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99 왕관의 무게 =========================================================================
묵빛 기체가 사뿐히 착지했다. 메인 로터가 멈추고, 후방의 문이 열리며 정효주가 내렸다. 그녀의 안색은 잔뜩 굳어 있었다.
서울까지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신랑은 왜 그 아이를 굳이 집으로 데려왔을까? 병원에 두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본채 사람들을 전부 물린 것일까?
‘최현주는 아니고.’
처음에는 최현주를 의심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그 소녀의 외모를 보면 적어도 백인이다. 하지만 자신과 사귀기 전에 백인과 사귀었다는 건 못 들었다. 그럼 설마?
끼이익.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오늘처럼 무겁게 들린 날이 없었다. 정효주는 들어서다 말고 굳어버렸다. 유지웅이 홀에서 소녀의 머리를 닦아주고 있었다. 뭐야, 설마 씻기기까지 한 거야?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안 돼. 지금까지 지켜온 내숭을 망가뜨릴 수는 없어. 끝까지 우아하고, 품위 있게.
“자기야. 집에는 언제 왔어?”
“어? 효주 너, 언제 왔어?”
“자기가 집에 급히 왔다고 해서 따라 올라 왔지. 무슨 급한 일이기에 나한테 말도 없이 온 거야?”
정효주는 화사하게 웃으며 소녀를 가리켰다.
“그것도 저 아이까지 데리고.”
마음 같아서는 왜 본채 사람들을 다 물렸는지 그것도 묻고 싶은데, 너무 한 번에 다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
그녀의 속마음을 모르는 유지웅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대답했다.
“그럴 일이 좀 있어. 너도 들으면 놀랄 거야.”
“……놀라? 내가 놀라기까지 해야 할 일이야?”
“근데 전화 안 받더라? 전화로 대강 설명하고 올라오려고 했는데.”
“전화했었니?”
그제야 정효주는 핸드폰을 살폈다. 과연 신랑한테서 걸려온 부재중전화 내역이 있었다. 시간을 보니 그가 병원에서 출발하기 직전이 맞다. 이거 왠지 예감이 이상한데?
“아빠. 근데 저 여자는 누구야?”
빠직! 부재중전화 내역에 막 나아지려던 기분에 다시금 찬물이 쏟아졌다.
“피즈. 그렇게 나 부르지 말랬지? 난 니 아빠가 아니라니까.”
“아니야! 아빠 맞아! 아빠 맞아!”
“아빠가 아니래도!”
둘이 그렇게 다투는 게, 꼭 부녀가 다투듯이 정다워 보여서 정효주는 더욱 화가 났다. 잠깐, 그런데 지금 무슨 이상한 단어가 섞인 거 같은데?
“엄마가 그랬어! 아빠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난 아빠 보자마자 알았는데!”
“나미 씨가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지, 그게 나라고는 하지 않았다며! 대체 내 어디를 보고 아빠랑 생각한 거야!”
“아빠 맞아! 엄마랑 같은 느낌이 난단 말이야!”
“으아! 나미 씨는 대체 유아교육을 어떻게 했길래…….”
“잠깐, 지금 뭐라고 했니?”
“응? 아아.”
답답해하던 유지웅은 표정이 밝아졌다. 더 이상 아빠라는 오해를 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덕분이다.
“효주야, 얘 피즈래.”
“……피즈? 설마, 그 피즈?”
“응. 놀랐지? 나도 엄청 놀랐어.”
정효주는 그만 쥐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세상에, 맙소사. 저 아이가 피즈라고? 말도 안 돼! 피즈는 분명히 백상아리 모습을 한 해양 괴수 새끼인데!
‘가만?’
그러고 보니 나미와 무척이나 닮았다? 맞다. 처음에 나미 딸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 그럼 정말로?
* * *
“말도 안 돼.”
피즈의 지느러미 꼬리까지 확인한 정효주는 마침내 신랑의 결백을 믿게 되었다. 그녀는 창피했다.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대체 어느 금발의 미녀가 신랑을 유혹했는지 그 점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까.
“너 말야. 남자를 의심이나 하고 말이야. 그러는 거 아니다.”
“……미안해. 미안.”
“세상에, 어떻게 친자 검사 같은 걸 하자고 할 수 있어? 아무리 확실한 게 좋다지만, 나 엄청 섭섭했던 거 알아?”
“진짜 미안.”
이때라는 듯 유지웅은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 정효주는 입안의 혀처럼 굴며 살살 그의 비위를 맞췄다. 그래도 다행이다. 피즈를 서울로 데리고 온 것 때문에 2차, 3차 오해를 한 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해서.
“아, 맞다!”
문득 생각이 난 정효주가 외쳤다. 그녀는 얼른 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친자 확인 검사를 없던 일로 하라고 했다. 아울러 관련 자료를 전부 완전 폐기하라고 했다.
