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2 넘어져도 기적 =========================================================================
카네기와 제니스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다.
유지웅은 로스차일드 등 미국을 주름잡는 거대 유대 자본과 몇 차례에 걸쳐 싸운 적이 있다. 직접적으로 부딪친 적도 있지만 간접적으로 부딪친 적도 많다. 물론 그때마다 번번이 그가 승리를 했다. 최종 싸움에서 승리한 지금 로스차일드는 사실상 그 이름을 내렸다.
미국 내 반한 세력은 토미 에슨과 로버트 등을 내세워서 몇 차례나 그를 간접 공작했다. 바로 미국 보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룹이었다. 그런데 카네기 가문도 그들과 완전히 무관할 순 없는 입장이었다.
딱히 어떤 구심점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하는 정통 보수층이 다양하게 응집되어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리기도 애매하고 어렵다.
그래도 카네기 가문은 테레사를 생각해서 나름 중도를 지킨답시고 조심했다. 허나 거대한 가문의 모든 계열사까지 일일이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 카네기와 제니스의 관계는 조금 애매하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둘은 발코니에 마주 보고 앉아 찻잔을 따랐다. 유지웅은 문득 세인의 의자 옆에 웅크리고 앉은 커다란 회색 개를 보았다. 꼬리가 축 늘어지고 털도 윤기가 없는 것이, 썩 건강해 보이지 않는 개였다.
“애완견이신가 봐요?”
“맞소. 이래봬도 열세 살이 넘었지요.”
개가 열세 살이 넘었다면 수명이 오늘 내일 한다는 소리다. 세인은 무척 소중한 듯이 손을 뻗어 개를 쓰다듬었다.
“가능하면 나 죽을 때 같이 갔으면 했지만…… 사람 목숨이라는 게 생각보다 질겨서 말이오. 내 바람대로 되진 않을 것 같소만.”
“무슨 말씀이세요. 앞으로 한 삼십 년은 더 정정하실 거 같은데요.”
세인은 피식 소리 없이 웃었다. 백발이 생생하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건장했고, 또 정정해 보였다.
유지웅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카네기에서 서열 투쟁에서 밀려난 인원이 꽤 있다고 들었어요.”
세인은 여유롭게 말을 받았다.
“내부 단속을 좀 했지요.”
“후원자들인가요?”
후원자. 토미 에슨을 지원한 이들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었다. 세인도 당연히 그 뜻을 눈치 챘다.
“거대한 가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챙길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약간의 과실은 이해해주었으면 감사하겠소.”
“물론 이해하고 있습니다.”
“테레사, 그 아이가 제니스 가문의 사람이나 다름없으니 사실 우리 양가만큼 돈독한 관계가 어디 있겠소?”
은근한 표현에 유지웅은 피식 웃었다. 세인은 그의 웃음에서 무한한 여유를 느꼈다. 카네기 따위가 무슨 마음을 품고 접근을 한다 해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그런 자신감. 과연 세계의 패권을 쥔 인물다운 여유였다.
“보아하니 도련님이 테레사, 그 아이를 잘 따르는 거 같소만.”
“훌륭한 보모 노릇을 해주고 있어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훌륭한 탱커지요.”
무수한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세인은 그렇게 운을 떼면서, 신중하게 생각했다. 과연 유지웅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또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렇죠. 훌륭한 탱커죠. 제니스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다. 설마 자신의 속내를 읽지 못한 것은 아닐 테고, 관심을 보일 필요도 없다는 것일까? 아니면…….
‘소실(小室 : 첩)이 아니어서 아쉽긴 하지만, 며느리도 괜찮지. 오히려 더 낫다.’
세인은 원래 테레사가 유지웅의 여자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알아볼수록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지웅 부부의 금슬이 보통 좋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보통 그 정도 부를 쥐었으면 몇 번을 한눈팔아도 부족할 것이다. 헌데 그런 적이 없단다. 한 번도 사고를 친 적이 없다고 했을 때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나름 손녀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던 세인은 조금 실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또 달라졌다. 테레사를 따르는 유세현을 봤기 때문이다. 보모가 누나 되고, 누나가 여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진 않은가.
늙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축복이다. 특히 여성, 그것도 아름다운 여성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테레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축복을 지녔다.
‘쿤겐…….’
한편 차를 홀짝이며 유지웅도 생각했다. 테레사한테 흔들린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여신이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로 눈부신 미모를 지녔으니까.
하지만 자신에게는 효주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는, 다른 어떤 여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아내였다. 그런데도 다른 여자마저 탐내는 것은 그녀에 대한 죄악이자, 스스로가 용서하지 못할 수치라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현주가 참 고맙네.’
