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43 Pre-season - 커플편 =========================================================================
“너, 택시 타고 다녀?”
“어. 왜?”
아직 면허를 딸 나이가 아닌지라 유지웅은 택시를 타고 다녔다. 개인기사도 고려했는데, 딱히 기사가 머무를 만한 곳이 없다 보니 그냥 귀찮아서 택시를 타고 다닌다.
“와, 그것도 무려 모범이야!”
“…….”
평범한 고교생 눈에는 모범택시를 타고 등교하는 게 특별해 보이는 모양이다. 개인 기사도 안 돼, 자가 운전도 안 돼,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를 타고 다니는 건데…….
택시 두 대를 잡아서 여의도로 향했다. 남자애들 둘은 처음부터 살짝 주눅이 들어 있었다. 여자애들 셋만 신이 나서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이윽고 일행은 주상복합건물 케즈닉에 도착했다. 평당 가격이 수천만 원을 훌쩍 호가하는 고급 주상복합건물의 위용에 여자아이들은 신기한 듯 갸웃거렸다.
“근데 여기 넓이가 어떻게 돼?”
“상가는 5, 600평쯤 된다고 하던데? 아파트는 100평 정도래. 오피스텔은 20평쯤 된대.”
“그거 말고 다른 평수는 없대?”
“응. 아파트랑 오피스텔, 전부 동일 평수래.”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케즈닉은 5층까지는 상가, 6층부터는 일반 주거로 되어 있다. 5층까지는 한 몸이지만 6층부터는 A동과 B동으로 각각 갈린다.
겉보기에는 A동과 B동의 크기는 차이점이 없어, 쌍둥이 타워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부는 차이가 있다. A동은 한 층이 100평대 아파트 2개 가구로 이뤄져 있고, B동은 한 층이 20평대 오피스텔 9개로 이뤄져 있었다.
유지웅은 정문으로 들어섰다. 주거지역 출입구는 정문이 따로 막혀 있어, 입주자만이 들어갈 수 있게 돼 있었다.
여자애들은 당연히 B동이 있는 우측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유지웅이 왼쪽으로 틀자 어리둥절했다.
“왜 저기로 가지?”
“그러게. 이쪽 아닌가?”
유지웅은 카드를 찍고 들어섰다. 급우들이 주춤거리며 뒤를 따랐다. 젊고 잘생긴 경비원들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꾸벅 인사를 하자 학생들도 엉겁결에 목례로 받았다.
어느덧 여학생들은 조용해졌다. 유지웅은 무심하게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유지웅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학생들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유지웅이 버튼도 안 누르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지원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기, 너 투룸에 산다고 하지 않았니? 여긴 A동인데?”
“맞아.”
“……층수 버튼 안 눌러도 돼?”
“알아서 올라갈 거야.”
이게 무슨 소리야? 버튼도 안 눌렀는데 알아서 올라가다니?
친구들이 이해를 못하는 눈치이자 유지웅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보여주었다. 입주자 전용 출입 카드였다.
“여기 칩이 내장돼 있는데 엘리베이터에 센서가 있어서 타고 내릴 때 자동 인식하거든. 탈 때는 알아서 꼭대기로 데려다 줘.”
“……꼭대기?”
“맨 위에 집이 하나뿐인데 버튼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올라올 수 있잖아.”
학생들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엘리베이터에는 버튼이 24층까지만 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25층에 딱 멈췄다. 문이 열리자 짧은 복도 앞으로 현관문이 하나 나타났다. 층 전체에 한 가구밖에 없는 것이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다. 학생들은 머뭇거리며 들어가지를 못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뭐해? 들어 와.”
유지웅이 손짓했다. 그제야 학생들은 못 올 곳에 온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순간 여학생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 우와…….”
영화나 사진에서나 보던 그림 같은 집안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넓게 탁 트인 거실과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인 고급 인테리어는 숨이 막히게 했다.
산뜻한 베이지색 가죽 소파와 벽면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100인치 급 디지털 TV, 그 옆에는 영화 관람을 위한 홈시어터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반대편에는 넓고 깨끗한 주방이 있고, 그 앞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식탁이 있었다. 일층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거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은연중에 무리를 이끄는 성지원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고급 아파트 펜트하우스?
“이, 이게 투룸이야?”
“투룸 맞지. 여기 방 하나. 위에 방 하나.”
유지웅은 거실과 천장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뭐가 잘못됐냐는 듯이 말했다. 성지원은 더 기겁을 했다. 200평짜리 거실로도 모자라, 위에 하나가 더 있어? 복층식이야?
“위층은 내 침실이니까 올라가면 안 돼.”
“아, 알았어.”
남학생들은 아예 기가 질려서 아까부터 한 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짧은 단발을 한 소녀, 한예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지웅아. 주방 좀 구경해도 되니?”
“해. 어차피 다 트여 있는데.”
그 말대로 1층은 거실과 주방이 거의 다 트여 있어 ‘방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여학생들은 쪼르르 뭉쳐서 주방으로 향했다. 남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가방 내려놓고 편히 앉아 있어.”
“아, 응.”
“나 잠시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유지웅은 가방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남학생들은 엉거주춤 하다가 가방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100인치에 달하는 디지털 TV가 마냥 신기해 보였다.
“와, 저런 TV는 얼마나 할까?”
“저번에 80인치인가 하는 게 3천만 원인가 하던데. 이건 못해도 100인치는 되어 보여.”
“야, 게임기도 있어. 종류별로 다 있는데?”
“우와! 이거 봐! 여기 책장에 죄다 게임기 타이틀이야!”
한쪽에 놓인 책장을 보고 남학생들은 기겁을 했다. 수백 개가 넘는 게임 타이틀이 나란히 꽂혀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면 가정집이 아니라 게임 판매장인 줄 알겠다.
