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9 넘어져도 기적 =========================================================================
연구진은 결정체가 유지웅과 접촉해서 젊어지게 하는 성질을 얻는 현상을 ‘접촉 반응’이라고 임시 명명했다. 귀속 반응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만든 표현이었다.
그린 결정체와 달리 블루 결정체는 어떤 레이더든 신체에 닿으면 고유한 공명 융합을 일으키는 성질이 있다. 이를 귀속 반응이라 하며, 귀속주 외에는 그 결정체를 쓸 수 없게 된다. 귀속 반응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귀속주가 사망해야 한다.
그린 결정체는 귀속 반응은 없지만, 유지웅과 정효주가 만졌을 때 흡수되는 현상이 있었다. 지금은 둘의 결정도가 한계에 이르러 흡수 현상이 사라졌다. 그러나 유지웅이 만지면 복용시 젊어지는 성질을 얻게 된다.
“세포에 간섭하는 파장이 보호막의 고유 파장과 매우 유사합니다. 아마 보호막의 능력이 결정체로 옮아가면서, 신체를 젊어지게 하는 효과로 변이를 일으킨 게 아닐까 싶습니다. 회장님의 체내에 있는 퍼플 결정체가 매개체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연구진은 그렇게 추정했다.
체내에 있는 퍼플 결정체가 보호막 고유의 힘을 접촉한 결정체에 전이시킨다는 가설이다. 그 전이된 힘이 세포에 관여하여 젊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연구원이 농담 삼아 ‘앱서버 능력이 이제는 젊음까지 보호하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요? 설마 처음부터?”
만약 앱서버 능력을 얻은 처음부터 이랬다면 진짜로 엄청 많이 억울할 것 같다. 2차, 3차 궁극기를 각성할 때 얻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대체 언제적 일인데! 왜 여태껏 모르고 있었지?
“글쎄요. 어쩌면 전 지구적 안전지대를 설치한 이후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퍼플 결정체가 사라지면서 두 분의 체내 결정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까?”
전 지구에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난 뒤, 매개체가 된 퍼플 결정체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냥 사라진 게 아니라 유지웅과 정효주의 체내 결정체에 변화를 끼쳤다. 그 뒤로 어떤 탐지 장비도 둘의 결정도를 감지하지 못했으며, 레지나는 그것을 결정체의 숙성 현상 같다고 추론했다. 현재 최윤이 그 점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 중이다.
“그럼 효주가 만진 결정체는 왜 아무런 변화가 없죠?”
“만약 레지나 박사의 가설대로라면, 숙성이 아직 덜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숙성, 숙성이라…….”
잠시 중얼거리던 유지웅이 다시 물었다.
“규명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하루 이틀에 끝날 연구가 아닙니다. 충분한 시간에 걸쳐 검토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서둘러 주세요. 부탁드려요.”
유지웅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 *
젊음을 원하는 부호들은 안전을 위해 검증 기간이 필요하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서울에 눌러앉기로 작정을 한 듯이 장기 체류 준비를 시작했다. 150여 명에 가까운 대부호들이 그대로 서울에 머물렀다. 당연히 한국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강아지마냥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최근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지만, 150여 명이나 되는 부호들은 하나하나가 범상하지 않은 이들이다. 사우디 국왕, 미국의 결정체 재벌, 영국 왕실 등등 하나같이 재산이 ‘조’ 단위에서 시작하는 인물들이다.
그런 쟁쟁한 인물들이 150여 명이나 머무르고 있으니, 외교부가 불이 안 날 수가 없다.
“나는 젊음의 비약을 원하오.”
늙은 대부호들은 젊음의 비약을 얻기 전에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젊음의 비약을 얻어낼 것이라는 각오가 분명했다. 만약 유지웅이 지금처럼 국제 패권을 쥔 인물이 아니었다면, 진작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괴수 때문에 전쟁은 사라진 거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젊음을 눈앞에 둔 대부호들의 탐욕을 막을 수 있을까? 그들은 젊음의 비약을 손에 넣기 위해, 수많은 피가 흘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니까 유지웅이 지금만큼 힘을 갖추지 못했다면 말이다.