불현듯 첫 여자친구인 최현주 생각이 났다. 10인 공격대 결성을 위해서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안달을 냈던 소녀였다. 당돌하게 자기 몸까지 이용했고,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그가 힐러 능력을 잃음으로써 파국을 맞았다.
처음에는 그저 슬펐다.
그리고 앱서버로 각성한 뒤, 그녀 앞에서 보란 듯이 잘난 체 했을 때는 그저 후련했다.
그러나 6여 년이 지난 지금, 신기하게도 그녀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녀 때문에 쓰린 실연을 겪어보지 못했다면, 과연 효주의 소중함을 그렇게 일찍 깨달을 수 있었을까? 결혼해서도 다른 여자한테 한눈파느라고 몇 번이나 효주 속을 썩이진 않았을까?
지금 정효주한테 제대로 집중하고, 사랑하고, 또한 떳떳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최현주를 통해 겪은 아픔 덕분이기도 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이제는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그러고 보니 뭐 하고 살고 있지? 시집은 갔으려나?’
문득 찾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아니 지구에서 그가 마음먹고자 하면 못할 것은 없다.
‘에이, 됐다. 효주가 알면 오해할 텐데.’
하지만 잠시 생각하다 관두기로 했다. 역시 와이프가 오해할 만한 짓은 안 하는 게 최고다.
파티는 즐겁게 치러졌다. 전문 요리사들이 정성껏 마련한 진수성찬이 쉴 새 없이 나왔다. 포도주와 와인을 비롯한 각종 술과 음료는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240여 명의 제니스 대원들은 웃고 떠들며 음식과 술을 즐겼다.
나름 기품 있는 파티를 기대했던 카네기 가문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소 실망한 듯했으나, 곧 기꺼운 마음으로 그런 분위기에 얽혀 들었다. 상류층 문화에 익숙한 그들에게는 소탈하게 파티를 즐기는 제니스 특유의 가벼운 분위기가 나름 신선했다. 사실 재력으로 따지면, 제니스 대원들 한 명 한 명은 카네기 가문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밤이 깊어가고, 모두가 술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였다.
왜애애애애앵! 왜애애애애앵!
갑작스럽게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렸다. 술이 확 깰 정도로 날카로운 사이렌이었다. 대원들은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채로 두리번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난리라도 났어?”
카네기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보아하니 도시 전체에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집사를 비롯한 하인들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달려왔다.
“레드 몹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레드 몹이?”
세인은 순간 놀랐으나 곧 침착하게 받았다.
“어차피 이곳은 안전지대가 있으니까 상관없겠군. 손님들에게 안심하라 하시고 다들 파티를 즐기라고 해주시게.”
“예, 알겠습니다.”
말을 해놓고 보니 문득 웃긴다. ‘레드 몹이 나타났지만 안전지대가 있으니 안심하세요.’라는 말을 해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인가? 지금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 레드 몹을 잡으러 다니는 사냥꾼들인데?
“안전지대 밖에 나타났는데도 사이렌을 울리다니, 미국은 안보 조치가 꽤 투철하군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곧 정부 조직 공격대가 진압을 할 겁니다.”
“흠, 이왕 이리 된 김에 용돈이나 한 번 벌어볼까 하는데, 혹시 미국에 실례가 될까요?”
유지웅이 넌지시 말을 하자 세인은 바로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 정도쯤은 자기 재량으로 얼마든지 말을 해줄 수 있다.
“천만에요. 연방정부와 주정부도 조기에 물리칠 수 있어 기뻐할 겁니다. 아무래도 피해는 안 나는 게 좋으니까요.”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헬기 좀 빌릴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유지웅은 카네기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인맥 관리하기에 바쁜 정효주를 찾아냈다. 옆구리를 가볍게 쿡 찌르자 그녀가 웃는 얼굴로 돌아봤다.
“왜?”
“레드 몹 나타났잖아. 잡으러 가자.”
“우리가? 뭐 하러?”
“용돈이나 좀 벌게.”
“어우, 안 그래도 요즘 레이드만 하느라 지겨운데 여기까지 와서 잡아야 돼?”
“남 의장님 기억 안 나? 우리가 일 안 하고 제니스 대원 다 데리고 놀러간다고 해서 막 울려고 하셨잖아. 남 의장님 선물 주는 셈치지 뭐. 십 분이면 되는데, 뭐.”
“칫.”
정효주는 술잔을 내려놓고 나섰다. 몸에 착 달라붙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참 예뻤다. 근데 아무래도 저 차림 그대로 레드 몹을 잡으러 갈 모양이다. 그걸 보고 카네기 사람들이 놀라서 수군거렸다.
