해도 이미 발을 뺐을 게 틀림없다.
사람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트위스트가 나선 이상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 심지어 EIS 내부에 있는 칠드그린 라인조차도.
부국장이 선택한 사람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새어나갈 정보가 두려운 것이다. 트위스트라면 이미 미국 주요 기관에 감시의 눈을 붙였을 것이다. 그러니 미 정부의 보호로 들어가는 것도 위험하다. 최윤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것도 불사하는 광신도들이지 않은가.
‘백악관을 날려 버릴지도 몰라. 차라리 카네기의 도움을 받을까?’
카네기 가문 역시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가문 내 극소수 고위 인사는 신뢰할 수 있으나, 대다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무슨 정보가 흘러나갈지 모른다.
하지만 그레이브스는 생각을 달리 했다. 절반의 도움만 받는다면 어떨까?
“저는 살아 있습니다.”
「……정말 살아있었군요. 놀라워요.」
그레이브스는 카네기 가문의 장손녀인 카타리나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했다. CIA의 맹점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그들은 카네기 가문을 감시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다. 또 카네기에서 가주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장손녀 카타리나의 전화를 도청하는 것은, 어찌 보면 정부 기관을 감시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무엇보다 카타리나는 그레이브스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유지웅의 도움을 받을 때 EIS에서 그를 통해서 몇 차례 지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게 뭐죠?」
무척 놀라워하던 그녀가 대뜸 묻는다.
그레이브스는 명석한 여자라며 크게 감탄했다. 아마 그녀도 아이오와 주 사태에 관해서 꿰뚫어보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존망은 카네기의 부흥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니. 지금 카네기 가문에서도 난리가 났으리라.
그녀는 그레이브스가 살아서 자신에게 전화를 한 행위 자체에서, 단 수 초 만에 정황 판단을 마친 것이다. 놀라운 통찰력이요, 결단력이었다.
“오백만 달러의 현금이 필요합니다. 그거면 됩니다.”
「베어 시티, 그릴스 타운, 수르비베 킹 밸리, 어디가 편하세요?」
“그릴스 타운이 제일 가깝군요.”
파울러 시티는 아이오와 주 동남쪽에 위치한다. 현재 그레이브스는 파울러 시티를 벗어나서, 동남쪽에 붙어 있는 일리노이 주 외곽으로 피신해서 연락을 하는 중이었다. 이곳은 기반 시설이 파괴되지 않아 무선 전화가 제대로 작동했다.
카타리나가 말한 세 지역은 전부 그레이브스가 있는 지역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레이브스가 자신에게 전화를 한 타이밍, 그리고 전화가 가능하다는 것 두 가지 사실만으로 그의 현재 위치를 대강이나마 짚어냈다.
그레이브스는 그녀의 예리함이 놀라웠다. 과연 재계 가문의 상속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경비행기 한 대를 준비해놓죠. 사흘 뒤.」
“감사합니다.”
옆에서 통화하는 걸 듣고 있던 최윤이 물었다.
“누구입니까?”
“카네기 가문의 상속녀, 카타리나입니다. 저와 안면이 좀 있습니다. 약간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대단하군요! 카네기 가문과 아는 사이라니!”
그레이브스는 매우 황당했다. 이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당신은 누구랑 아는 사이인 걸 잊었어? 지금 미국이 당신 인맥 하나 때문에 지금 이리 휘청거리는데!
“그런데 전화가 터지면 정부에 직접 연락을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위험합니다. 정부와 접촉을 하게 되면 트위스트 쪽에도 알려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도 연방 정부한테까지 그들이 반발할까요?”
“보셨지 않습니까? 핵탄두까지 입수해서 수십만 자국민이 피난해 있는 도시를 날려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녀석들입니다. 미국 땅에 있는 한 그 트롤, 아니 그 광신도들한테서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미군 기지로 들어가면 녀석들은 아마 그 미군 기지를 또 핵으로 날려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는 것을 그레이브스는 자세히 설명했다.
