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7 해답을 위하여 =========================================================================
다행히 박정구 의원은 정효주를 못 알아봤다. 하기야 딱 한 번 창설식에서 스치듯이 보았을 뿐인데 알아본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짙은 화장, 조명, 그리고 의외의 장소가 한몫했다. 설마 하니 세계 최고 거부의 아내가 이런 곳에서 남편과 상황극을 즐기고 있을 줄 상상이나 할까.
“아무튼 전 이만.”
탐스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박정구 의원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정효주의 손을 잡으려 했다.
“이봐! 너! 어딜 가려…… 크악!”
정효주가 뿌리치자 박정구 의원은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움켜쥐었다. 살짝 쳤을 뿐인데 무슨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팔 전체가 얼얼했다. 혹시 뼈에 금이 간 것은 아닐까?
힘 조절을 잘못한 정효주는 심장 떨어질 듯이 놀랐다. 괜히 사람 하나 다치게 만들면 좋을 게 없다.
신랑과 이런 곳에서 밀월을 즐긴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면 구설수에 오를 뿐이다. 물론 소문 확산을 차단하고 찍어 누를 힘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둘만의 비밀로 영원히 남겨두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둘이 아니라 셋인가?
“재희! 이게 무슨 짓이야!”
한 번 뿌리치자 그 힘을 못 이기고 넘어졌던 팀장이 비틀거리며 나와서 화를 냈다. 하지만 표정 어딘가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얽혀 있었다.
‘혹시 탱커 아냐?’
여성 탱커는 힘이 매우 셀 뿐더러, 하나같이 인형처럼 아름답다. 드물지만 화류계에서 일하는 여성 탱커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생각난 팀장은 괜히 잘못 건드리면 내년에 제사상 받는 건 아닌지 무서웠다.
그래도 큰 손님 앞인데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않은가. 하물며 그 손님이 아가씨한테 한 대 맞고 저리 고통스러워하는데.
“저 오늘까지만 나올게요. 이제 안 나와요.”
“뭐, 뭐?”
“수고하세요.”
“아, 안 돼! 재희! 재희야!”
팀장은 사색이 되었다. 다른 아가씨 수십을 합친 것 이상을 벌어들이는 재희를 놓쳤다가는 매출이 급감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희가 없으면 큰손 ‘김 실장님’이 더 이상 이 가게를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
“안 돼에!”
* * *
밤 바이러스 살포 이후 호남산 곡물은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농작물이 되었다. 처음 바이러스 저항력을 키우기 위해 호남산 곡물을 먹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제 그 맛에 반해서 꾸준히 섭취하고 있었다.
호남평야에서는 자연 수산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식량을 취급하고 있다. 벼, 밀, 보리, 옥수수, 콩, 감자, 고구마는 물론이요, 사과나 배 등의 과실도 키운다.
놀라지 마라. 심지어는 바나나와 야자수도 품성품성 열매를 잘 맺는다. 연구, 혹은 견학을 위해 호남평야를 찾아온 식물학자들은 지상의 모든 식물을 모아놓은 천국이라는 감탄사를 터트리기도 했다.
농작물을 정제한 백신 알약은 그 판매량이 급감했다. 그 말인즉슨 전 세계인을 상대로 백신 투여가 끝났다는 것. 알약 판매량이 급감한 대신 그만큼 곡물 판매량은 늘어났다. 백신을 투여 받은 사람들이 이제 백신 대신 농작물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호남산 농작물은 다른 인공 의약품과는 달리 인체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체내에 침투한 밤 바이러스만을 공격하고 약효가 사라집니다. 또한…….」
근래 세계 의학계에서 가장 핫한 이슈라면 뭐니 뭐니 해도 호남산 곡물의 효능 연구다. 의학자, 약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호남산 곡물의 효능을 연구해서 경쟁적으로 논문을 실었다.
곡물뿐만이 아니다. 호남산 곡물로 만든 사료로 키운 가축의 고기 또한 바이러스 저항력을 키워준다는 연구가 발표되자, 호남산 인근 가축 농가의 매출도 껑충 뛰었다.
호남산 농작물이 세계인의 밥상에 오르고.
호남산 농작물 사료를 먹고 큰 가축의 고기가 식탁에 오른다.
논산평야는 호남평야와 같은 일을 당한 곳이다. 후에 유지웅은 논산평야에도 안전지대를 설치해봤지만, 호남평야처럼 땅의 성질이 변하지는 않았다. 토양에 흡수된 과잉 결정 에너지가 중화되어 평범한 땅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물론 부수작용으로 논산평야 또한 매우 드문 옥토로 토양 성질이 바뀌기는 했다. 하지만 호남평야가 있는데 굳이 논산평야에까지 농사를 짓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논산평야에 투입할 인력이 있다면 차라리 호남평야에 투입하는 게 수만 배는 효율적이다.
