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67 나는 핵물리학자다 =========================================================================
레이더의 등장은 스펙 중심의 기록경기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육상, 수영 같은 종목이다. 이런 종목들은 탱커나 근접 딜러가 조금만 노력을 해도, 일반인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없다.
반면 축구 등 구기 종목, 피겨 스케이팅 같은 예술 종목, 그리고 스펙이 아닌 테크닉 위주의 개인 종목은 살아남았다. 오히려 스포츠 종목 가짓수가 줄어든 만큼 전보다 더한 성사를 누리고 있었다.
동계 올림픽 종목도 마찬가지다. 스피드 스케이팅 등 단순한 시간차 다툼을 벌이는 종목은 사라졌지만, 예술 점수를 겨루는 피겨 스케이팅이라든가, 컬링, 스노보드 묘기 점프 같은 종목은 여전히 성사를 누렸다.
페어 프리 스케이팅이 시작되었다. 첫 출전 국가는 러시아였다. 조용하면서도 때론 저돌적인 음악에 맞춰 그림 같은 호흡을 자랑한 남녀는 마지막 인사 끝에 멋진 박수갈채를 받았다.
상당히 높은 점수가 나오자 남녀 선수들은 몹시 기뻐하며 경기장을 돌고 관중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어느 한 여성 선수에게 달려가서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코치인 모양이었다.
유지웅이 그걸 보고 말했다.
“코치가 동양인인가 봐요?”
“아, 모르십니까?”
“예?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빅토리아 한이라고, 6년 전에 우리 러시아로 귀화한 한국 사람입니다. 당시 빙상연맹 파벌 싸움에 마음고생이 심하다가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압니다.”
“아, 그래요?”
6년 전이라면 갓 레이더로 각성해서 자기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해 빌빌 거릴 때다. 특히 레이드 관련 일이 아니면 아마 관심도 없었을 테니, 모르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만 해도 유지웅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원래 협회라는 곳이 워낙 찌질한 애들이 많은 지라, 그냥 실력 있는 인재 하나 놓쳤구나 하는 인식이 다였다.
그러나 여자 프리 스케이팅이 시작되었을 때…….
「빅토리아 한! 역대 최대 점수입니다! 놀랍습니다! 누가 그녀가 세월 앞에 퇴색했다고 감히 비웃을 수 있을까요!」
서른을 넘긴, 선수 겸 코치로 참가한 빅토리아 한의 프리 댄스 무대는 생동감과 역동감 그 자체였다. 모든 관객들이 그녀의 손끝 하나하나에 숨을 죽였으며, 표정 하나에 심호흡을 했고, 도약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경기장이 좁아 보일 정도로 빠르고 넓게, 광활하면서도 수줍은 몸짓으로, 관중의 시선과 정신을 빼앗아버린 춤사위는 마치 하늘에서 선녀가 떨어져 내린 것 같았다. 누가 감히 그녀를 서른이 넘긴 퇴물이라 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빅토리아 한, 이번 무대가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라 했지요?」
「그렇습니다. 이번 소치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해서 모스크바대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 힘을 쓸 거라 합니다.」
「러시아의 미래가 참으로 밝습니다.」
점수는 유지웅도 봤다.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원래 그는 스케이팅 종목은 잘 모르고, 관심도 없었으니까. 다만 빅토리아 한이라는 인물이 대단히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그리고 관중들의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생생히 지켜봤다.
그래서 이상했다. 아니, 왜 저런 인물이 러시아로 귀화를 한 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뭘 했기에?
키틴 대통령이 옆에서 만족한 듯이 껄껄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지웅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박수를 치던 손이 멈춘다. 하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피겨의 여제라는 타이틀을 지켜내고, 우아하게 은퇴를 한 자국 선수가 마냥 자랑스러운 것이다.
유지웅은 자존심이 조금, 아주 조금 상했다. 그는 주저 없이 비서실장에게 명령했다.
“저 선수, 귀화 과정에 관해서 좀 알아내 보세요.”
* * *
꿈은 끝났다.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한효수, 아니 빅토리아 한은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았다. 사실 이번 올림픽 출전은 많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말렸다. 여제의 카리스마에 자칫 흠집을 남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집을 부려 코치 겸 선수로 출전을 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피눈물이 날 정도로 연습을 했다. 여제의 위명을 지켜내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태어나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적이 있을까, 스스로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리고 해냈다. 꿈은 끝났지만, 이 영광된 순간은 그녀의 가슴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으리라.
관중을 바라보며 그녀는 러시아 국기를 들어올렸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준, 소중한 두 번째 조국이다.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그녀의 조국으로 있어줄 나라.
수많은 ‘조국 관중’들이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욱 환호하며 찬사를 보냈다. 그녀는 웃음으로 그들에게 보답하며 대기실로 들어섰다.
그때 낯선 인기척을 느꼈다.
“실례합니다. 한효수, 아니 빅토리아 한 선수 되시죠?”
유창한 한국어였다. 한국에서 온 사람인가? 빅토리아 한은 가벼운 경계심이 들어서 상대를 바라봤다. 그녀가 태어난 나라는 이제 그녀에게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온갖 언론에서 나라를 버린 매국노 소리가 튀어나올 테니.
온 가족과 함께 이민을 와서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저 아무 상관없이 운동을 할 수 있고, 후진을 양성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 정신 아니던가.
“저는 유지웅이라고 합니다.”
유지웅?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그러고 보니 얼굴도 낯이 익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빅토리아 한은 순간 헉 하고 숨이 멎을 뻔했다.