“우리 생존을 비밀로 하고, 단독으로 미국 땅을 벗어나 멕시코로 들어갈 겁니다. 멕시코에서 위조 신분으로 항공편을 이용, 한국에 들어갑니다.”
“여기서는 캐나다가 더 가깝지 않나요?”
“캐나다는 위조 신분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멕시코가 더 편합니다.”
“아, 그래서 오백만 달러를 요구하신 거군요.”
“네, 위조 여권 제조 및 매수 비용입니다.”
최윤은 이게 바로 첩보원들의 생태계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사흘 뒤 그레이브스는 최윤을 안내해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디라고 말도 안 했는데?’
최윤은 그게 궁금했다. 그레이브스도, 카타리나도 그릴스 시티라고만 했지 그릴스 시티 어디에 경비행기를 두겠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했다. 근데 어떻게 이리 잘 찾아가는 걸까?
“여기는 그릴스 시티에 있는 카네기 가문 소유 별장입니다. 아마 오늘은 비어 있을 겁니다.”
최윤은 감탄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 정보 교환이 가능하다니, 그의 입장에서는 놀라울 뿐이었다.
별장은 말이 별장이지 규모만으로 치면 유지웅이 사는 흑석동 저택보다도 컸다. 이건 숫제 별장이라기보다는 서울 강북의 웬만한 재벌들 집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듣자니 이 산 전부가 별장이라고 한다.
“과연 미국 재벌 가문은 대단하군요. 별장 규모가 이 정도라니.”
“…….”
아무튼 그레이브스의 장담대로 별장은 비어 있었다. 둘의 상황을 알고 배려했는지 별장에는 따뜻한 식사가 김이 식지 않은 채 준비 되어 있었고, 잘 보이는 곳에는 반듯한 양복도 준비되어 있었다.
양복 옆에는 커다란 트렁크가 세 개 있었다. 그 중 두 개는 두 남자가 입고 사용할 속옷, 양말, 셔츠, 치약 등 각종 여행물품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100달러, 500달러, 1000달러 묶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일단 식사하고 씻죠.”
파울러 시티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던 두 남자에게 차려진 식사는 그야말로 천상의 음미였다. 식사를 마치고 둘은 각자 욕실에서 씻고, 차려진 양복을 입었다.
“제 기억으로는 비행장이 이쪽인데…….”
그레이브스는 별장 뒤편에서 비행장을 찾아냈다. 긴 활주로 출발선에 당당히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가 있었다.
“오, 제트기까지!”
작은 경비행기 정도를 기대했던 그레이브스는 감탄했다. 그리 큰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이놈도 제트기다. 프로펠레 항공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리를 날아갈 수 있다.
제트기는 이미 이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레이브스가 전혀 주저 없이 안에 들어서자 최윤은 또 놀랐다.
“이거 조종은 어떻게 합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여도 파일럿 자격증도 있습니다. 이런 녀석쯤은 아무 것도 아니죠.”
요즘 그레이브스한테 정말 여러 번 놀란다. 이 남자, 대체 못하는 게 뭐지?
조종석에는 위성 전화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전화기에는 작은 메모도 하나 붙어 있었다.
「멕시코, 제네럴 마리아노 에스코페도 국제공항.」
그레이브스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부조종석에 앉은 최윤이 의아해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카타리나가 제 다음 행선지까지 꿰뚫어보고 미리 현지 준비를 해놓은 것 같습니다. 이럼 오백만 달러는 필요가 없을 텐데…….”
“돈을 아끼면 좋은 거 아닌가요?”
“그냥 제 생각이 읽히는 게 거북한 겁니다. 현금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일단 그레이브스는 제트기를 출발시켰다. 항공 신고도 되어 있는지 비행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하긴, 카네기 가문의 소유 전용기인데 뭐가 문제가 될까.
그레이브스는 그대로 남서 방향으로 비행기를 몰아, 국경을 넘어서 몬테레이까지 진입했다. 마리아노 에스코베도 국제공항 관제탑의 승인을 받고 활주로에 착륙했다.