“어찌 보면 유지웅 회장이 지금 그 능력을 얻은 게 시기적으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만약 6년 전에 한꺼번에 얻었다면 지금의 유지웅 회장은 존재하지 못했겠지요. 한국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대통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는 곧 웃음을 지웠다. 깍지를 낀 표정이 심각해졌다. 장관들도 웃고 떠들던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이제 제 임기도 올해가 마지막입니다.”
“3선에 도전하지 않으실 겁니까?”
어느 장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한민국은 연임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더군다나 대통령은 아직 젊은 편이었고, 열정이 있었다. 지지율도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 지지율이 사실 유지웅 덕분에 국가 경쟁력이 껑충 뛰어오르면서 오른 것이 많지만.
“해야지요. 손 놓고 물러날 마음은 없습니다.”
비서실장을 비롯한 측근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 대통령의 3선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WCO의 남기철 의장이다. 그가 당장이라도 대선에 출마한다면, 그리고 유지웅이 지지 의사를 표현한다면 국민들은 그를 밀어줄 것이다.
“아시겠지만 이번 3선은 어떤 지저분한 편법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정정당당하게, 깨끗하고 깔끔한 승부를 해야 합니다.”
부정부패에 관한 법이 대대적으로 개정되면서, 공직자의 비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거의 전멸 수준이었다.
게다가 선거 공방전 자체도 신사적으로 해야 한다. 얼마 전에는 유지웅이 ‘스포츠 정신에 입각한 정정당당한 승부를 보여줬으면 한다.’라고 대놓고 발언한 적도 있다.
치사하게 물어뜯고 헐뜯고 했다가는 그가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는 힘 있는 자들은 절대로 봐주지 않는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이번 일을 혼신의 힘을 다해, 가장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말뿐인 국익이 아니라 진정한 국익을 위한 방향으로요.”
측근들은 생각했다. 이번 일을 잘 해내면 유지웅도 대통령을 달리 보게 될 것이다. 사실 대통령이 젊다 하나 남기철과는 연배 차이가 10년 이상 난다. 대통령 자리를 놓고 굳이 남기철이 그와 경합을 벌일 연배는 아닌 것이다.
WCO 의장 자리가 끗발이 떨어지나 하면 그것도 아니지 않나? 남기철은 좀 더 WCO 의장을 해먹다가 나중에 대통령에 진출해도 상관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일을 잘 해결해서, 유지웅에게 잘 보여야 한다. 유지웅이 ‘어, 대통령 아직 쓸 만하네?’라고 생각이 들면 남기철의 대선 진출을 보류시킬 것이다.
그야말로 모두가 윈윈하는 이상적인 형태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일을 아주 잘 해결해야 한다.
“유지웅 회장과 자리를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 *
제니스가 전용기, A3가 날렵한 자태를 아부다비 공항에 내려놓았다.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환영식은 없었다. 대신에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감시망이 있었다. 사방에 배치된 요원들이 무전기로 실시간 정보를 교환하며 경호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전용기에서 유지웅이 내렸다. 그는 김철희와 박현정을 대동했다. 정효주는 일부러 함께 오지 않았다. 그는 공식적으로 아부다비를 방문한 적도, 한국을 떠난 적도 없다. 위장을 위해 정효주는 일부러 서울에 놔두고 온 것이다.
“어서 오게, 친구.”
궁전 같은 집에 들어서자 안슐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유지웅도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껴안았다.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오래 된 동네친구를 대하듯이 마음이 편안한 상대다. 또한 본질을 찌르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조언으로, 지금의 그가 있게 만들어준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다.
“바쁠 텐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나?”
“알고 있었군요?”
“그 많은 사람들 귀에 들어갔는데 모를 수가 없지.”
“근데 안슐은 안 왔어요? 그래도 돼요?”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조르지 않아도 자네가 나중에 하나 챙겨주겠지.”
안슐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게 들리는 농담이다. 조금의 가식도 담기지 않은 발언, 이래서 유지웅이 6년이 넘도록 그와 지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죠. 안슐 건 내가 나중에 선물로 해줄게요.”
“아직 안전성이 미흡한가 보군?”
“어떻게 알았어요?”
“안전성이 검증됐다면 자네가 벌써 하나 들고 왔겠지.”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시네요. 효주도 안슐이 그런 말 할 거라고 했는데.”
“본인보다 주변인이 더 잘 알 수 있는 부분도 있네. 몇 걸음 떨어져서 보면 더 잘 보이는 법이지.”