“미시즈 정, 그 차림으로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괜찮아. 금방 다녀올게요.”
유지웅 커플은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헬기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레드 몹은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안전지대 안으로는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안전지대 밖의 시설들을 부수고 있는 중이었다.
인근 상공에는 긴급 출동한 헬기들이 떠 있었다. 원래라면 공격대가 출동하기 전까지 괴수를 유인해야 하지만, 안전지대가 있어서 대기 중이었다. 무의미하게 군 병력의 손실을 방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 공격대는 출동 안 했나?”
“준비 좀 많이 해야 될 걸. 그래도 레드 몹이잖아.”
“이왕 온 거 미국 공격대가 어떻게 사냥하는지 한 번 지켜보는 건 어때?”
“뭐 하러. 그냥 잡자. 나 저거 팔아서 금동이 선물 해줄래.”
정효주가 살짝 애교를 부리며 말하자 유지웅도 표정이 헤 하고 풀어졌다. 그는 보란 듯이 팔을 걷어붙였다.
“좋아, 그럼 바로 잡자! 미국이 자기들 거 잡아갔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괴수는 먼저 잡는 게 임자다. 그리고 애초에 그가 하는 짓에 뭐라고 토를 달 만큼 간 큰 인간은 이제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유지웅이 손을 뻗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정효주의 몸이 희미한 빛에 휘감겼다. 보호막이 걸린 것이다. 딜 장비 하나 들지 않았지만, 저 정도 레드 몹쯤이야 한 주먹감이다.
정효주는 그대로 빠르게 질주했다. 타닥타닥 뛰어가는 소리에 그제야 레드 몹이 반응을 보였다.
―캬아오오오오!
레드 몹은 몹시 화가 났는지 포효를 질렀다. 유지웅이 그걸 보고 혀를 끌끌 찼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예전에는 레드 몹이 정효주만 보면 무서워서 쫄았다. 그녀의 체내에 있는 퍼플 결정체 반쪽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레드 몹이 정효주를 보고도 안 쫀다. 오히려 의기충천해서 달려든다.
탐지장비가 결정도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레드 몹도 정효주의 체내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정 에너지가 깃들어 있는지 느끼지 못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하앗!”
그리고 궁극기 에너지를 담은 주먹 한 방에 즉사! 정효주는 빨간 드레스를 펄럭이며 땅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뒤로 하얀 빛이 일어나며 레드 몹의 사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술도 먹었겠다, 유지웅은 기분 좋게 다가가서 정효주의 허리를 감쌌다.
“별 것도 아닌 녀석이 시끄럽게 하고 말이야. 어디 보자, 이 녀석은 얼마짜리려나…….”
“자기야, 잠깐!”
“어, 응?”
“아, 안 돼!”
유지웅은 지금 취했다. 취해서 결정체를 맨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는 걸 순간 깜박했다. 당연히 장갑을 낀 줄 알았던 정효주는 뒤늦게 기겁을 해서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사신경으로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사태는 이미 늦어 있었다.
“만지면 어떡해!”
“……아, 맞다.”
옛날 같았으면 술이 확 깼을 것이다. 수천억을 그대로 허공에 날려버린 셈이니. 하지만 아주 조금 ‘아차’ 싶을 뿐 술은 깰 기미가 없다. 유지웅은 대수롭지 않게 결정체를 대충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 나중에 하나 더 잡으면 되지. 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어휴, 못 말려.”
정효주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이제 와서 블루 결정체 하나가 둘에게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림하는 입장에서는 아깝기는 했다.
============================ 작품 후기 ============================
나귀족 극초반 시절, 주인공의 첫 여자친구인 최현주에 관해서 참 징글징글하게 말이 많았습니다. 이런 애 왜 등장시켰느냐 부터 시작해서 캐릭터의 존재 의의를 모르겠다는 등 정말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죠.
당시 주인공은 평범한 서민에서 막 출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것도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당연히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고 눈에 봬는 게 없어야 정상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정효주와 바로 사귀었다면 속 무진장 썩였을 겁니다. 제대로 관계 유지도 못하고 깨져버렸을 가능성이 높죠.
최현주는 바로 주인공에게 조건이 전부는 아니고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체득시켜주기 위해 제가 장치한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관해서 징글징글하게 말이 나오지만, 저는 절대로 빼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주인공 정도 위치에 올라간 인물이 여자관계에 있어서 저 정도 절제력, 그리고 와이프에 대한 의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젊은 시절의 그 정도 아픔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아 진짜 이 말 하려고 일 년 8개월 동안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모르겠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