제트기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남자가 접근해왔다. 멕시코인이지만 그는 영어가 유창하고 능숙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그는 이미 위조 여권 두 개와 항공편까지 마련해놓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거기까지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다만 그는 여권을 선뜻 내주지 않은 채 손가락만 비볐다.
‘이미 계산이 끝났을 텐데. 욕심이 많군.’
그레이브스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십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남자는 만족한 듯했다.
항공편은 뉴욕에서 몬테레이를 경유해 한국 김포 공항으로 가는 국제편이었다. 항공기는 카네기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는 항공사 소속이었다. 직원들과 공항 관계자까지 매수가 되어 있었는지, 여권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둘은 간단히 탑승할 수 있었다. 심지어 짐 조사도 하지 않았다.
카타리나가 준 위성 전화로 문자가 왔다.
「저의 도움은 여기까지입니다. 즐거운 여행되시길.」
* * *
초조한 마음과 달리 태평양을 지나가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김포 공항에 착륙했다. 인천공항이 아닌 이유는 아마 한시라도 빨리 최윤을 집에 보내게 해주려는 배려일 거라 생각했다. 참 치밀하면서도 다정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짐을 가지고 내리는 과정에서 생겼다. 카네기 가문의 손길은 한국까지 뻗어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 이거 뭐야?”
“무슨 일인데?”
“가방에 달러가 가득 들어 있어요. 그것도 죄다 고액화폐들인데요? 못해도 수백만 달러는 되겠어요.”
“뭐야?”
공항 세관은 난리가 났다. 세관 직원이 촬영 장치에서 고액 화폐를 발견하고 즉시 검문을 시작했다. 그레이브스와 최윤은 당연히 세관 직원의 호출을 받고 끌려갔다.
“차장님, 이거 위조 여권입니다! 밀입국자들이에요!”
“뭐야? 인터폴에 범죄자 기록 조회해 봐!”
지금처럼 국제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수백만 달러의 고액화폐를 가지고 밀입국을 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제니스 연구단지 효웅산업 대표이사 최윤입니다. 주민등록 번호는…….”
“뭐? 최윤 박사? 아이오와 주에서 돌아가셨다는 그 분? 가만, 닮긴 닮았는데요?”
“죽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분장한 게 아닐까요? 이미 죽었잖아요?”
“대체 당신 누구야!”
세관 직원들 중에는 최윤의 얼굴을 아는 이도 꽤 있었다. 그러나 직접 본 게 아니고 경제 신문이나 과학 잡지를 통해서 본 게 전부였다. 당연히 ‘진짜 닮았는데?’라고 생각은 해도, 동일인인지는 구분하지 못했다. 오히려 최윤으로 위장한 범죄자는 아닌지 의심을 하는 게 합당했다.
“전화 한 통만 하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전혀 거리낌 없이 당당한 태도가 걸렸다. 일단 전화 한 통만 하게 해달라고 한다. 출입국 소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무실 전화를 쓰게 했다.
“회장님, 저 최윤입니다. 예. 지금 김포 공항입니다만…… 신분 확인이 되지 않아 밀입국 혐의로 붙잡혔습니다. 멕시코를 경유해서 위조된 신분으로 몰래 들어왔는데 한국 출입심사대에서 발각이 나서요……. 예,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출입국 소장은 혼란에 빠졌다. 자기 앞에서 밀입국이니, 위조 신분이니 하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게 너무 이상했다. 범죄자라면 저런 말 절대 안 할 것이다. 진짜로 최윤인가? 죽었다고 알려진 그 최윤?
1분도 되지 않아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예, 김포 출입국관리사무소장 최철식입…… 예엣!”
무심코 전화를 받다 말고 소장은 벌떡 일어났다.
「나 청와대 안보수석 박대수요. 곧 직원들을 보낼 테니 그분들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 관련 직원들을 전부 한 곳에 모아 격리하시오. 절대 그 분에 관한 이야기가 외부로 새어나가선 안 됩니다. 곧 가겠소.」
“아, 알겠습니다!”
============================ 작품 후기 ============================
그레이브스 : 490만 달러가 남았는데 어쩔까요?
최윤 : 그냥 너 가지세여. 수고 많았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