그 논산평야가 간판을 바꿔 달았다.
「호남 목장.」
현재는 논산평야도 유지웅 소유다. 호남평야가 샛별로 떠오르자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하는 농민들이 안 되어 보여서 예전에 비싼 값을 쳐주고 샀다.
옥토이기는 하지만 논산평야에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자영업 농업인은 호남평야로 다 몰린 상태. 덕분에 호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농지가 버려졌다.
아무튼 땅을 놀리기도 뭐 했던 유지웅은 그냥 원하는 사람에게 논산평야를 매우 싼값에 임대해주기로 했다. 물론 처음에는 임대를 하는 사람들이 안 나왔다.
그러나.
“자네, 그거 들었어? 호남산 농작물이 밤 바이러스 효능에 엄청난 효능이 있다는데?”
“밤 바이러스? 그게 뭐야?”
“그 왜 있잖아. 유럽 놈들이 약 팔아먹으려고 일부러 지들이 병균 만들어서 퍼뜨린 거. 그러니까 그게…….”
“정말? 가만, 그럼 이거 호남산 곡물 이제 세계에 내다 팔리는 건가?”
호남에서 일하던 젊은 농업인들 중 눈치가 빠른 사람은 CERC 사태 직후 잽싸게 진로를 바꿨다. 바로 축산업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호남산 곡물로 가축을 키우던 영농업자들이 있긴 했으나 규모가 매우 적었다. 그나마도 호남평야에서 중국과 일본에 육류를 공급하기 위해 지원을 해서 유지되고 있는 농가들이 다였다.
“논산이 임대료가 싸!”
발 빠른 농업인들이 비어 있는 논산으로 몰려들었다. 일명 논산 러시라 불리는 대이동. 논산의 임대료는 매우 쌌고 대부분이 놀고 있는 땅이었다.
많은 이들이 앞을 다투어 논산에 축산업 사육장을 세우고 소, 돼지, 닭, 오리 등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다. 임대료가 매우 쌌기에 충분히 생산 경쟁력이 있었다. 거기에 추가 혜택이 있었다.
“호남 목장에 가축 사료로 주는 건 그냥 원가로 해주세요.”
“네? 하지만 그래서는…….”
“어차피 거기서 사료로 소비하는 물량 얼마 되지도 않는데 뭐 어때요. 그냥 배려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논산평야에 뚝딱 만들어진 목장은 ‘호남 목장’이라는 브랜드를 내세웠다. 호남평야에 바로 붙어 있고, 호남산 곡물을 먹고 자란 가축이니 뭐 어떠냐는 전략이다. 그리고 세계 의료기구시장에서 ‘독일’하면 알아주듯이, 세계 식량시장에서는 ‘호남’이라는 타이틀이 제대로 먹혔다. 이게 논산평야가 호남 목장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호남산 곡물은 국제 곡물 시장에서 타곡물에 비해 약 20% 정도 비싸다. 다른 나라 농업인들을 위한 조그만 배려였다. 만약 동일한 가격이라면, 호남산 곡물을 제외한 다른 곡물은 전부 시장에서 퇴출되고 말 것이다.
호남산 곡물을 먹고 자란 가축들은 신기하게도 성장 속도가 빨랐고 육질 또한 최상급이었다. 병에도 걸리지 않았다. 호남평야는 그렇게 곡물과 육류로 세계 식량 시장을 지배하는 굳건한 1위 메이저로 부상했다.
* * *
가을이라고 시어머니가 김장을 해서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서둘러 집에 들어온 정효주는 김장을 보관한답시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배추가 아주 맛있게 잘 익었어. 호남 땅이 참 옥토라니까.”
“고생하셨어요. 잘 먹을게요, 어머니.”
“너네 집은 냉장고가 커서 참 좋구나. 저거 다 채우려면 그것도 큰일인데 말이야.”
정효주는 그냥 배시시 웃었다. 흑석동 저택 조리실에서는 식당용 대형 냉장고를 쓴다. 유지웅 일가의 식사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식사까지 책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리실은 항상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시어머니는 고용인들 먹을 것까지 생각해서 무슨 김치 공장 납품처럼 김장을 잔뜩 해왔다. 김장 수송을 위해 유지웅이 보유한 V-23까지 동원했다.