안슐은 넓은 인공 호수가 보이는 정원으로 그를 안내했다. 발코니에 준비된 테이블에 앉자 잠시 후 직원들이 요리와 술을 가져왔다. 안슐의 궁전을 방문할 때면 둘은 으레 이곳에 앉아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적당히 술이 들어갔다. 유지웅은 술을 마시며, ‘접촉 반응’ 및 그 밖의 젊음의 결정체에 관해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을 설명했다. 얼큰하게 취했을 무렵 안슐은 포도 한 송이를 따서 입에 넣으며 물었다.
“친구, 하고 싶은 말이 그게 다는 아닌 거 같은데.”
“사실은 생각이 좀 많아요.”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군.”
“지금 100세 시대잖아요. 워낙 약이 좋아서 잘만 관리하면 120세도 거뜬한 시대구요.”
“그렇지.”
“그린 결정체로 10년, 그리고 블루 결정체로 한 번 더 스무 살로 회귀한다 치면, 본래 수명에서 110년을 더 사는 셈이잖아요. 그럼 최고 230세까지 살 수 있다는 셈이고요.”
“맞는 말이네.”
“결정체를 구매할 수 있는 자들이 그렇게 오래 사는 게 과연 좋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늙다리 부호들이 권력을 그렇게 오랫동안 꽉 쥐고 있으면 문제가 될 텐데. 세대 차이도 있고 해서 서로 이해도 못할 테고…….”
안슐은 천천히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아닐세.”
“예? 아니에요?”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에 세대 차이란 없네. 지배층의 나이가 200살이든 20살이든, 어차피 그들은 자기들 스탠다드에 맞춰서 행동하지. 어린 재벌 후계자라고 해서 늙은 재벌 할애비보다 더 고아원 기부금을 많이 내지는 않는다네.”
“…….”
“피라미드 꼭대기층에 있는 사람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중요하지 않네. 그가 어떤 스탠다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적어도 피라미드 하위층에게는.”
“……그렇군요. 괜한 걸 걱정했네요.”
“내 장담하지. 자네만큼 가졌으면서, 자네만큼 약자를 동정하고 배려하는 부자는 없을 걸세. 차라리 거액을 받고 젊음을 팔아 그 돈으로 기아에 굶주린 이들을 직접 돕게. 이참에 국제 자선 사업도 대대로 해보는 거야. 자네가 국내 복지자선 산업을 놓고 고민할 때, 내가 한 말 기억하나?”
“움켜만 쥐고 돌게 하지 않으면 전체가 시든다고 했죠.”
“한국만이 자네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지구 전체가 자네 것이라 생각하고 한 번 해보게. 그래야 돌고 돌아 자네에게 최종적으로 이익이 되네. 굳이 자네 국내 개인 재산을 축낼 것도 없네. 젊어지려고 침을 질질 흘리는 부호들에게 거액을 받아내서 해보면 되지 않나?”
“와, 재미있겠네요. 안 그래도 이제 돈 벌어도 쓸 데가 없어서 굳이 결정체 팔아야 하나 그 생각 하고 있었거든요. 그냥 친한 사람들한테만 돌릴까도 생각했었는데.”
“그럼 너무 아깝지 않나? 대통령도 아쉬워 할 텐데.”
“안 그래도 대통령도 비슷한 말을 하더라고요. 거액을 받아내서 일부를 국제적인 자선사업에 돌리면 저와 한국, 그리고 전 세계 모두가 좋을 거라고.”
“생각이 트인 대통령이로군. 언제 한 번 만나보고 싶어.”
“그럼 원가가 오천억쯤 하니까 형평성에 맞춰 한 30조에서 50조원 사이로 정해서 해서 팔면…….”
안슐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무슨 소리. 대통령이 그런 헐값을 말하던가?”
“예?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부자라 해도 가진 재산이 다 같지는 않은데.”
“재산총액의 퍼센티지로 물리면 되지. 재산세 물리듯이 재산의 양에 따라 가산을 붙이게.”
안슐은 느긋하게 덧붙였다.
“차등을 두되, 100조 원부터는 한 95% 이상으로 책정하게. 그렇게 해도 그들은 기꺼이 살 걸세. 그래도 여전히 호화롭게 잘 살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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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편이 되도록 한결같은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