피즈의 모발이라면 인간의 것과는 다른 검사가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미 같은 인간형 괴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에는 철저한 비밀이다. 혼란을 키울 수는 없었다.
물기 젖은 머리에 수건을 돌돌 말은 피즈는 뾰로통한 얼굴로 유지웅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정확히는 억지로 파고들어서 그가 못 떼어내게 단단히 껴안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두 눈은 잔뜩 힘을 주고 정효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엄마의 경쟁자! 아빠를 빼앗아간 여자! 뭐 그런 존재를 보듯이.
“아직 어린 거 같은데. 어떻게 된 거래? 벌써 독립한 거야?”
“나도 물어봐야지. 너 엄마는 어쨌니? 왜 혼자 다녀?”
“엄마 몰래 나왔어. 정신이 들어 보니까 아빠가 내 눈앞에 있었어.”
꼬박꼬박 아빠라고 부른다. 이제는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할 기력도 안 생긴다. 귀를 막은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사람 말을 안 들을까.
“엄마는 너 어디 갔는지 아셔?”
“몰라.”
“엄마가 모른다는 거야, 엄마가 아는지 모르는지 그걸 네가 모른다는 거야?”
“몰라.”
“그러니까 어느 쪽…….”
“몰라. 몰라.”
정효주가 혀를 쯧쯔 찼다. 역시 신랑은 애 다루는 법을 모른다.
그녀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물었다.
“혹시 지금 엄마 어디 있는지 아니?”
“…….”
“언니가 엄마 찾아줄게. 응? 아니?”
“…….”
대답은커녕,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한다. 더욱 더 유지웅의 품으로 깊이 파고들 뿐이다. 아빠는 내 거야! 그러니까 눈길도 주지 마! 꼭 그러하듯이.
“어떡하지?”
“나미 씨가 찾으러 오지 않을까?”
“들어보니 나미 씨는 피즈가 여기 있는 거 모를 것 같은데? 우리도 나미 씨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작년, 나미는 바다로 떠나고 연락이 끊겼다. 이쪽에서 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사는 그녀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을 하는 것도 아니고.
“광고 같은 거 내면 안 되나? 피즈를 데리고 있습니다, 뭐 그렇게 대대적으로.”
“나미 씨가 그런 걸 보겠어? 바다 어디에 있다고만 생각하겠지, 뭍으로는 안 올라올 걸?”
“그렇기도 하겠네.”
나미 입장에서 설마 피즈가 땅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 어떡하지? 무슨 재주로 나미에게 피즈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릴 수 있을까?
“모비딕을 이용하면 어때?”
“모비딕은 새끼만 남았잖니.”
“그래도 가끔 자기 새끼들 보러 오잖아.”
“말이 통해야 시키든지 말든지를 하지. 피즈가 여기 있으니 나미 씨를 찾아달라고 어떻게 의사 전달을 하니?”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되었다 해도 기본적으로 언어 체계가 전혀 다른 종 아닌가. 간단한 지시는 몰라도 그런 복합 의사 전달은 아직 불가능하다.
답답한 마음에 정효주가 다시 물었다.
“피즈야. 혹시 엄마 찾을 수는 없어?”
“…….”
“언니가 너 엄마 찾아주려고 그래. 응? 말해주지 않을래?”
“……러지.”
“뭐라고? 잘 안 들려.”
피즈가 마침내 입을 열자 정효주는 희색이 되어 재촉했다. 그러나 피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나 쫓아내고 아빠 독차지하려고 그러지!”
“아니, 그게 아니라 언니는 네 엄마를 찾아주려고…….”
“싫어! 나 엄마한테 안 가!”
그 말에 유지웅이 더 당황했다.
“아니, 애야. 아직 어린 아이면 엄마 품에서 자라야지 엄마한테 안 간다고 하면 그게 말이 돼?”
“아빠도 같이 가! 나 혼자서는 안 가! 못 가!”
“그러니까 나는…….”
“저 여자한테 아빠 못 줘! 아빠! 나랑 같이 엄마한테 가, 응?”
목을 껴안고 매달리며 졸라댄다. 귀엽고 깜찍하긴 한데 이건 좀 부담스럽다. 아니, 이 몸은 임자가 있는 몸이라니까? 그리고 사람이 바닷속에서 어떻게 살아? 용궁이라도 있대?
“아빠.”
그때였다. 소란을 듣고 4층에서 유세현이 내려왔다. 낮잠을 자다가 깬 모양이었다. 아이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 누나는 누구예요?”
“세, 세현아!”
유지웅은 기겁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착한 아들까지 이 아침드라마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은데!
숨이 막혀라 유지웅의 목을 껴안고 있던 피즈가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하품을 하던 유세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녹빛 눈동자에 유세현은 하품을 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 작품 후기 ============================
"당신이 제 이복 누나라는 사실에 처음으로 운명을 저주했...."
-삑! 삑! 허용될 수 없는 플레그입니다. 올바른 어카운트로 엑세스해주시기 바랍니다.