흑석동 저택 별채 건물에는 많은 고용인들이 가족과 함께 상시거주하고 있다. 경비원 100명에, 저택 내부를 담당하는 가정부 인력 30명, 정원과 수영장, 건물 외곽 정비 등 전반적인 관리보수를 맡는 관리실 인력 20명, 2기의 V-23 운용에 필요한 파일럿 4명과 정비원 10명, 인천공항에 있는 장거리 전용기 A3 운용 인력인 파일럿 2명과 스튜어디스 10명이 살고 있다.
직장에 살고 있는 셈이지만 고용인들도 불만은 없었다. 별채 건물이 웬만한 고급 빌라보다 잘 꾸며져 있는데다가 무료로 살게 해줬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많은 인력들이 먹을 김장까지 해서 가져왔으니, 그 양이 엄청나다는 것만 알아두자. 물론 시어머니도 사람을 써서 김장을 했다.
“어휴, 힘들다.”
시어머니가 호남으로 돌아가고 난 그날 저녁, 침실에서 유지웅이 엄살을 피우자 정효주는 쿡 웃으며 나무랐다.
“지켜보기만 했으면서 뭐가 그리 힘드니. 일은 가정부 사람들이 다 했지.”
“그래도 관리감독하느라고 옆에 서서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엄마가 직접 온 거만 아니면 나도 그냥 방에서 쉬는 건데…….”
“언제 지켜봤다고. 보이지도 않던데. 아, 그러고 보니……. 킥킥.”
“갑자기 왜 웃어? 뭐 재밌는 일 생각났어?”
“아니, 아까 술집에서 웃긴 일 겪어서.”
“웃긴 일?”
박성구 의원을 만난 걸 대강 이야기해주자 유지웅은 갑자기 화를 냈다.
“아니,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국회의원이 그런 데 드나들면서 접대 받아도 되는 거야?”
“접대인지는 모르겠고, 근데 우리도 갔잖니?”
“우리야 장소만 빌리러 간 거고! 또 우리는 민간인이잖아! 공직자는 그런 데 드나들면 안 되지!”
“자기, 너무 열 내는 거 아니야?”
“열 받잖아! 내 마누라한테 술 따르라고 했는데, 안 열 받아?”
아, 그게 진짜 이유셨어?
“그냥 넘어 가. 우리 그런 데 드나든 거 소문 나서 좋을 것은 없어.”
“뭐 어때? 우리나라에서 누가 우리한테 뭐라 할 수 있어? 미국도 내 한 마디에 훅 가는 마당인데.”
“그래도 일 크게 키우지 말자. 넘어가, 넘어가. 나한테 잘못 맞아서 손목에 금 갔을지도 몰라.”
“……하긴, 효주 니 손이 흉기긴 하지.”
효주 말대로 둘이 유흥 술집을 그런 식으로 이용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다. 에너지 위원회라면 유지웅이 유일하게 깊숙이 간섭하는 국회 조직이다. 결정체를 공급하는 레이더로서는 당연한 구도였다.
기억도 안 나는 저만큼 아래 말단 따위가 감히 자기 마누라한테 술을 따르라고 한 게 그냥 좀 화가 났다. 유지웅은 일단 참기로 했다.
* * *
“박 실장님.”
“예, 회장님.”
“박정구 의원,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작심하루? 까지는 아니다. 아무리 참기로 했다지만 애지중지하는 와이프한테 술 따르라고 한 게 어디 그리 하루 만에 쉽게 잊혀지나. 모처럼 공격대 사무소로 출근해서 보고서를 훑어보다가 무심코 그렇게 말이 나왔다.
그런데 박우진 비서실장의 반응이 이상했다.
“세 시간만 여유를 주시면 바로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네? 보고서요?”
“예. 바로 준비하러 나가겠습니다.”
유지웅은 다소 얼떨떨했다. 이건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보아하니까 박 실장이 박정구 의원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무소장실을 나온 박 실장은 바로 제니스 비서실에서 일하고 있는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데, 그 6번 자료 바로 정리해서 가져와.”
「6번 자료요? 회장님께서 더 이상 묵인하지 않기로 하신 겁니까?」
“그런 모양이다.”
「결정체 관리부에 피바람이 불겠군요. 그동안 몰래 헤쳐 먹은 게 한두 푼이 아니잖아요.」
“특히 박정구 의원 라인 구조도와 관련자 자료 조사 위주로 해서 자료 정리해.”
「알겠습니다. 바로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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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에 사고가 끊이지 않는 동안 여의도는 참 평안했는데...
이제 리즈 시절 다 간듯.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