‘제니스!’
놀라웠다. 상대는 세계 최고의 VVIP이자, 세계의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리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치솟았다. 그런 인물이 자신에게는 대체 무슨 일로 찾아왔단 말인가?
“아,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빅토리아 한 선수의 경기를 봤습니다. 대단히 감명 깊고, 아름다운 연기였어요. 사실 피겨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지만, 빅토리아 한 선수 덕분에 제 눈이 새로 트인 것 같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자신의 연기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니, 스포츠 선수로서 기쁘기 그지없는 칭찬이었다.
“그리고 들었습니다. 빅토리아 한 선수가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를 떠나 러시아에 몸을 담게 되었는지도요.”
“……아.”
가슴 아픈 과거가 생각나자 빅토리아 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그때의 서러움과 모멸감이 떠올랐던 것이다.
“고작 기득권층의 파벌 싸움, 이익 다툼 때문에 빅토리아 한 선수 같은 훌륭한 보석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크나큰 실수이자 죄악입니다. 또한 빅토리아 한 선수가 예전에 겪은 노고에 관해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제가 진심으로 사죄를 드려요.”
유지웅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빅토리아 한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껏 누구도, 단 한 번도 ‘조국을 대표해서 사죄한다’라는 말 따위를 한 적이 없었다. 힘 있는 자들은 그런 더러운 파벌 생태계를 모른 체 했고,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아우성으로만 남았다.
그런데 대통령보다 더 힘이 있다는 인물이 직접 자신을 찾아와서 사죄를 한다고 머리를 숙였다. 그것도 빙산 연맹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인물이 말이다.
입을 틀어막은 빅토리아 한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유지웅은 잠시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돌아보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맙……습니다. 저를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해주신 분은 처음이었어요.”
“너무 늦어서 죄송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다 용서했어요. 이제 아무렇지 않습니다.”
유지웅은 쓰게 웃었다. 다 용서했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세상에서 무서운 말이 어디 있을까.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한국에 잠시 돌아와주셨으면 합니다.”
빅토리아 한은 잠시 멈칫 했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러시아는 이미 저의 조국입니다. 이제 다시 없던 일로 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국으로 돌아와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잠시만 와달라는 겁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잠시만요?”
“빅토리아 한 선수를 만나러 오기 전, 빅토리아 선수의 귀화 과정이 어떻게 된 건지 잠깐 훑어봤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문제는 빙산 연맹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스포츠 협회의 비리가 심각하다는 거지요. 저는 거기에 메스를 대고 싶습니다.”
빅토리아 한은 숨을 죽였다. 유지웅의 의도가 무엇인지, 언뜻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여기 오기 전 이미 문화체육부와는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저는 모든 분야에 걸쳐 무차별, 무제한적으로 수술대에 올려서 메스를 댈 작정입니다. 수술을 견디고 이겨낼지 말지는 하늘에 달린 셈이죠. 저는 그 메스를 빅토리아 한 선수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메스를…… 저에게?”
“예. 우리나라로 재귀화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후진 양성을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비리를 완전히 걷어낼 수 있도록, 메스만 휘둘러 주시면 됩니다. 한때 조국이었던 정을 생각해서 부디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빅토리아 한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유지웅은 묵묵히 그녀가 사색을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수술이라면, 어느 정도까지를 말씀하시는 거죠?”
“엄청난 대수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을 수도 있어요.”
“상관없습니다. 그리 되면 무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저는 오히려 그리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많은 반발이 뒤따를 거예요.”
“그 반발을 짓밟을 힘이 있어요.”
“왜 회장님께서 굳이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거죠? 회장님은 스포츠와 아무 상관이 없지 않나요?”
유지웅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나라거든요.”
“…….”
“그리고 저는 제 나라를 바꿀 힘이 있고요. 그러니 하는 겁니다. 그게 다예요.”
각오라고 할까? 아니, 그것은 틀렸다. 각오는 힘이 없는 자가 커다란 도전에 부딪칠 때 다지는 마음가짐 같은 것. 이 경우는 각오가 아닌 ‘의지’라고 해야 옳으리라.
빅토리아 한은 유지웅의 눈에서 굳은 의지를 느꼈다. 타협도 하지 않고 도중에 멈출 의지도 없는 그런 굳건한 의지를. 그런 사람의 말이라면 한 번 믿어 봐도 좋으리라. 그의 인물됨은 이미 국제적인 재난 극복 과정에서 몇 번이나 검증된 것 아니던가?
빅토리아 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맡겠습니다, 그 메스.”
“토양 자체를 갈아엎어버려도 됩니다. 부탁드릴게요.”
굳은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몇 몇 기자들에 의해 찍혔다. 이 사진은 빅토리아 한에게 힘을 실어주는 도구가 될 것이다. 빅토리아 한은 그가 조금 무서웠다. 만약 그것까지 계산해서, 일부러 이 타이밍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고.
‘젊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냉철할 수가.’
아무렴 어떠랴. 빅토리아 한은 이것이 기회라 생각했다. 자신을 몰아낸 파벌주의에 대대적인 보복을 할 기회이자,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스포츠 토양을 대규모로 정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비록 자신은 이제 러시아 사람이지만 이것만큼은 옛 조국을 위해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가장 적임자였다.
한편 유지웅은…….
“두고 봅시다, 불곰 나으리. 으으, 4년 뒤에는 내가 반드시……!”
그냥 금메달 개수에서 진 게 분해서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을 뿐이라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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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연은 거들 뿐.
모든 스포츠 협회를 수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