한편 여자애들도 난리였다. 주방에 모여서 이것저것 조리도구를 만지며 꺅꺅거렸다.
“이거 대리석 식탁 아니야? 얼마나 할까?”
“검색해보자! 꺅! 오백만 원이래!”
“와, 식탁 하나가 무슨 오백이나 해? 미쳤어, 미쳤어!”
“이 집, 이 집은 얼마나 할까?”
“보통 여기 200평 아파트면 150억쯤 한다고 들었는데, 여긴 복층식이고 또 펜트하우스니까…… 아, 몰라! 몰라!”
“월세나 전세는 아니겠지?”
“어쩜 자기 집 아닐지도 몰라. 학교 다닐 동안만 잠깐 지내려고 세 들어 사는 걸 수도 있어.”
“어쩜! 어쩜!”
이윽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유지웅이 내려왔다.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던 남학생들, 조리도구를 만지작거리던 여자애들이 일제히 말을 멈췄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고 과제할까?”
“아, 너무 폐 끼치는 거 아니니?”
성지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무리에서는 제법 미모가 받쳐주는 여자애다 보니, 다른 애들을 앞에서 이끌고 있었다. 심지어 조장이기도 했다.
“별로. 너희들 뭐 좋아해?”
“…….”
“그럼 그냥 골고루 시킬 테니 알아서 먹어.”
유지웅은 핸드폰을 꺼내서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들었다.
“여기 A동 2501호인데요. 한식, 중식, 일식 갖다 주세요. 여섯 명이요.”
통화는 짧았다. 성지원은 지금 어디에 전화를 걸었는지 엄청 궁금했다. 단순한 배달집은 아닌 거 같은데?
“저기, 궁금해서 그러는데 물어봐도 돼? 한식, 일식, 중식이 한꺼번에 되는 곳도 다 있니?”
“아, 요 앞에 제원호텔 레스토랑에 시켰어.”
“……호텔 레스토랑?”
“거기 배달 서비스도 하거든.”
극소수 VIP를 상대로 하는 ‘찾아가는 레스토랑’ 서비스라서 유지웅도 애용하고 있었다. 눈 튀어나올 만큼 비싸고 세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서비스지만 아무튼. 삼시 세끼를 항상 효주 밥만 먹을 수는 없는 처지 아닌가.
‘대박! 완전 대박!’
성지원은 가슴이 뛰었다. 학교에서 봤을 때는 그냥 잘 사는 집 아들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다.
한강이 바로 보이는, 여의도 복층 펜트하우스에 혼자 살고 있는 17세 고교생이라니! 게다가 이런 것쯤 사치도 아니라는 듯 익숙한 저 표정을 봐! 이건 진짜다! 대박이다!
“과제나 하자.”
“응!”
아무튼 그렇게 합동 과제를 시작했다.
“이 교과서는 안 돼.”
“왜?”
“이거 친일파가 만든 회사야. 여기 애들이 하는 말은 들을 가치도 없어. 기각.”
“그래?”
“어차피 8년 뒤에는 산소호흡기 겨우 달고 살 애들인데 무슨…….”
“어, 그게 무슨 말이니?”
“있어. 그런 거.”
국사 합동 과제는 뭐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주눅이 들어 있었던 남학생들도 과제에 집중을 했다.
한창 열심히 과제를 하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유지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왔네. 먹고 하자.”
“와아!”
친구들은 신이 났다. 유지웅은 중앙 경비실에 전화를 했다. 안 그러면 배달원이 여기로 못 올라온다.
이윽고 십여 명의 종업원이 저마다 카트를 끌고 들어섰다. 흔한 배달원을 생각했던 친구들은 무슨 호텔 룸서비스처럼 차려입고 들어온 사람들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기가 죽었다. 여기 아파트가 아니라 호텔이었어?
종업원들은 저마다 식기 카트를 끌고 들어서서 분주하게 상을 차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한상 가득 차려지며 위용을 뽐냈다. 잘 구운 닭 요리, 초밥과 회 등이 상다리가 부러질 듯이 차려졌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종업원들이 식기 카트를 끌고 나갔다. 친구들은 차마 식탁 앞에 앉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배 안 고파? 먹자.”
“으, 응.”
성지원이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식탁에 앉았다. 오늘 참 여러 가지로 놀라게 된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런 서비스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무나 되는 건 아니겠지?’
젓가락을 한 점 들면서 성지원은 유지웅을 힐끔 살폈다.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는 모습이 어쩜 그리 멋져 보이는지. 그러고 보니 아까 계산도 안 했는데? 아마 이미 따로 한꺼번에 지불이 된 거겠지?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과제에 집중하는데, 또다시 아까 그 종업원들이 방문했다. 그들은 익숙한 듯이 남은 식기와 잔반을 전부 수거하고, 깨끗하게 청소를 해놓았다. 그야말로 찾아가는 호텔 풀코스였다. 성지원은 문득 한 끼에 얼마나 하는지 궁금해졌다.
대강대강 과제를 하던 유지웅은 문득 핸드폰이 진동하는 걸 느끼고 확인했다. 정효주였다.
“어, 효주야.”
「나 지금 거기 가고 있어.」
“응? 나 지금 조별 과제 중인데?”
원래 정효주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펜트하우스를 찾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과제 때문에 오지 말라고 미리 말을 했는데? 갑자기 왜?
「나도 같은 조로 편성됐거든.」
“뭐? 원래 여섯 명 아니었어?”
「그랬는데 우리 반이 37명이잖아. 나 혼자 남았거든. 그래서 선생님이 나 거기 조로 넣었어. 나도 지금 알았어.」
“아, 그래?”
「응. 지금 일층인데, 어떡해? 카드 찍고 들어가? 아니면 열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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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단속하러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